Q. 신라 왕족 중에서 박씨 성을 가진 왕족은 어떻게 됐나요?
안녕하세요. 이동광 전문가입니다.신라 건국 초기에는 박혁거세(1대), 석탈해(4대), 김알지의 후손(13대 미추왕 이후) 등이 각기 다른 성씨로 왕위를 계승하며 비교적 평등한 권력 분점 체계를 형성했습니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점차 김씨가 정치적·군사적 기반을 강화하고, 귀족 사회 내에서 영향력을 키워나가면서 왕권의 중심이 되어 갔습니다.특히 4세기 중엽, 내물왕(17대, 김씨)이 즉위하면서부터 왕위가 김씨 일족에 의해 세습되기 시작했고, 이후 점차 김씨 왕권은 고정되며 왕위 독점 체제가 굳어졌습니다. 내물왕은 마립간이라는 칭호를 사용하며 중앙 집권 체제를 강화했고, 외적으로는 고구려와의 관계를 통해 군사력을 보강하는 등 정치적 입지를 굳혔습니다.그 결과 박씨나 석씨 계열의 왕족은 더 이상 왕위 계승권을 주장하지 못하게 되었고, 이들은 이후 신라의 중앙 귀족층 혹은 지방 세력으로 변화해 갔습니다. 특히 박씨는 경주 지역 등지에서 유력한 지방 귀족으로 존속하거나, 때로는 군사·행정적 실권을 가진 관직을 통해 명맥을 유지했습니다. 일부는 사찰을 세우거나 불교의 후원자로 활동하면서 종교와 문화 분야에서 역할을 하기도 했습니다.하지만 김씨 왕권이 강화됨에 따라 박씨 왕족은 정치적 중심에서는 점점 멀어졌고, 점차 '왕족'이라기보다는 '귀족'의 위치로 변화하게 되었습니다.
Q. 16세기 이전 1706년 설립된 생명보험에는 도박성이 있었다고 하는데 이유가 무엇인가요?
안녕하세요. 이동광 전문가입니다.1706년에 설립된 세계 최초의 근대적 생명보험회사인 "앰퍼러 오브 차이나 소사이어티"와 같은 초기 생명보험 제도는 오늘날과는 매우 다른 구조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특히, 보험증서를 경매에 부치고 낙찰자가 피보험자의 사망 시 보험금을 받는 방식은 도박적 요소를 갖고 있었는데, 그 이유는 다음과 같습니다.우선 당시 보험에서는 보험에 가입된 사람(피보험자)과 보험금을 받는 사람(수익자)이 다른 경우가 많았습니다. 즉, 어떤 사람이 다른 사람의 생명에 대해 보험을 들고, 그 사람이 죽으면 보험금을 타게 되는 구조였기 때문에, 수익자가 타인의 죽음을 바라는 금전적 유인을 가지게 되었습니다.또한 이 시기에는 보험계약 자체가 공개적으로 거래되기도 했는데, 보험증서가 경매에 부쳐져이를 낙찰받은 사람은 특정인의 사망 시 보험금을 받을 수 있는 권리를 가지게 되었습니다. 이 구조는 마치 누가 먼저 죽을지를 놓고 내기를 거는 것과 같은 구조였기 때문에 도박성으로 간주될 수밖에 없었습니다.마지막으로 대부분의 계약은 일정 기간 내에 피보험자가 사망해야 보험금이 지급되었기 때문에, 사망 시점이 이익과 손해를 좌우하는 중요한 요소였습니다.즉, 피보험자가 일찍 죽을수록 수익자는 큰 이득을 보고, 오래 살 경우 손해를 보게 되므로, 이는 사실상 확률 게임과 다르지 않았던 것입니다.
