Q. '여순사건'이 발생한 근본적인 원인은 무엇인가요?
안녕하세요. 최은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사건의 시발점인 제 14연대의 반란으로, 제 14연대는 1946년 2월 15일 광주에서 편성된 제 4연대가 모체이며 여기에는 여순사건의 주동자였던 김지회, 홍순석 등이 포진, 김지회와 홍순석은 조선국방경비사관학교 3기생으로 이 기수는 80%가 넘는 인원이 사명 및 민간인 출신들로 구성되어있었으며 그 중 좌파적 성향을 띠는 인물도 상당수였습니다. 이는 당시의 간부 모집 주체였던 미군정이 인력 충원에 집중하고자 간부후보생들의 이념적 성향을 거의 신경쓰지 않았던 것에서 기인합니다.이후 제 4연대는 제1대대를 주축으로 하여 1948년 5월 4일 여수 신월리에서 제 14연대가 창설, 창설 요원 가운데 기지회, 홍순석과 같은 좌익 계열 장교 외에 지창수 등 사건을 직접 주도하게 되는 하사관들도 포함되어있었습니다. 창설 과정에 좌익 계열 모병관들은 반이승만 계열, 좌익 수배 사범 등을 적극적으로 모병, 그 결과 연대 내에 남로당의 세포 조직이 침투하게 됩니다.또, 제 14연대 구성원들이 평소 가지고있던 경찰에 대한 적대적 감정도 봉기의 원인으로, 창군 이전 국군은 경찰의 보조전력으로 인식되는 경우가 많아 경찰의 조롱거리가 되었고 이 같은 인식은 국군 창설 이후에도 쉽게 변하지 않았습니다. 1947년 제 14연대의 관할 지역인 전라남도 동부지역에서는 군, 경간의 물리적 충돌이 세 차례나 발생, 모두 경찰에 유리한 결과로 종결, 이는 제 14연대 병사들 사이에서 경찰에 대한 강한 적개심을 갖게 하는 계기가 됩니다.여수, 순천 지역의 정치적 동향으로 해방 직후 이 지역은 우익 계열의 우세 속에 좌, 우익간의 공존관계가 지속, 평온했던 이 지역의 분위기는 1948년 급변하는데 이는 단독선거 시행을 둘러싸고 우익과 좌익이 충돌했기 때문으로 선거가 다가오면서 빈발하기 시작한 양측간의 충돌은 유혈사태로 이어지기도 하였으며 투표소 습격, 경찰지서 습격 행위로 발전, 그러나 단독 정부 수립이 확정되고 남로당의 투쟁이 점차 급진, 폭력화되면서 이 지역의 단독 정부 반대 움직임은 대중적 운동보다 점차 소수 인원에 의한 급진적 투쟁의 형태로 변모되게 됩니다.
Q. 우리 광복이후 미국은 애치슨 선언을 하였는데요. 이 선언을 했던 의도가 궁금합니다.
안녕하세요. 최은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애치슨 라인의 목적은 국제분쟁 발생시 미국 육군이 즉시 지원할 수 있는 범위를 한정한 것으로 제 2차 세계대전 종전 후 미국 정부는 세게 대전을 2번이나 연속으로 치뤘으므로 당분간 큰 전쟁이 일어날 가능성은 낮다고 여겼고, 현실적으로도 이를 부담스럽게 생각, 그로 인해 전후 급속히 군비를 축소, 이로 인해 한국전쟁 발발 직전에 이르러 미군의 군기나 장비 상태가 엉망이 됩니다.이러한 상황에서 미국의 절대적인 방위선으로 책정한 것이 애치슨 라인, 애치슨 라인 밖의 지역은 안 지켜도 되는 지역이 아니라 직접적인 병력 주둔이 없어도 방어가 가능한 지역으로 간주된 것입니다.
Q. 마루타 실험한 일본의 731부대는 실존하는 부대였나요?
안녕하세요. 최은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2차 세계대전 당시 일본 제국이 인간을 대상으로 한 인체실험을 포함한 각종 생화학무기개발 등의 업무를 하던 일본제국육군 소속 부대로 부대 본부는 하얼빈시에 있었습니다.정식명칭은 관동군 방역급수부 본부 입니다.1936년 육군군의학교 방역부 휘하 이시이 시로 등 군의 5명이 속하는 방역연구실로서 시작, 1936년 당시 관동군 참모장이었던 이타가키 세이시로가 관동군 방역부의 신설 및 증강을 주장, 이것을 당시 천황인 히로히토가 이를 재가하며 방역연구실은 관동군방역부로 정식 발족, 1940년 하얼빈 남부 핑팡에 새로운 부대 시설을 지은 뒤 통칭 만주 제 659부대 관동군 방역 급수부로 개편, 이 부대는 일본제국이 패망하는 1945년까지 약 5년간 활동했습니다.
Q. 갈릴레오가 탄압을 받은 진짜 이유가 궁금해요~
안녕하세요. 최은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그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우주론을 반박, 종교계와 대립했습니다.당시 기독교가 과학 자체를 인정하지 않아 탄압했고, 그의 책 대화는 교황정 허가를 받아 출판, 그러나 책 속에 멍청하게 묘사된 인물이 교황을 비유한 것이라는 소문이 퍼지게 됩니다.당시 종교혁명 시기였으므로 교황은 정치적으로 어려웠고, 종교와 과학의 대립이라기 보다, 여러 정치 문제가 얽혀 종교 재판이 열렸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