Q. 아를의 침실은 어떤부분을 중점으로 감상을 해야 하나요?
안녕하세요. 최은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그림 속 사물의 위치와 보색 대비를 관찰하여야 합니다.방에 들어서자 보이는 시야는 오른쪽에 침대, 오른쪽 벽을 따라 의자, 그 위에 물이 놓인 테이블, 거리가 내다보이는 창문, 왼쪽 벽에 다른 의자와 두번째 침실로 가는 문, 아를의 침실은 파란색 대한 오렌지와 빨간색과 녹색에 대한 반 고흐의 색 이론에 대한 지식을 보여줍니다.
Q. 일본의 간토대지진 학살에 대해 궁금한 게 있어요~
안녕하세요. 최은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1923년 도쿄 일원의 간토 지방은 지진으로 궤멸해 피해를 입었고 민심과 사회질서가 혼란스러운 상황이었습니다.일반인들 사이에 서로를 믿지 못하는 불신이 싹트는 가운데 내무성은 계엄령을 선포, 각 지역의 경찰서에 지역의 치안유지에 최선을 다 할 것을 지시합니다.이때 내무성이 각 경찰서에 하달한 내용 중 재난을 틈타 이득을 취하려는 무리들이 있다. 조선인들이 방화와 폭탄에 의한 테러, 강도 등을 획책하고 있으니 주의하라는 내용이있었습니다.이 내용은 일부 신문에 사실확인도 없이 보도, 보도 내용에 의해 더욱 더 내용이 과격해진 유언비어들이 아사히 신문, 요미우리 신문 등 여러 신문에 다시 실림으로 조선인들이 폭도로 돌변해 우물에 독을 풀고 방화,약탈을 하며 일본인을 습격하고 있다는 거짓 소문이 돌기 시작합니다.당시 지진으로 인해 물 공급이 끊긴 상태였고, 목조 건물이 대부분인 일본인은 화재를 두려워하였으므로 이러한 소문은 진위 여부를 떠나 일본 민간인에게 조선인이나 중국인에 대한 강렬한 적개심을 유발했습니다.이에 곳곳에서 일본인들이 자경단을 조직, 불심검문을 하며 조선인이나 중국인으로 확인되면 가차없이 살해하는 만행을 저지르기 시작합니다.조선식이나 중국식 복장을 한 이는 바로 살해, 학살 사실을 알고 신분을 숨기기 위해 일본식 복장을 한 조선인, 중국인 , 타지역 출신을 식별해내기 위해 외국인에게 어려운 일본어 발음을 시켜 발음이 이상하면 바로 살해했습니다.치안 당국은 루머상의 조선인 폭동이 없는 것을 이미 알고 있었지만, 혼란 수습과 질서 회복의 명분하에 자경단의 만행을 수수방관했고, 일부는 가담, 조장하기까지 했으나 점차 자경단의 만행이 도를 넘어 공권력을 위협할 정도가 되자 그제야 개입, 이미 수많은 조선인들이 학살 당한 후였습니다.일본 정부는 최종적으로 유언비어를 공식 확인하나 피해자의 수를 줄여 발표, 자경단 일부를 연행, 조사하나 형식상의 조치였고 기소된 사람들도 증거불충분을 이유로 무죄 방면됩니다. 학살 사건으로 인한 사법적 책임 또는 도의적인 책임을 진 사람이나 기구는 없었습니다.