Q. 로알 아문센이라는 사람은 누구인가요?? 오늘 인터넷을 열어 보니깐 로알 아문센이라는 사람 탄생일이라고 뜨는데요. 이사람누구인가요?? 업적이 뭔가요??
안녕하세요. 이동광 전문가입니다.로알 아문센(Roald Amundsen)은 노르웨이 출신의 대표적인 극지 탐험가로, 20세기 초반 세계 탐험사에 커다란 족적을 남긴 인물입니다. 그는 특히 남극과 북극을 비롯한 극지방 탐험에서 탁월한 성과를 거두었습니다.그의 첫 번째 큰 업적은 1903년부터 1906년까지 이어진 북서항로 탐험이었습니다. 당시 대부분의 항해자들이 실패했던 북아메리카 북쪽의 바닷길, 즉 북서항로를 아문센은 소형 선박 '요아(Gjøa)'를 이용해 최초로 완전히 항해하는 데 성공했습니다. 이 항해는 단지 항로 개척에 그치지 않고, 북극권 원주민들의 생활 방식에서 영감을 얻어 혹한의 환경에서 생존하는 법을 배우는 기회가 되었습니다.그의 가장 유명한 업적은 1911년 인류 최초의 남극점 도달입니다. 아문센은 영국 탐험가 로버트 스콧과의 경쟁에서 승리하여, 1911년 12월 14일 남극점에 세계 최초로 도달했습니다. 그는 개 썰매를 이용하고, 경량 장비와 이누이트식 방한복을 채택하는 등 철저한 준비를 통해 혹독한 남극 환경을 극복했습니다. 반면, 스콧의 탐험대는 무거운 장비와 인력 의존적인 방식으로 접근하다가 비극적으로 전원이 사망하며 실패했습니다. 이로 인해 아문센의 전략과 생존 기술은 더욱 주목받게 되었습니다.이후 아문센은 1926년에는 비행선을 이용해 북극점을 통과하는 데에도 성공했습니다. 그는 이탈리아의 엔지니어 움베르토 노빌레와 함께 비행선 '노르게(Norge)'를 타고 스발바르 제도에서 출발하여 북극점을 지나 알래스카까지 비행함으로써, 인류 최초로 북극점을 항공으로 정복한 인물로 남았습니다.말년에는 북극 탐험 중 실종된 이탈리아 탐험대를 구조하러 나섰다가 1928년 항공기 사고로 실종되었고, 그의 시신은 끝내 발견되지 않았습니다.
Q. 임진왜란 후 일본으로 돌아가지 못한 왜군이 있었나
안녕하세요. 이동광 전문가입니다.임진왜란이 끝난 뒤, 일본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조선에 남게 된 왜군은 수천 명에 이른 것으로 추정됩니다. 이들은 대부분 패전의 혼란 속에서 귀국하지 못하거나, 버림받고 도망친 자들이었습니다. 또한 일부는 조선군이나 명군에 포로로 잡혔고, 자발적으로 투항한 자들도 있었습니다. 당시 조선은 전쟁 직후의 복구와 인력 부족 상황을 고려하여 이들을 다양한 방식으로 흡수하고 활용하였습니다.남겨진 왜군들은 주로 하층민이나 노비 신분으로 편입되어 농사, 군사 노역, 수공업 등에 종사하게 되었고, 일부는 기술자나 장인으로서 대우받으며 정착하였습니다. 특히 도자기, 금속, 무기 제작 등에서 뛰어난 기술을 가진 자들은 조선의 기술 발전에 기여하며 비교적 안정된 삶을 누릴 수 있었습니다.또한 일부 왜군은 조선 여성과 결혼해 가정을 이루고 귀화하였으며, 성씨를 받아 조선인으로 동화되었습니다. 이들은 경상도, 전라도 등의 지역에 정착해 살아갔고, ‘왜인촌’이라는 독립적인 마을을 형성하기도 했습니다. 후손들 중 일부는 조선 사회에 완전히 동화되어 지금까지도 그 계보가 이어지는 경우도 있습니다.
Q. 초복, 중복, 말복의 기준이 어떻게 되나요?
안녕하세요. 이동광 전문가입니다.우리나라에서 삼복을 챙기기 시작한 것은 고려 시대 이후이며, 조선 시대에 들어서면서 본격적으로 정착되었습니다. 이는 중국에서 전해진 풍습으로, 무더운 여름철 건강을 지키기 위한 생활의 지혜가 반영된 것입니다. 조선시대에는 관청에서 복날을 기준으로 음식이나 얼음을 하사하는 기록도 남아 있으며, 이로 인해 삼복은 단순한 민간 풍속을 넘어 공식적인 절기 문화로 자리잡게 되었습니다. 이후 민간에서도 여름철 더위를 피하고 원기를 회복하기 위해 삼복을 챙기는 전통이 널리 퍼졌습니다.삼복은 초복, 중복, 말복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이 세 날은 음력과 천간(天干)을 기준으로 정해집니다. 삼복의 시작은 하지(夏至) 이후 세 번째 ‘경일(庚日)’에 해당하는 날부터 시작되는데, 이 날이 바로 초복입니다. 이후 초복에서 두 번째 경일이 중복, 중복에서 세 번째 경일이 말복이 됩니다. 따라서 삼복은 해마다 날짜가 조금씩 달라지며, 대체로 20일에서 30일가량의 기간 동안 이어지게 됩니다.이 시기에는 무더운 날씨로 인해 체력이 떨어지기 쉬워, 삼계탕, 추어탕, 보신탕 등 보양식을 먹는 풍습이 생겨났습니다. 이는 몸의 기운을 보충하고 더위를 이겨내기 위한 전통적인 방법으로, 오늘날까지도 많은 사람들이 삼복 날마다 보양식을 먹으며 여름철 건강을 챙기는 문화를 이어가고 있습니다.
