Q. 731부대의 생체실험의 목적은 무엇이었나요?
안녕하세요. 최은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중국에 위치해 있던 만큼 당연히 피해자 절대다수가 중국인이었고 그 외 연합국인 미국인과 러시아인 , 식민지인 한국인 , 기타 전쟁 포로 등으로 구성되었습니다.현재까지도 피해자들의 규모는 제대로 확인되지 않으나 조금씩 피해자들에 대한 정보가 발굴되는데 1998년 지린성 문서고에서 1,467명의 특별이송문서가 발견, 이후 731부대의 세균전으로 인한 사망자 1500여명의 피해자가 밝혀지며 2010년 기준으로 3천 여명의 피해자가 공개되었습니다.731부대는 화학, 세균전 준비를 위한 연구와 살아있는 사람을 대상으로 한 생체실험을 위한 것이었습니다.
Q. 임진왜란때 원숭이 기병대는 실존했나요?
안녕하세요. 최은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1751년 조선이 실학자 이중환이 쓴 택리지에는 임진왜란 당시 평양, 행주산성 전투와 함께 육상에서 거둔 삼대첩으로 꼽히는 소사 전투에 대한 기록이 있는데 지 중 원숭이 기마부대에 대한 묘사가 있습니다. 명나라의 양호가 원숭이 기병 수백마리를 데리고 소사라 다리 아래 들판이 끝나는 곳에 매복하게 했다가 말에 채찍을 가하며 적진으로 돌격, 왜적들은 원숭이를 처음 보게 되자 사람인듯 하면서도 사람이 아닌지라 이를 괴이하게 여겨 혼란에 빠져 대패, 남쪽으로 달아났는데 쓰러진 시체가 들을 덮었다고 쓰여있습니다.다만 이 택리지는 임진왜란 종전 후 150여년 후 작성되었고 다른 조선의 문헌이나 명나라, 일본의 사료에선 원숭이 부대의 활동을 찾아볼수없어 원숭이 부대에 대한 이야기는 야사, 설화로 여겨졌습니다.그러나 2018년 임진왜란에 참전한 인사들이 원숭이 부대의 존재를 기록한 문헌들이 발견되어 안대희 성균관대 교수가 이 내용들을 연구해 논문을 발표했는데, 임진왜란 당시 신녕현감으로 전투에 참가한 손기양이 그의 일기에 유정의 군진으로부터 돌아왔는데 초원과 낙타가 있다고 했고, 원숭이는 능히 적진으로 돌진할수 있고 낙타는 물건을 운반할수 있다고 한다 쓰이였으며 조경남의 난중잡록에 말을 능수능란하게 다루는 명나라의 원숭이 부대의 존재가 묘사됩니다. 또 경북 안동의 풍산김씨 문중에 전해오는 세전서화첩에는 1599년 2월 명나라의 14만 대군이 본국으로 철군하는 장면을 그린 전조장사전별도가 있는데 이 그림에 원병삼백 이란 깃발 아래 유인원 열 두마리가 칼을 들고 행군하는 장면이 등장하는데 원숭이 병사 300마리란 뜻입니다.
Q. 목화씨로 유명한 문익점의 구체적인 업적이 궁금합니다
안녕하세요. 최은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문익점은 1364년 진주로 내려가 장인인 정천익과 씨앗을 나누어 목면나무의 재배를 시험, 정천익이 심은 씨앗 가운데 하나가 꽃이 피어 100여개의 씨앗을 얻고 , 해마다 재배량을 늘려 1367년 향리 사람들에게 씨앗을 나누어주며 심어 기르도록 권장, 정천익은 호승인 홍원에게서 실을 뽑고 베를 짜는 기술을 배워 10년이 되지 않아 나라 전체에 목면재배와 무명이 보급됩니다.이 사실이 조정에 알려지며 문익점은 고려 우왕때인 1375년 전의주부로 등용, 1389년 중서문하성의 간과인 정사품 좌사의대부가 되었습니다.목화 재배를 시작해 목화의 개량과 보급에 있어 일대 혁신을 가져와 민간 백성들의 삶의 질 향상에 기여했습니다.겨울에는 원시 시대부터 입어온 갖옷이나 삼국시대부터 생산된 계 등의 모직물로 옷을 갖춰 입었을 수도 있지만 무명은 베나 모시에 비해 더 부드럽고 따뜻해 추위를 막는데 효과적이었고 목화 솜으로 솜옷을 만들어 입을수 있었습니다.개량종의 도입이 당시 한반도인의 의생활에 혁신적인 변화를 가져왔습니다.
