Q. 조선시대 얼자는 어떤 대우를 받았는지요?
안녕하세요. 이진광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얼은 일반적인 양반 자제와 달리 많은 차별 대우를 받았다. 태종(太宗, 재위 1400~1418) 대 ‘서얼금고법(庶孼禁錮法)’이 제정되면서 원칙적으로 관직 진출이 불가능해졌다. 이후 『경국대전(經國大典)』에 서얼은 과거(科擧)의 문과(文科)뿐만 아니라 생원시(生員試), 진사시(進士試)에도 응시하지 못한다고 규정되었다. 혹시 관직에 진출하였다 하더라도 승진에 제한을 받거나 혹은 청요직(淸要職)으로 진출하는 것이 불가능하였다. 그나마 일반 관료가 아닌 기술직 관료로는 진출이 가능하였는데, 이 경우에도 아버지의 관품과 어머니의 신분에 따라 승진에 제한이 따랐다. 특히 얼자는 아버지의 관품이 동일하더라도 서자에 비하여 승진이 더욱 제한되었다.
Q. 이순신 장군님은 정말 한 번도 지지 않으셨나요?
안녕하세요. 이진광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당시 녹둔도 둔전관 겸 조산보 만호였던 이순신은 열악한 상황에서 상당한 선전을 보여줬기에 상부에 꽤 깊은 인상을 남겼다.이 전투에서 조선인 11명이 전사하고 군민 160여 명이 납치되며 15필의 말도 약탈당했다. 하지만 1,000명 이상의 기마병에게 기습당한 상황에서 불과 수십 명으로 방어에 성공하고 반격까지 감행, 절반 이상의 포로를 구출해 피해를 최소화해서 할 수 있는 대처는 다 했다고 인정받았다. 이 전투에서 이순신과 이경록은 용맹을 제대로 보여줬으며 이순신이 단지 훌륭한 전투지휘관으로 끝나는 인물이 아니라 무예도 뛰어났음을 증명했다. 저 정도 병력 차이라면 장수의 무예가 뒷받침되지 않고서는 절대 이길 수 없는 전투이다.북병사 이일은 일단 패전의 책임을 물어 경흥부사 이경록과 조산만호 이순신, 선전관 이운룡 등을 잡아 가두었으나 조정은 경흥부의 녹둔도가 야인 지역과 너무 가까워 처음부터 소수의 병력으로 방어하기 힘들었음을 파악하고 있었고 이순신과 이경록의 보고를 종합한 이일의 장계를 통해 이순신이 열세한 상황에서 충분히 분전했음을 인정하고[1] 국왕인 선조가 이순신은 패배한 것과는 다르다며 구분 짓고 장형을 친 후 백의종군으로 마무리지었다. 이 전투는 선조와 조정에 이순신의 이름이 알려지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