Q. 병자호란의 발발 원인은 무엇인지?
안녕하세요. 최은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1627년 후금의 조선에 대한 1차 침입 때 조선은 무방비 상태로 후금에 당함으로 후금에 대해 형제의 맹약을 하고 두 나라 관계는 일단락 되게 됩니다.조선은 정묘호란 이후 후금의 요구를 들어 1628년 이후 중강과 회령에서의 무역을 통해 조선의 예폐외에 약간의 필수품을 공급하나 그들은 당초의 맹약을 위반하고 식량을 강청하고 병선을 요구하는 등 압박을 가해오며 후금군이 압록강을 건너 변경 민가에 침입해 약탈을 자행, 변방의 백성과 변방 수장들의 괴로움이 계속됩니다.이러한 후금의 파약행위로으로 조선의 여론은 군사를 일으켜 후금을 치자는 척화배금을 주장하는 사람들이 늘어나는데 당시 후금은 만주의 대부분을 석권하고 만리장성을 넘어 북경 부근까지 공격해 정묘호란 때 맺은 형제의 맹약을 군신의 의로 개약하고자 요청, 황금과 백금 1만냥, 전마 3000필 등 종전보다 무리한 세폐와 정병 3만까지 요구합니다.조선은 그들의 요구에 응하려 하지 않고 화의 조약을 무시하고 후금에 대해 선전 포고를 하려는 움직임이 일어나며 1636년 2월 용골대, 마부태 등이 후금 태종의 존호를 조선에 알림과 동시에 인조비 한씨의 문상 차 조선에 사신으로 왔는데 그들이 군신의 의를 강요해 조선의 분노가 폭발하게 됩니다.조정 신하들 가운데 척화를 극간하는 이가 많아 인조도 이에 동조해 사신의 접견을 거절하고 국서를 받지 않았고 후금 사신을 감시하게 됩니다.조선의 동정이 심상하지 않음을 알아차린 그들은 일이 낭패했음을 간파하고 민가의 마필을 빼앗아 도주하는데 도망치던 중 조선 조정에서 평안도관찰사에 내린 유문을 빼앗아 본국으로 가져가게 됩니다.이로 인해 후금에 대한 조선의 태도가 무엇인지 그들도 명확하게 알수있게 되었고 재차 침입을 결심, 같은 해 4월 후금은 나라 이름을 청으로 고치고 연호를 숭덕이라 하며 태종은 관온인성황제의 칭호를 받습니다.그는 이 자리에 참석한 조선 사신에게 왕자를 볼모로 보내 사죄하지 않으면 대군을 일으켜 조선을 공략하겠다고 협박, 이와 같은 청나라의 무리한 요구는 척화의지가 고조되는 조선 조정에서는 받아들이기 힘들었고 그 해 11월 심양에 간 조선 사신들에게 그들은 왕자와 대신 및 척화론을 주창하는 자를 압송하라는 최후 통첩을 보내나 조선에서는 그들의 요구를 묵살하고 이에 청나라는 조선에 재차 침입하는데 이를 병자호란이라 합니다.
Q. 조선 이조판서와 예조판서의 차이점은?
안녕하세요. 최은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예조판서는 조선시대 6판서 중 하나로 예조의 으뜸 벼슬로 정이품이며 현재의 외교부, 대한민국 교육부, 문화체육관광부, 보건복지부, 여성가족부의 장관이며 정원은 1원입니다.장관급 고위직으로 이조, 호조 다음 서열에 위치하며 외교교섭, 인재육성, 관리선발 등의 업무가 예조 소관이었습니다.승문원, 홍문관, 예문관, 춘추관, 성균관, 혜민서 등 권력기구들을 속아문으로 두고 있어 외교, 교육, 예절, 문화, 가족, 의료, 언론 등의 업무를 처리했습니다.이조판서는 대총재라고 하며 이조의 수장으로 정이품, 현재의 내무와 인사 담당, 지금의 행정안전부 장관 겸 국무총리 산하 인사혁신처장입니다.모든 문관들의 인사권을 가지고있었습니다.
Q. 우리나라는 생선을 삭혀서 젓갈을 만들어서 먹는 민족인데 우리말고 젓갈만드는 민족은 어디가 있나요?
안녕하세요. 최은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기록으로 보면 한국, 중국, 일본, 인도, 태국 등 아시아 지역들과 유럽 쪽에서도 기록이 있고 고대 로마의 경우 가룸이라는 생선 젓갈을 먹어습니다.필리핀에서는 멸치를 소금에 절여 발효시킨 음식이 있고, 베트남 요리의 느억맘은 생선을 발효시켜 간장과 유사한 형태의 어장을 가지고 있습니다.안초비도 정어리, 멸치 등 소금에 절인 것이며, 노르웨이 요리로 락피스크는 송어나 곤들매기 종류 생선 소금에 절여 발효시킨 음식이있습니다.
Q. 공민왕은 어떻게 즉위하게 되었나요?
안녕하세요. 최은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1351년 즉위하기까지 공민왕은 10년 이상 몽골에서 숙위, 이 와중 1344년 충혜왕이 사망하면서 그를 왕으로 추대하고자 하는 고려 신료들의 움직임이 있었으나 충혜왕과 덕녕공주의 소생인 충목왕이 왕위에 오르고, 1348년 충목왕이 사망 후 권준, 이곡, 이승로, 윤택 등 다수의 고려 신료들이 몽골에 글을 올려 왕기, 즉 공민왕을 왕으로 세울 것을 청합니다.몽골은 친원세력의 지지를 받은 충정왕을 즉위시키나 덕녕공주 세력 및 외척세력들이 발호하여 국정이 정상화되지 못했고 여기에 왜구마저 침입하게 되면서 몽골은 1451년 충정왕을 폐위시키고 공민왕을 즉위시켰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