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문가 홈답변 활동잉크

안녕하세요. 이명훈 전문가입니다.

안녕하세요. 이명훈 전문가입니다.

이명훈 전문가
EBS
Q.  신돈의 만행을 보고도 공민왕이 가만히 보고만 있었던 이유가 무엇인가요?
안녕하세요. 이명훈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공민왕에게는 태후에 의해서 소개되었는데 야사에 따르면 공민왕이 그즈음 꾼 꿈에서 자객을 만났다고 한다 그리고 그꿈에서 자객을 없애준 승려가 신돈이었기 때문이었에 그를 신임하였다고 합니다.조금은 어처구니 없죠... 노국대장공주의 승하 뒤 공민왕이 정치에 뜻을 잃자, 그에게 전권을 위임받아 정치 전면에 나선다. 이때 그는 법명인 편조(遍照)를 버리고 환속하여, 신돈으로 개명했다.공민왕에게 전권을 받은 직후의 직책이 어마어마하다. "수정이순논도섭리보세공신(守正履順論道燮理保世功臣) 벽상삼한삼중대광(壁上三韓三重大匡) 영도첨의사사사(領都僉議使司事) 판중방감찰사사(判重房監察司事) 취성부원군(鷲城府院君) 제조승록사사(提調僧錄司事) 겸(兼) 판서운관사(判書雲觀事)[5]"로 역사에서도 손에 꼽을 만큼 길다.그야말로 공민왕에게 전권을 위임받아 모든 권력을 다 쥐고 있는 셈이었다. 기본으로 대공신에, 벽상삼한삼중대광(총리도 아니고 부통령급) + 영도첨의사사사(관직 중 최고의 관직으로 본래 공석으로 남겨놓는 명예직) + 판중방감찰사(국방부장관) + 취성부원군(최고 귀족의 명예) + 문화종교부장관 + 농수산부장관 + 기상청장이었던 것이다. 집권 초창기엔 노비를 풀어주고, 토지 제도를 개혁하는 등 신속하고 공정한 정치로 백성들에게 "성인"이라는 칭송을 들었다. 전민변정도감이 바로 그것. 땅을 원래 주인에게 돌려주고자 설치한 기관이다. 또한 이 과정에서 부패한 세력들도 몰아냈다.하지만 이후 기록을 보면 막장이었다. 사치와 향락, 부정축재가 많았고 무엇보다도 여자에 빠졌다(...) 그리고 야사에 의하면 공민왕과 동성애 관계였다고 한다.고려의 라스푸틴 점점 원래의 개혁의도보단 자신의 권력에 취한 정책을 내놓은 감도 없지 않아 있다.또한 공민왕도 서서히 커져가던 그를 견제하였고, 환속한 천출승려 출신에 무엇보다도 부패하고 탐욕하다는 이유로 신진사대부들도 그를 불신하여 결국 사면초가. 심지어 최영마저도 그를 싫어하여 쫓겨나게 되었으니, 사실상 자신과 이춘부 같은 소수의 파당 빼곤 모두가 적이었다고 보는 것이 좋다. 사실 그럴 만도 했던게, 신돈 본인은 왕의 신임을 받아 갑자기 출세한 것이지, 자신의 세력을 형성하지 않았기 때문에 자기 편이란 개념 자체가 없었다. 그리고 그 때문에 반대파를 무자비하게 숙청할 수밖에 없었다(안 그러면 자신이 밀려나니까).결국 신하들의 간언에 의해 역모죄로 귀양을 가게 되었고 1371년 수원에서 처형되었다. 국왕의 신임을 받아 개혁을 진행시키다가 국왕의 총애를 잃고 숙청되었다는 점에서 조광조나 홍국영과 약간은 비슷한 필. 다만 이 숙청은 공민왕의 뜻이었다는 느낌이 강하다. 죄목은 반역죄였지만 자기 세력이 없는 신돈이 세력을 모으기도 전에 반역을 저지를 리가 만무하고, 투서가 한 신하에 의해 공민왕에게 전해진 것이 몰락의 신호탄이었기 때문이다. 무엇보다도 심문 한 번 없이 처형됐다. 아무리 반역자라 해도 항변 한 번 들어보지 않고 처형하는 것은 무리수였지만, 공민왕은 전혀 번복하지 않았다.
Q.  조선시대 자식이 가장 많은 왕에 대하여
안녕하세요. 이명훈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가장 많은 자식을 둔 왕은 3대 임금 태종입니다. 그는 총 29명(12남 17녀)를 두었습니다.그 중 조선시대 최고의 성군 세종대왕도 29명 안에 포함되어 있습니다.