Q. 피자를 좋아하고 자주 먹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피자의 기원이 궁금합니다
안녕하세요. 최은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피자의 기원을 넓게 보면 방패에 빵과 치즈 , 대추야자를 올려 구워먹었다는 페르시아인들, 치즈와 허브를 빵에 얹어 먹었다는 그리스인의 사료를 들수 있습니다.토마토소스+치즈+빵 이라는 피자의 3대 요소를 갖춘 것을 보면 페루 총독 마누엘 데 아맛이 1770년 나폴리에 총독령의 선물로 토마토 씨앗을 전파한 후 이미 치즈와 빵 위에 올려먹도록 정립되어있던 마리나라 피자에 토마토 소스를 얹게 된후 며, 정확히 언제인지는 알수 없으나 토마토가 들어온 후부터 치즈와 토마토를 같이 빵 위에 굽는 방법이 만들어졌고 1843년쯤 이미 유럽에 널리 퍼져 프랑스 작가 알렉상드르 뒤마가 다채로운 피자의 토핑에 대해 기고하기도 했습니다.
Q. 독일의 함부르크에서 유래된 음식이 햄버거 맞나요?
안녕하세요. 최은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19세기 독일 이민자들이 미국으로 들어오면서 햄버그 스테이크 또한 함께 들어왔는데 당시 명칭은 하크스테이크나 함부르크식이라는 뜻에서 함부르거 라고 명명한 것이 시초입니다. 햄버그스테이크가 번이라고 부르는 빵 사이에 끼워진 것이 햄버거인데 이것의 시초는 아주 불분명합니다.햄버거의 원조 주장으로는 1904년 세인트루이스 만국박람회 때 박람회장 내의 한 식당에서 밀려드는 인파를 감당할수 없어 이 햄버그를 둥근 빵 2개 사이에 끼워 핫 샌드위치 형식으로 팔게 되면서 오늘날 널리 알려진 햄버거가 탄생했다는 주장, 1900년 덴마크 출신 이민자 루이스 라센이 코네티컷 주 뉴 헤이븐 시에서 자신의 레스토랑 루이스 런치에서 처음 개발해 판매했다는 주장, 찰리 내그린이 1885년 위스콘신 주 시모어시에서 열린 시모어 박함회에서 납짝한 미트볼을 빵 두 조각 사이에 끼워 판것이 시초라는 주장 등이 있으며, 분명한 것은 오늘날 햄버거는 미국 어딘가에서 시작되고 변형되어 유행되었다는 것입니다.
