Q. 이탈리아 예술가 피에로 만초니는 어떤 인물인가요??
안녕하세요. 최은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1934년 손니치에서 출생했고 문과 계통의 학교를 중퇴하고 짧은 시일에 밀라노의 브레라 미술 아카데미에서 공부했습니다.다다이즘, 특히 마르셀 뒤샹의 영향을 받았으며 평소 미술과 미술가의 사회적 기능에 관심을 가졌으며 인간, 물체, 의도적으로 만들어진 색다른 상태의 것을 추구했습니다. 1955년까지 전통적 양식의 풍경화를 그렸으나 차차 가위, 압핀 등 주변에 널린 사물을 그림에 이용하거나 타르에 묻혀 실험적인 작품을 만들었습니다.예를슬어 아크로메스는 하얀 캔버스에 아무런 작업을 하지 않은 채 그대로인 작품, 선 은 7200m에 달하는 줄무늬 천을 보여주며 예술가의 똥은 자신의 배설물을 90개의 깡통에 담아 출품하여 세상을 놀라게 했으며 세계의 기태 같이 그의 작품은 도발적인 것이 대부분입니다.이러한 작품 속에는 권위적이고 경직된 미술시장을 야유하고 순수한 실존만을 가치로 삼는 예술적 사상이 담겨있으며 특정 소재나 색에 예술적 상상력을 한정시키지 않는다는 것이 그가 추구하는 것입니다. 예술의 비물질화, 개념화를 추구한 돌발적 행동을 많이 했고 이탈리아 전위 미술가들에게 큰 영향을 주었습니다.
Q. 충무공 이순신과 동명이인인 무의공 이순신의 생애가 궁금합니다.
안녕하세요. 최은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본관은 전주, 자는 입부, 시호는 무의 이며 충무공 이순신과 구분하기 위해 무의공 이순신으로 불리며 충무공의 난중일기에 방답첨사라는 직위로 자주 언급되어 방답첨사 이순신이라 불리기도 합니다.조선 태종의 맏아들인 양녕대군 이제의 후손으로 의정부 좌찬성 등을 지낸 이진의 다섯째 아들로 태어났으며 이황의 문인인 김성일에게서 학문을 배웠으며 1577년 무과에 급제하여 선전관과 의주판관 등을 지냈으나 상관과 불화하여 파직되었다가 1591년 방답진 첨절제사로 부임하여 당시 전라좌도 수군절도사이던 충무공 이순신의 휘하에서 왜적의 침입에 대비했습니다.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이순신은 충무공 이순신이 이끄는 수군에서 중위장과 전부장으로 활약, 옥포해전과 합포해전, 고성해전, 사천해전 등에서 큰 공을 세웠고 충무공 이순신은 1593년 선조에게 방답첨사 이순신이 적과 싸울때 언제나 선두에 공을 세웠으나 적을 죽이고 적의 배를 침몰시키는데만 힘쓰고 머리를 베는 일은 힘쓰지 않아 홀로 공을 제대로 인정받지 못하고 있다는 보고를 올리기도했습니다. 그래서 이순신은 당상관인 정 3품 절충장군의 품계를 받았고 1594년 충청도 수군절도사로 임명되었으나 이순신은 사간원의 관리들에게 형률을 지나치게 엄하게 적용해 백성의 원성을 사고 성격이 교만하고 탐욕스럽다는 이유로 계속해서 탄핵을 받았습니다. 1595년 조도어사로 파견된 강첨에게 군량미 200여 섬을 감추어 두었다는 혐의로 심문을 받는 일도 겪었고 후 이순신은 평안도우후를 거쳐 암록강 인근의 고령진 첨사로 좌천, 1597년 정유재란이 일어나자 이순신은 경상우수사로 임명되어 다시 왜군과의 해전에 참전했고 삼도수군통제사이던 충무공 이순신의 휘하에서 다시 중위장 등으로 활약하며 여러 전투에서 공을 세웠습니다.1598년 이순신은 전라수사로 있으면서 그해 음력 8월 조정에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죽고 왜군이 철수를 준비하고 있다는 첩보를 비밀리에 전달하기도 했으며 음력 11월 노량해전에서 충무공 이순신이 전사 후 경상우수사로 있으면서 충무공을 대신해 조선 수군의 전열을 수습했습니다.당시 명나라 수군을 이끌었던 진린은 이순신을 충무공의 뒤를 이어 통제사로 삼는 것이 좋겠다는 게첨을 선조에게 보내오기도 했으나 조정 관리들의 반대로 그대로 경상우수사의 직위에 머물렀습니다.임진왜란이 끝나자 이순신은 1598년 한양의 포도대장으로 임명되지만 그해 음력 10월 직위를 남용해 잘못이 없는 사람을 장살했다는 이유로 탄핵받아 파직, 다시 충청수사로 임명됩니다.황해도 병마절도사, 수원부사, 경상우도 병마절도사 등을 거쳐 1602년 전라좌수사가 되었는데 이 과정에서도 그는 계속해서 사헌부의 탄핵을 받았습니다.임진왜란이 끝난 뒤에 이순신은 조정 관료들의 견제로 외직을 전전하다 1604년 중추원의 정 3품 무관인 첨지중추부사가 되었고 그해 선무공신 3등으로 책록되지만 1606년 다시 외직인 수원부사로 임명, 선조가 죽고 광해군이 왕위에 오른 1608년 임해군의 옥사에 연루되어 심문을 받았으며 1610년 전라도 병마절도사로 임명되나 이듬해 사망했습니다.그는 숙종 때인 1679년 무의의 시호를 받았습니다.
Q. 중종반정이 일어나던 당시의 시대적 상황이 궁금합니다.
안녕하세요. 최은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조선의 9대 임금인 성종 때 중앙의 관리로 등용되기 시작한 사림파는 오랫동안 권력을 누려온 훈구파와 대립했고 이에 훈구파는 연산군 때 무오사화와 갑자사화를 일으켜 사림파와 일부 훈구파 세력을 중앙 정치에서 몰아냅니다. 이 과정에서 일부 사람들이 권력을 독차지하게 되어 지배층 안에서 불만이 커져졌습니다.또 두번의 사화가 일어나는 동안 연산군의 정치는 포악해졌는데 그는 성종의 왕비였던 친어머니 윤씨가 쫓겨나 사약을 받고 죽은 일을 문제삼아 자신에게 비판적인 관리와 선비들을 모두 벌주거나 내쫓았고 나랏일은 뒷전으로 미루고 매일 잔치를 열고 바빴는데, 임금이 학자들과 공부하는 경연을 폐지하고 최고 유학 교육기관인 성균관을 먹고 즐기는 곳으로 만듭니다.연산군의 방탕한 생활은 점차 백성들로부터 미움을 사게 되며, 이 기회를 틈타 박원종과 유순정, 성희안 등은 연산군의 가까운 신하인 임사홍과 신수근 등을 죽이고 반정을 일으키고 그들은 궁궐로 쳐들어가 연산군을 임금의 자리에서 물러나게 하고 진성 대군을 다음 임금이 되도록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