Q. 진돗개의 유래에 대해서 알고 싶습니다.
안녕하세요. 한정현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진돗개의 유래에 관해서는 몇가지 가설이 있다.북방민족인 선비족이 전쟁할때 데리고 다닌 군견 암캐가 늑대와 교배하면서 태어났다는 구전설, 송나라와 외교와 무역이 활발하던 시기에 도입되었다는 중국 송나라 유입설, 몽골제국의 기병대 군인들이 정복전쟁을 다닐때 데리고 다닌 군견이 진돗개였는데 그 진돗개가 몽골제국이 고려 삼별초군 정복할때에 같이 들어오게되었다는 몽골제국(북방견) 군견 유입설, 호주 야생견등과의 외형적인 유사성에 따른 남방 유입설 등등으로 다양한데, 말만 무성하지 이렇다할 구체적이고 실제적인 연구는 아직 부족한 실정이다. 그나마 가장 유력한 설은 몽골제국의 군견으로서 고려에 들어온 개가 오늘날 진돗개가 되었다는 설이다.다만 일본의 교수가 각 견종의 혈청단백질을 분석한 연구에서는 한국의 개들은 동남아-류큐 같은 남방계보다 북사할린이나 시베리안 허스키, 몽골의 견종과 유사하다는 결과가 나왔는데 이는 한국개가 북방견의 직계후손이라기보단 동북아시아에서 유래된 조상견이 점차 남하하면서 동북아-한국-일본의 순서대로 견종에 영향을 주었다고 해석하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Q. 가야는 어떻게 신라에게 항복했나요?
안녕하세요. 한정현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6세기에 이르러 가야 연맹은 백제와 신라의 중간에서 두 나라의 압력을 계속 받아 위축되었다. 이는 한강 유역을 잃은 백제가 그 보상을 가야 지역에서 찾으려 하였고, 신라도 이에 자극을 받아 가야지역에 적극적으로 개입하였기 때문이다. 한편, 백제와 신라가 이미 중앙 집권 체제를 마련한 것에 비하여 가야 연맹은 각 소국이 독자적인 정치 기반을 유지했으므로 그 지배력을 집중시키지 못하였다. 따라서, 가야 연맹은 지역적으로 백제와 신라의 중간에 위치하여 두 나라의 세력다툼을 위한 전장이 되었으며, 이들 나라의 압력을 받으면서 불안한 정치 상황이 계속되었다.가야 연맹은 두 나라의 침략으로 영토가 점차 축소되다가 신라 법흥왕 때에는 금관가야(532)가, 진흥왕 때에는 대가야(562)가 멸망하였다. 국력이 서로 비슷한 수준이었던 가야 연맹은 결국 통일 왕국을 이루지 못한 채 멸망한 것이다.
Q. 불교의 연등회와 팔관회는 무엇인지요?
안녕하세요. 한정현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연등회는 궁궐의 강안전과 봉은사 두 곳에서 순차적으로 진행되었다. 이 중에서 연등회 자체와 관련하여 가장 중요한 것은 봉은사 태조 진전에 왕이 친히 제사를 올리는 것이었다. 봉은사에 왕이 직접 행차하여 태조의 영정에 향을 올리고 제사를 지내는 일은 고려 상원연등회의 특징이었다. 고려에서는 국가가 위기에 처할 때마다 태조의 위업이 재인식되었는데, 태조는 국민을 단합시킬 뿐만 아니라 왕의 권위에도 힘을 실어 주는 존재였다. 봉은사에 행차하여 태조 진전에 재를 올리는 의식은 고려에서 가장 중요하게 여겼던 태조에 대한 신앙을 연등회에 중요한 요소로 포함시킨 것으로, 이를 통해 연등회 행사 자체는 더욱 중요하게 인식되었다. 태조 진전에서의 행향이 끝나면 연회가 베풀어졌는데, 이 연회를 통해 왕과 신하 간의 상하 위계와 질서를 확인하고 군신 간의 관계를 돈독하게 다져 나갔다. 특히, 관등놀이를 하는 등석연(燈夕宴)은 연등회 행사의 하이라이트였다.연등회가 부처를 섬기는 순수한 불교적 성격이 강하였다면 하늘의 신령, 오악(五嶽), 명산(名山), 대천(大川), 용신(龍神)을 함께 섬기는 팔관회는 전통 신앙의 모습이 두드러졌다. 팔관회는 대내외적인 성격을 통해 볼 때 고려의 국가 의례 중에서도 비중이 큰 행사였다. 연등회는 국기(國忌) 등의 이유로 설행 일자를 변경하기도 하였으나 팔관회는 국상(國喪)이 있을 경우 연희적(演戲的) 요소를 축소할 뿐 언제나 11월 보름에 변함없이 개최되었다. 연등회가 불교 의례이면서 군신동락(君臣同樂)의 축제적인 성격이 강하였다면 팔관회는 무엇보다도 국왕의 권위와 고려의 위상을 만천하에 과시하는 국가 의례의 성격이 중요하였기 때문이었다.
Q. 이의방은 어떻게 정권을 잡았나요?
안녕하세요. 한정현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1170년 8월 무신정변이 일어났을 당시 이의방은 근위대의 대장에 해당하는 견룡행수(牽龍行首) 직위에 있었다. 견룡군은 왕의 가장 가까운 곳에서 그를 호위하는 친위 부대로서 로마 제국 근위대 프라이토리아니의 예를 봐도 알 수 있지만 이런 근위 부대의 경우, 왕실에서 정변을 일으키기 최적의 위치였다. 견룡행수(牽龍行首)는 그런 견룡군의 실병(實兵) 지휘 즉 실질적인 지휘를 맡아 직접 동원할 수 있는 병사들을 휘하에 거느리고 있었다. 견룡군은 직제상 2군(二軍)에 속했으나 왕의 직속 친위 부대로서, 견룡행수는 2군(二軍) 즉 응양군, 용호군의 상장군, 대장군이 아닌 임금에게 직접 지휘를 받았으며, 유사시에는 왕의 허락하에 타 부대에 대한 지휘권도 행사할 수 있을만큼 막강한 권한을 갖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