Q. 세계1차대전은 왜 그렇게 많은 나라가 얽혀있나요?
안녕하세요. 이동광 전문가입니다.제1차 세계대전이 유럽에서 시작되었지만 전 세계로 확산된 이유는 다음과 같습니다.당시 유럽 국가들은 삼국동맹과 삼국협상이라는 두 개의 주요 동맹 체제로 나뉘어 있었습니다. 이 동맹 체계는 하나의 분쟁이 다른 나라들을 자동으로 끌어들이는 효과를 만들어냈습니다. 예를 들어, 오스트리아-헝가리가 세르비아를 공격하자 러시아가 세르비아를 지원했고, 독일이 러시아에 선전포고를 하자 프랑스와 영국이 개입하게 된 것입니다.게다가 제국주의 시대였던 만큼, 많은 유럽 강대국들은 아프리카, 아시아, 중동 등지에 식민지를 보유하고 있었습니다. 유럽 본토에서의 전쟁이 이들 식민지에도 전선으로 번졌고, 식민지 출신 병사들이 대거 징집되어 참전했습니다. 예를 들어 인도, 알제리, 세네갈 등의 식민지 병사들이 프랑스나 영국군에 소속되어 전투에 참여했습니다.또한, 경제적 이해관계와 해상 무역로 확보 등의 이유로 전쟁은 자연스럽게 세계 무대로 퍼졌습니다. 전쟁 중 독일의 무제한 잠수함 작전으로 인해 미국 상선이 침몰하자, 1917년 미국도 전쟁에 참전하면서 진정한 의미의 세계대전으로 확산되었습니다.
Q. 우리나라 흥성대원군은 왜 쇄국정책을 한건가요?
안녕하세요. 이동광 전문가입니다.흥선대원군은 조선의 전통적 질서와 왕권을 회복하고자 했습니다. 그는 세도정치로 인해 무너진 왕실의 권위를 바로잡고, 붕괴된 재정과 사회질서를 재건하고자 했습니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 외국 세력, 특히 서양 열강과의 접촉은 조선 내부의 혼란을 가중시킬 수 있다고 판단했습니다.또한, 서양 세력은 기독교 선교사와 함께 들어와 조선 사회의 종교, 문화, 정치 질서를 위협한다고 여겨졌습니다. 특히 천주교가 조선의 유교적 질서와 충돌하면서 사회 불안 요인으로 작용했고, 대원군은 1866년 병인박해를 통해 대규모 천주교 탄압을 단행했습니다. 이 사건은 프랑스의 무력 보복인 병인양요로 이어졌고, 이어 1871년에는 미국의 무력 시도인 신미양요도 벌어졌습니다.이러한 외세의 침입에도 불구하고 대원군은 강경한 태도를 고수했습니다. 그는 강화도 외세 침입에 맞서 싸웠으며, 외국과의 조약 체결이나 문호 개방은 조선의 자주성을 해치는 행위라고 보았습니다. 결국 대원군의 쇄국정책은 “통상수교 거부”라는 강력한 구호 아래 조선을 고립시키는 정책으로 이어졌습니다.
Q. 헨리 8세의 부인들에 대해서 알고 싶습니다.
안녕하세요. 이동광 전문가입니다.헨리 8세의 첫 번째 부인은 스페인의 공주였던 캐서린 오브 아라곤으로, 헨리의 형과 먼저 결혼한 과부였습니다. 헨리는 그녀와의 사이에서 아들 없이 딸 메리만을 얻었고, 결국 이혼을 추진하게 되었습니다. 교황이 이혼을 거부하자, 헨리는 로마 가톨릭과 결별하고 국왕 중심의 영국 국교회를 세워 직접 결혼을 무효화했습니다.두 번째 부인은 잉글랜드 귀족 출신의 앤 불린이었습니다. 그녀는 딸 엘리자베스를 낳았지만 아들을 낳지 못했고, 결국 간통과 반역 혐의로 기소되어 참수당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혐의는 정치적 음모였다는 해석이 지배적입니다.세 번째 부인은 제인 시모어로, 헨리가 가장 사랑했던 부인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녀는 헨리에게 유일한 아들인 에드워드 6세를 낳았으나, 산후 합병증으로 출산 직후 사망했습니다.네 번째 부인은 독일 클리브스 공국의 귀족 여성인 앤 오브 클리브스입니다. 외교적인 이유로 결혼했으나 헨리는 그녀의 외모에 만족하지 못했고, 결혼은 곧 무효 처리되었습니다. 헨리는 앤에게 관대한 대우를 해주었고, 그녀는 평온한 삶을 살다 생을 마감했습니다.다섯 번째 부인은 캐서린 하워드로, 젊고 매력적인 인물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녀는 결혼 후 과거의 연애와 부정행위가 드러나면서 반역죄로 몰려 결국 참수형에 처해졌습니다.여섯 번째이자 마지막 부인은 캐서린 파였습니다. 그녀는 지적이고 신중한 인물이었으며, 헨리가 병약해진 말년에 헌신적으로 간호하며 왕의 마지막 부인으로서 역할을 다했습니다. 헨리 사후에도 생존하여 재혼하기도 했습니다.
