Q. 흥선대원군이 명성황후 시해 사건에 연관이 있나요?
안녕하세요. 최은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일본 공사 미우라 고로가 을미사변을 주도했고 실행 역시 일본인들이 했지만 흥선대원군은 명분 면에서 도움을 주었습니다.을미사변 전 8월 16일 일본인 궁내부 고문관 오카모토 류노스케는 공덕리에 있는 흥선대원군의 별장을 방문, 그는 별장 사랑에서 흥선대원군에게 자신들이 명성황후 일파를 축출해 주는 대신 거사 후 대군주를 보필해 궁중을 감독하되, 정사는 내각에 맡겨 일제 간섭하지 말라는 것, 이준용을 3년 기한으로 일본 유학을 보내라는 등 4가지 조선의 사실상 대원군의 정계은퇴를 강요하는 각서를 제시, 자필확인을 받아내며 실행일자는 적당한 날을 택해 흥선대원군에게 통보하기로 합니다.일본은 출발에 앞서 명문 확보를 위해 흥선대원군으로 하여금 자신의 행동 취지를 밝히는 고유문을 발표하게 했고 그것을 한양시내에 붙입니다.을미사변동안 흥선대원군은 경복궁 내 강녕전에서 휴식을 취하며 사태의 진전을 봤습니다.
Q. 일본으로 납치되어간 도자기 기술자들의 생활여건은 괜찮았나요?
안녕하세요. 최은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솜씨 좋은 기술자는 사무라이 수준으로 후하게 대접했으며 뛰어난 도공에게 자기 딸을 내주며 사위로 삼아 친인척을 만들기도 했습니다.이들은 메이지 유신 이후 폐번령이 내려져 다이묘의 비호를 받지 못하게 된 이후에도 수 세기간 구축한 세력으로 독자적인 장인 가문을 만들어 지역에서 대접받으며 대를 이을수 있었습니다.다만 도공이라 해서 모두 좋은 취급을 받은 것은 아니었는데, 끌고 간 도공 중 재주가 없는 사람들은 일본인들이 밥을 주지 않아 굶겨죽였다는 이야기가 있고, 기술이 새어나갈까봐 조선인 도공들이 사는 마을은 엄격하게 감시, 혼인도 다른 마을과 못하게 막았다고 합니다.
Q. 헐버트가 조선의 독립운동에 도움을 주게된 계기는 무엇인가요?
안녕하세요. 최은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육영공원에 영어교사를 파견해달라는 조선의 요청에 응해 국내로 들어오는데 한국의 생도들이 학업에 열정을 보이지 않자 이에 실망, 미국으로 돌아가게 됩니다.이후 한국에서 일하다 일시 귀국한 헨리 아펜젤러 목사의 권유로 재입국, 외국 서적의 한글 번역 작업과 외국에 대한 한국 홍보활동을 벌여 많은 서적과 기사를 번역, 저술합니다.조선에 대한 일제의 압박이 심해지자 헐버트는 조선 내외의 정치, 외교에 관심을 보이며 그 과정에서 고종의 신임을 얻어 최측근의 자리에서 보좌, 자문의 역할을 하며 미국 등 서방 강대국들과의 외교 관련 업무에 힘썼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