Q. 박열과 그의 부인 가네코후미코에 대해서 궁금합니다
안녕하세요. 최은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후미코는 1921년 11월 작은외할아버지 집에서 독립해 유라쿠초에 있는 사회주의자들이 모이던 이와사키 오뎅집의 종업원으로 들어가 낮에는 손님을 접대하고 밤에는 야간학교를 다녔습니다. 1922년 2월 후미코는 정우영의 하숙에서 그가 발간준비를 하던 잡지 청년조선의 교정쇄에서 박열의 시 개새끼를 읽고 큰 감동을 받게 됩니다.그 후 정우영의 하숙집에서 우연히 박열과 마주치고, 그가 바로 박열이라는 걸 알게 된 뒤 정우영에게 소개를 부탁합니다.한 달여가 지난 3월 박열은 오뎅집으로 후미코를 찾아왔고 박열과 교제하기 시작한 후미코는 그의 사상에 공명하여 아나키스트가 되며, 5월부터 동거를 시작, 동거남 박열을 따라 박열이 조직한 사회주의자 모임인 흑도회에 가입, 7월 10일 박열과 함께 흑도회 기관지 흑도를 창간, 한달 뒤 2호를 냅니다.그러나 흑도회는 9월 사회주의자로 이루어진 북성회와 아나키스트들로 이루어진 흑우회로 분열, 후미코는 박열, 홍진유, 박흥곤, 신염파 , 서상일, 장상중이 함께 조직한 흑우회에 김중한, 니야마 하쓰요, 구리하라 가즈오와 함께 가입, 11월 후미코는 박열과 함께 대담한 조선인이라는 운동지를 발간합니다.박문자라는 필명으로 활동, 독립운동을 옹호하고 일제의 탄압 정책을 비판, 이면으로 일왕 부자를 폭살하고 박열의사를 도와 의열단과 연계한 폭탄 반입을 추진했습니다.
Q. 동학농민운동은 실패한 혁명이었는데도 우리 역사에서 중요하게 여기는 이유가 궁금합니다.
안녕하세요. 최은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동학농민운동은 양반사회와 관료의 부패, 외국의 침략에 대항해 일어난 국사상 최초의 민족운동이며, 동학운동은 이후의 역사에 큰 영향을 끼쳐 대내적으로 위정자의 반성과 각성을 촉구해 갑오경장의 정치적 혁신을 가져왔고 대외적으로 청, 일 양군의 출병을 유발시켜 청일전쟁의 직접적인 계기를 마련, 조선왕조의 붕괴를 초래하는 계기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Q. 아라비아숫자는 누가, 언제 개발하였는가요?
안녕하세요. 최은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십진법의 위치 기수법을 사용한 인도-아라비아 수체계는 기원후 538년 무렵 인도에서 시작되었습니다. 위치 기수법의 사용을 위해 0이 도입, 0의 도입은 수학의 역사에서 중요한 이정표이며 숫자의 글자체는 계속 변화를 겪었고 연재 인도에서 사용되는 글자체로 정착된 것은 9세기 무렵이며 9세기 페르시아의 수학자 콰리즈미는 인도 숫자 체계를 받아들여 사칙연산의 계산에 도입, 10세기 중동의 이슬람세계에서 아라비아 숫자를 사용해 십진기수법을 확립, 분수의 표기 방식을 정했습니다.이 시기 이슬람 수학의 기수법은 아부 하산 알우크리디시의 저작에 기록되어 유럽으로 전파, 당시 이슬람 세계의 서쪽인 북아프리카와 이베리아반도를 아우르는 지역인 마그레브에서 아라비아 숫자가 사용되며 모양에 변화가 생겼고 마그레브에서는 이 숫자들을 모래판에 쓰는 숫자라는 의미로 구바라고 불렀고 이 구바 숫자가 오늘날 유럽에서 사용되는 아라비아 숫자의 원형입니다.우리나라는 대한제국 시기 근대 교육과 함께 아라비아 숫자가 도입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