Q.  우리나라 불교는 언제부터 믿었나요?
안녕하세요. 이명훈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공식적인 기록에 따르면 불교가 처음 한국으로 전래된 것은 고구려 소수림왕(재위 371~384) 2년인 372년으로, 전진(前秦: 315~394)의 왕 부견(符堅: 재위 357~385)이 사신과 승려 순도(順道)를 보내어 불상과 불경을 전하였다. 그러나 이것은 국가적인 공식 기록일 뿐, 불교가 이 보다 먼저 전해졌으리라는 것을 중국 남북조 시대 양나라(梁: 502~557) 때 승려 혜교(慧皎: 497~554)가 저술한 《양고승전(梁高僧傳)》(519) 등의 문헌에 나타난 내용으로 미루어 알 수 있다.불교가 발생지인 인도에서 직접 들어오지 않고 중국[1]을 거쳐 들어왔으며 또한 기원전 6세기에 발생한 불교가 8~9세기라는 시간적인 간격을 두고 4세기에 한국으로 들어왔다는 것에서, 한국에 전래된 불교가 고타마 붓다 당시의 원시 불교와는 차이가 있었으리라는 것은 충분히 짐작되는 사항이다.당시 전래된 불교가 어떤 성격의 것이었는지는 자세히 알 수 없으나, 그전까지 한국의 민간에서 믿어 온 고유한 민간신앙인 무속신앙이나 도교와 별다른 마찰 없이 융합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단, 신라의 경우 이차돈의 순교에서 보듯이 초기 전래시 고구려와 백제 보다는 고유 신앙의 융합에 어려움이 컸던 것으로 여겨진다.고구려 (372~668)불교의 고구려 전래불교의 고구려(高句麗) 전래는 소수림왕(小獸林王: 재위 371~384) 2년인 372년에, 전진(前秦: 315~394)의 왕 부견(符堅: 재위 357~385)이 사신(使臣)과 함께 순도(順道)를 보내 불상과 불경(佛經)을 전한 것이 그 시초이며 2년 후인 374년에 아도(阿道)가 들어와 성문사(省門寺) 혹은 초문사(肖門寺)와 이불란사(伊弗蘭寺)를 세운 것이 한국 사찰의 시작이다. 그러나 이것은 국교를 통한 공식 전입으로, 실상 민간에 먼저 불교가 들어왔을 것으로 보인다.고구려는 고국양왕 8년(391)에 "불법을 믿고 받들어 복을 구하라"는 교지를 내렸고, 다음 해인 광개토왕 2년(392)에는 평양에 9사(寺)를 세웠다. 이 밖에도 구법(求法)과 전교(傳敎)의 고승들이 나라 밖에까지 나가 많은 활동을 하였다고구려 불교의 특징고구려의 불교는 한마디로 학술 외교불교라고 할 수 있다. 즉, 고구려의 학승 등은 중국에 가서 경전을 배우고 연구함을 구법(求法)의 최상목표로 하였으며, 중국의 승려를 지도할 수 있는 고승도 있었다. 그 대표로 장수왕(재위 413~491) 때 태어난 승랑(僧朗: fl. 500년 전후)을 들 수 있다. 승랑은 중국에 들어가 삼론학(三論學)을 깊이 연구하여 학문적 체계를 완성함으로써 신삼론(新三論)이라는 새로운 사상을 개척했다.[2] 승랑의 사상은 승전(勝詮) · 법랑(法朗: 507~581[3]) · 길장(吉藏: 549~623)으로 이어졌으며, 길장에 의해 새 종파인 삼론종이 성립되었다. 승랑은 중국 사상계를 지도한 최초의 인물로서, 중국에서 일생을 마쳤다.고구려 학승들은 중국만이 아니라 일본에도 건너가 불교 학술과 예술면에 큰 공헌을 하였다. 최초의 전교자인 혜편(惠便)을 위시해서, 혜관(惠灌)은 수(隋)의 길장(吉藏: 549~623)에게 삼론의 깊은 뜻을 배우고 돌아와 일본으로 가서 승정(僧正)이 되었고, 삼론종을 널리 펴서 일본 삼론종의 시조가 되었다.[2] 고구려의 담징이 일본에 건너가 법륭사의 벽화를 그렸다는 사실도 익히 알려진 일이다. 또한 혜량(惠亮)은 551년 신라로 가 승통(僧統)이 되어 신라 불교를 일으키는 데 커다란 역할을 했다.