Q. 역사적으로 봤을 때 어느 나라가 가장 고문 기술이 발달했다고 기록에 나와 있나요
안녕하세요. 이동광 전문가입니다.역사적으로 고문 기술이 가장 발달한 나라를 단정짓기는 어렵지만, 특정한 시기와 목적에 따라 고문을 체계적으로 발전시킨 나라들이 있습니다.먼저 고대 로마 제국은 고문을 법률의 일부로 제도화하여 사용한 나라입니다. 특히 노예나 반역자를 심문할 때 고문이 정당화되었으며, 십자가형, 채찍질, 바퀴 고문 등 다양한 형벌이 존재했습니다. 이는 당시의 법 체계가 고문을 진술 확보의 수단으로 인정했기 때문입니다.중세 시기로 넘어오면 유럽, 특히 스페인과 프랑스, 신성로마제국에서는 종교재판을 통해 고문 기술이 극도로 발전했습니다. 이단을 심문하는 과정에서 철의 처녀, 수레바퀴 고문, 화형 등 다양한 고문 도구가 만들어졌으며, 종교적 순수성을 지킨다는 명분으로 고통을 정당화했습니다. 특히 스페인 종교재판소는 고문을 정교하게 체계화한 것으로 유명합니다.근대에 들어와서는 나치 독일이 정치적 탄압과 인체 실험을 목적으로 고문을 과학적 수준으로 체계화했습니다. 유대인과 정치범에 대한 전기 고문, 저온실험, 생체 해부 등은 인간 생명에 대한 기본적인 존엄을 철저히 무시한 사례입니다.또한 일제강점기 일본 제국 역시 독립운동가를 탄압하는 과정에서 고문 기술을 악용했습니다.
Q. 기원전 264년에서 146년에 일어난 카르타고 전쟁의 배경이 어떻게 됩니까?
안녕하세요. 이동광 전문가입니다.카르타고와의 전쟁 당시 로마에서 위험을 담보하는 유사 해상보험 사업이 행해질 수 있었던 이유는 다음과 같습니다.먼저, 로마는 상업과 금융이 발달한 사회였습니다. 상인과 금융업자들은 해상 운송과 관련된 투자에 익숙했으며, 선박이 무사히 목적지에 도착하지 못할 경우 손실을 감수하는 대신 높은 이자를 받는 방식의 해상 대부가 이루어졌습니다. 이는 오늘날 해상보험과 유사한 방식으로, 상업 활동에서 발생할 수 있는 위험을 분산하고 대비하기 위한 투자 형태였습니다.또한 포에니 전쟁과 같은 대규모 전쟁 상황에서는 군수품과 식료품 수송이 반드시 필요했으나, 해상 운송은 해적이나 적국의 공격 등으로 인해 큰 위험을 동반했습니다. 이에 따라 상인들이 손실을 두려워하고 무역을 꺼릴 수 있었고, 이러한 불안을 해소하기 위해 고위 금융인들이 위험을 담보하고 대신 높은 이익을 얻는 구조가 등장하게 되었습니다.이와 함께 로마 정부는 전쟁 물자를 조달하기 위해 민간 계약업자들과 계약을 맺는 시스템을 운영했으며, 이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위험 분담을 위한 다양한 계약 형태가 생겨났습니다. 로마는 계약과 재산권을 보호하는 법률 체계가 잘 갖추어져 있었기 때문에, 이러한 위험 담보 계약이 법적으로 인정되었고 사회적으로도 신뢰받을 수 있었습니다.결국 이러한 상업적 경험, 법적 기반, 전쟁에 따른 수요, 그리고 계약 기반의 행정 운영이 결합되면서, 로마에서는 위험을 담보하는 유사한 해상보험 형태의 사업이 자연스럽게 발전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