Q. 김유신은 어떻게 가야출신인데 신라의 권력을 잡았을깍요?
안녕하세요. 이동광 전문가입니다.김유신이 가야 출신임에도 불구하고 신라에서 권력을 잡을 수 있었던 이유는 다음과 같습니다.김유신은 가야의 귀족 출신으로, 정확히는 금관가야 왕족의 후손입니다. 가야는 6세기 중반에 신라에 병합되었고, 김유신의 집안은 신라의 귀족 계층인 진골 귀족으로 편입되었습니다. 김유신의 아버지 김서현은 신라에서 장군으로 활약했고, 김유신 역시 어린 시절부터 신라 사회에 철저히 적응하성장할 수 있었습니다.또한 당시 신라는 삼국 통일을 추진하던 시기였는데, 김유신은 뛰어난 무장으로 성장하며 백제와 고구려와의 전쟁에서 큰 공을 세웠고, 특히 삼국 통일 과정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습니다. 그는 신라의 왕실과 혼인 동맹을 통해 권력을 더욱 공고히 했는데, 그의 여동생 문희는 훗날 신라 태종 무열왕 김춘추의 부인이 되었고, 이 둘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이 바로 문무왕입니다. 김유신은 무열왕과 문무왕을 적극적으로 도와 신라의 중앙 권력에서 핵심 인물로 자리 잡게 되었습니다.결국, 김유신은 출신 배경이 가야였음에도 불구하고, 신라의 정치 구조에 잘 적응하고 군사적·정치적으로 큰 업적을 세워 귀족 사회에서 인정받으며 권력을 잡을 수 있었던 것입니다.
Q. 유비곁에 인재들이 많았던 이유는??
안녕하세요. 이동광 전문가입니다.유비 곁에 인재들이 많았던 이유는 그의 인덕과 포용력, 그리고 사람을 알아보는 안목 덕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유비는 비록 신분이 낮고 힘없는 시절에도 항상 백성과 부하들을 진심으로 대했으며, 그들의 고충을 함께 나누려 했습니다. 이러한 태도는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였고, 뛰어난 인재들이 자발적으로 그를 따르게 만든 중요한 이유였습니다. 예를 들어, 관우와 장비는 그와 의형제를 맺고 목숨을 걸고 함께 싸웠으며, 제갈량은 유비의 끈질긴 삼고초려에 감동하여 그의 책사가 되었습니다. 이는 유비가 단순히 권력을 탐하는 군주가 아니라, 인재를 진심으로 존중하고 그들과 함께 이상을 이루려는 인물이라는 점을 보여줍니다.또한 유비는 인재들의 의견을 경청하고, 그들에게 책임과 기회를 부여함으로써 그들의 능력을 마음껏 펼칠 수 있도록 했습니다. 이러한 환경은 유능한 인재들이 모이고 머무를 수 있는 기반이 되었습니다.
Q. 척 부인과 유여의 대해서 알고 싶습니다.
안녕하세요. 이동광 전문가입니다.척부인과 유여는 백제 멸망 전후의 격동기 속에서 각기 다른 삶을 살았지만, 모두 백제의 부흥 운동과 관련된 인물로 중요한 의미를 지닙니다. 우선 척부인은 백제의 귀족 여성으로, 흑치상지의 부인이었습니다. 그녀의 일생은 충절과 지조를 상징하는 이야기로 전해집니다.백제가 나당연합군에 의해 멸망한 후, 흑치상지는 백제 부흥 운동에 가담하여 항전하다가 결국 당나라에 항복하고 그곳으로 건너가게 됩니다. 이때 척부인은 남편을 따라 당나라로 가지 않고, 자결하거나 절개를 지켰다는 전승이 전해집니다. 그녀는 남편이 적국에 투항한 것을 부끄럽게 여겨 끝내 따라가지 않았으며, 백제인의 충절과 국망의 비애를 상징하는 인물로 남게 됩니다.유여는 백제의 장군 혹은 왕족 계통으로 전해지는 인물로, 백제 멸망 이후에도 부흥 운동에 가담했던 인물 중 하나입니다.부흥 운동이 점차 실패로 돌아가자 그는 다른 귀족들과 마찬가지로 선택의 기로에 놓이게 됩니다. 유여는 끝까지 항전을 지속하려 했으나 결국 힘이 부족했고, 흑치상지와 마찬가지로 당나라에 투항하거나 끌려간 것으로 보입니다. 이후의 행적은 자세히 알려지지 않았지만, 유여 역시 당나라의 세력 아래에서 일정한 역할을 했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Q. 백제 말기 흑치상지 장군은 어떻게 해서당나라로 가게 된 것일까요?
안녕하세요. 이동광 전문가입니다.660년, 나당연합군(신라와 당나라)이 백제를 침공하여 사비성이 함락되고 백제는 멸망하게 됩니다. 이후 백제 부흥 운동이 일어났고, 흑치상지는 이를 지원하며 왕자 부여풍과 함께 항전했습니다. 그는 웅진도독부에 맞서 군사를 일으켜 상당한 활약을 펼쳤지만, 부흥군 내부의 갈등과 세력 약화로 결국 실패하게 됩니다.부흥 운동이 점차 무너져가자 흑치상지는 더 이상 백제에서 저항을 이어가기 어렵다고 판단하고, 자신의 생존과 세력 보존을 위해 당나라로 망명합니다. 그는 당나라에 투항한 뒤, 무장으로서의 능력을 인정받아 당군의 장수로 활동하게 되었고, 이후 신라와의 전쟁에도 참전하는 등 당나라 측에서 계속 활약하게 됩니다.
Q. 월남전쟁 당시 월남군과 베트콩은 어떤 차이인가요?
안녕하세요. 이동광 전문가입니다.월남군은 남베트남 정부의 정규군으로, 미국과 자유주의 국가들의 지원을 받아 공산주의 세력에 맞서 싸운 군대였습니다. 이들은 정규군 체계를 갖추고 있었으며, 미군의 무기와 훈련을 바탕으로 전통적인 전면전과 기계화 전투를 수행했습니다. 그러나 내부적으로는 지휘 체계의 부패, 사기 저하 등의 문제가 있었고, 민심을 얻는 데 어려움을 겪었습니다.반면, 베트콩은 북베트남의 지원을 받는 남베트남 내의 공산주의 무장 게릴라 세력이었습니다. 이들은 남베트남 정부를 무너뜨리고 베트남을 공산주의로 통일하려는 목표를 가지고 활동했으며, 정규군보다는 은밀하고 유연한 게릴라전을 주로 펼쳤습니다. 또한 밀림과 농촌을 기반으로 활동하며 기습과 매복에 능했고, 선전과 토지개혁 등의 약속으로 농민의 지지를 얻으려 했습니다. 동시에 반대세력에 대한 강제 동원과 보복도 서슴지 않았습니다.이처럼 월남군은 남베트남의 체제를 수호하려는 정규군이었고, 베트콩은 내부에서 이를 전복하려는 혁명적 무장세력으로, 두 집단은 이념, 전략, 민중과의 관계 면에서 큰 차이를 보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