Q. 나폴레옹의 26인의 원수 중 한명인 오귀스트 마르몽의 생애가 궁금합니다.
안녕하세요. 최은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사티용수르세인에서 장교의 아들로 태어난 마르몽은 군인다운 모습을 사랑한 나머지 군인이 되고 싶다고 했고, 아버지는 마르몽을 디종으로 데려가고 마르몽은 거기서 수학을 배워 포병대에 입대했습니다. 그리고 그곳에서 나폴레옹 보나파르트와 면식을 가지게 되었고 툴롱 공방전에 나폴레옹을 따라 참전했습니다.나폴레옹과의 관계는 점점 친밀해졌고, 나중에는 나폴레옹의 보좌관이 되었습니다. 나폴레옹을 따라 이탈리아 원정과 이집트 원정에도 참여, 그 가운데 남들과는 달리 승리를 거둠으로 스스로를 드러내더니 여단장으로 승진, 1799년 이집트에서 발이 묶였을 때 나폴레옹의 수행원으로 프랑스로 돌아왔고, 나폴레옹이 브뤼마르의 18일 쿠데타를 일으키자 그에 동참, 그 후 포병대를 조직해 제 2차 이탈리아 원정에 참여, 마렝고 전투때 마르몽이 지휘한 포병대가 승리에 일조했습니다.1801년 포병대 감찰관이 되었고 1804년 상급장교로서 레지옹 도뇌르 훈장을 수여 받으나 나폴레옹이 원수 명단을 만들때 집어넣는 것을 빠뜨려 나폴레옹에게 서운함을 느끼게 됩니다.1805년 군단을 맡아 울름 전투에서 큰 역할을 담당, 1806년 나폴레옹을 따라 러시아 제국으로부터 라구사의 포위를 풀어냈고 1808년 라구사 공화국을 엎어버리고 스스로 라구사 공작이 되며 5년간을 달마티아의 행정관으로서 군사, 생정권을 생사, 마르몽의 집권기간 동안 벌였던 커다란 공공 사업들은 아직까지도 많은 사람들의 기억에 좋은 이미지로 남아있습니다.1809년 제 5차 대프랑스 동맹이 프랑스를 향해 공격해오자 나폴레옹은 마르몽을 소환, 원수봉을 주었고 오스트리아 전쟁의 한 부분을 담당시키기 위해 알리리아 영토 전역을 마르몽에게 맡기게 됩니다.1810년 급히 소환되어 마세나와 함께 이베리아 반도 전쟁에 따라가나 살라망카 전투에서 웰링턴군과의 교전 중 오른쪽 팔과 갈비뼈 두개가 나가는 부상을 당하고 베르트랑 클로셀에게 지휘권을 넘기게 됩니다.마르몽은 프랑스에서 부상치료를 하기위해 물러났고 1813년 4월 나폴레옹이 다시 군단 지휘를 맡기며 뤼첸과 바우첸, 드레스덴의 일련의 전투에 참가합니다.1814년 대규모 방위 전역에서 파리 방어전에 참가, 결국 이기기 어렵다 판단하고 나폴레옹을 배신, 이러한 배신으로 마르몽은 나폴레옹에게 죽을때까지 비난 당하게 됩니다. 나폴레옹이 엘바 섬으로 추방당하고 제 1차 왕정복고로 부르봉 왕조가 다시 들어서자 마르몽은 루이 18세를 섬겨 지위를 잘 보존하다 나폴레옹이 부활하자 마르몽은 루이 18세와 함께 벨기에로 도망갔다가 워털루 전투로 나폴레옹이 몰락하자 다시 돌아와 귀족사회의 일원이 됩니다.그 후 근위대 소대장이 되었고 1820년 생 에스프리의 기사 작위를 받았고 생루이의 상급 장교가 되었지만 이후 마르몽은 절대 신뢰를 얻지 못하게 됩니다.1830년 7월 아직 근위대 소장으로 복무할 때 마르몽은 왕명에 불복하는 어떤 저항세력도 짓밟으라는 명을 받으나 반대, 자신의 위치를 포기할수도 없어 우물쭈물하다 혁명 세력을 분쇄하려는 시도를 포기하게 되며 이로 인해 마르몽은 귀족들에게 비난을 받으며 앙굴렘 공작 루이 앙투안에 의해 체포되었을 당시 앙굴렘 공작은 자네가 그를 배신했던 것처럼 우리도 배신하려 드는가 ? 라고 말합니다.7월 혁명으로 샤를 10세가 쫓겨났을 때 마르몽은 샤를 10세를 배신하지 않고 같이 국외망명을 갔으며, 빈에 정착하게 되며 오스트리아로부터 좋은 대우를 받았으며 라이히슈타트 공 나폴레옹 2세의 가정교사도 했으며 말년에 회상록을 출판합니다.그러나 신용불량자의 신세는 면할수 없었고 1852년 3월 베네치아에서 사망, 나폴레옹의 원수들 중 가장 마지막으로 죽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