Q. 중국의 고구려역사를 왜곡하고 있는데, 이를 반박할 수 있는 근거가 뭐가 있을까요?
안녕하세요. 한정현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고구려의 경우는 한국사의 범위 안에 속한다는 점을 부인하기 어렵다. 왜냐하면 전통적으로 우리는 꾸준히 고구려를 한국사로 인식했지만, 중국은 고구려를 자국의 역사로 편찬한 적이 전혀 없었다. 심지어 옛 중국인들은 한반도와 만주에 사는 사람들을 동쪽에 사는 이민자들을 비하하는 멸칭, 즉 동이라고 불렀다. 또한 전통적인 중국의 한국인 비하 표현인 가오리방쯔를 생각해보자. 이미 한국을 고(구)려놈이라고 부르고 있는 데에서 한국이 고구려 후손임을 인지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렇듯 중국은 고구려를 전통적으로 중국사로 여기지 않았으나, 현대에 들어서서 자국사로 편찬하려는 이중적인 행동를 보여주고 있다.당시 고구려의 지리적 측면에서 봐도 고구려의 인구는 한반도 내 대동강 유역 평야 지대에 집중되어 있었다. 고구려가 만주 지역을 꽤 많이 차지한 것, 그리고 오늘날의 한반도 쪽 영토보다 중국 쪽 영토가 차지하는 비율이 더 높아진 것은 4세기 말까지 가서의 일이고, 그 전까지는 한반도 쪽에 대부분의 영토를 두고 있었다. 건국 초기부터 함경도 쪽의 옥저, 강원도 쪽의 동예를 자국의 영역에 편입해 나갔는데 이는 북쪽에서 강국인 부여가 버티고 있었기 때문이다. 또 북쪽 땅은 춥고 척박했으므로 비교적 기름진 서북한의 평안도, 황해도보다는 쓸모가 덜 했다. 때문에 후반기에 가서는 만주보다 한반도 북부를 중심으로 한 나라로 변모했고 주요 3경 중 2개가 평안도, 황해도에 있었다. 수도들 또한, 졸본과 국내성은 중국령이라고는 하나 압록강과 거의 붙어있는 수준으로 가깝고 평양은 현재 북한의 수도다.또한 삼국시대 고구려와 백제, 신라가 이질성이 있었다고 해도 연관이 없다고는 볼 수는 없고 연관은 있되 이질적인 집단이 정체성 융합을 통해 단일민족 집단이 되는건 흔한 일이다. 이러한 정체성 융합은 적어도 삼국시대 말기부터 시작해서 고려시대 중후반까지 진행되었다. 이 부분에 있어서 중국은 오히려 한국보다도 불리하다.
Q. 조선에서 백정은 왜 천한 취급을 받았던 건가요?
안녕하세요. 한정현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백정은 고려시대 화척(禾尺)이라고 불리는 무리였다. 수척(水尺)·양수척·무자리라고 불렸던 이들은 고려 후기에 이르러 화척으로 불렸다가 조선 초에는 백정(白丁)이라고 바뀌어 불렸다. 이들은 고려시대부터 악명 높은 범죄집단으로 떼지어 유랑하며 걸식, 강도, 방화, 살인 등 각종 범죄를 자행하였다. 고려 말의 홍건적 침입 때에는 길잡이 노릇을 하였으며, 왜구를 가장해 민가를 약탈하기도 하였다. 1356년(공민왕 5)에는 나라에서 화척을 비롯해 제주 사람과 재인을 모두 찾아내어 서북면 수졸(戍卒)로 충당하기도 하였다. 기골이 장대하고 싸움도 잘하니 달래고 집과 관직을 주며 정착하게 했지만 천성이 유랑자들이라 쉽지않았다는 문헌이 있다. 조선시대에 와서는 별도 거주지에서 외부로 나가기 위해서는 지방관의 특별한 허락까지 필요한, 말 그대로 요주의 대상으로 천민보다 더 천한 이미지로 굳어져 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