고구려 불교의 일본 전래고구려 승려로 일본에서 포교활동을 한 최초의 인물은 혜편(惠便: fl. 584)이었다. 그는 일본 비다츠(敏達) 13년(584) 소가노 우마코(蘇我馬子)의 요청으로 사마달(司馬達)의 딸인 선신(善信)과 그밖에 선장(禪藏) · 혜선(慧善)의 세 여자를 비구니로 출가시켰으며, 일본 귀족들의 존숭을 받았다. 이것이 일본 불교사상 비구니 출가의 효시가 되었다.[5]영양왕 6년(595)에 일본에 건너간 혜자(惠慈)는 일본 역사상 위대한 업적을 남긴 성덕태자(聖德太子) 풍총(豊聰)의 스승이 되었으며, 《일본서기(日本書紀)》에서는 같은 해 백제에서 건너온 혜총(惠聰)과 더불어 혜자는 일본 불교의 동량(棟梁)이 되었다고 전하고 있다. 혜자는 삼론학(三論學)을 위시하여 《법화경》·《유마경(維摩經)》·《승만경》과 같은 난숙한 발달을 보인 대승경전을 가르쳤는데, 후일 성덕태자가 불교정신을 뒷받침으로 한 정치를 베풀 때 이러한 불교정신이 통치 이념으로 중요한 역할을 하였을 뿐 아니라 일본 문화 발전에도 큰 전환점을 가져다 주었다.같은 영양왕 때 일본으로 간 담징은 불교학은 물론 오경에도 능통하였고 채색(彩色), 지묵(紙墨), 공예(工藝)에 능하여 일본 미술사의 선구적 역할을 하였으며, 그가 그린 법륭사(法隆寺) 금당벽화(金堂壁畵)는 불후의 명작으로 전해 온다. 이 밖에 그는 맷돌 제조법도 가르쳐 일본의 문물 개화에 크게 기여하였다. 영류왕 8년(625)에 일본에 건너간 혜관(慧灌)은 일찍이 수(隋)의 길장(吉藏: 549-623) 밑에서 삼론학(三論學)을 배운 다음 일본에 건너갔다. 그는 일본 불교의 승정(僧正)이 되었고 삼론종(三論宗)을 가르쳐 일본 삼론종의 시조가 되었다.같은 왕대(王代)의 도등(道登)도 일찍이 당(唐)나라 길장 밑에서 삼론을 배운 다음 일본에 건너가서 삼론을 강술(講述)하였다고 전한다. 그리고 도현(道顯)도 일본에 가 대안사(大安寺)에 머무르면서 교수(敎授)하는 한편 《일본세기(日本世紀)》라는 책자를 몇 권 지었다고 전한다. 또한 기록에 나타난 승려들의 이름 이외에도 망각된 고승들이 많았으리라 짐작되며, 고구려 불교가 일본에 끼친 영향은 종교적인 차원을 넘어선 문화 전반에 걸친 광범한 것이라고 믿어진다.백제 (384~676)불교의 백제 전래 및 전개백제(百濟)에는 불교가 고구려보다 12년 늦게 들어왔다. 침류왕(枕流王) 1년(384)에 인도의 승려 마라난타(摩羅難陀)가 바다를 건너 동진(東晋: 317~420)으로부터 왔는데 왕이 직접 환영하여 맞이하였고 궁중에 머물게 하였으며 예로써 공경하였다. 다음 해 한산(漢山)에 절을 짓고 승려 10명을 양성했다. 왕이 외국의 승려를 직접 맞이하였고 궁중에 있게 한 것으로 보아 백제에도 그 이전부터 불교가 전해졌던 것으로 여겨진다.그 뒤 140년쯤 지나 26대 성왕(聖王: 재위 523~554) 때에 이르러 불교는 크게 번창했다. 왕은 겸익(謙益)을 인도에 보내어 계율을 연구하게 했는데, 526년 산스크리트어본의 율장(律藏)을 가지고 돌아오자 국내의 고승들을 불러 겸익을 도와 번역하게 하고 주석서를 짓게 했으며, 왕이 몸소 서문을 썼다고 한다. 성왕 23년(545)에 장륙(丈六) 불상을 조성, 모든 중생들이 다 같이 해탈하기를 기원했다. 동 30년(552)에는 불교를 일본에 전파했으며, 이것이 일본에 불교가 전해진 시초이다. 그때 백제는 여러 가지로 일본에 많은 영향을 끼쳤는데, 불교를 전함으로써 백제의 승려와 예술가와 기능공들이 건너가 일본의 문화를 크게 일으켰다. 백제는 일본 불교의 연원지(淵源地)가 되었다.[2]법왕 1년(599)에는 나라 안에 살생을 금하는 영을 내리고 널리 방생(放生)을 행하였으며, 고기 잡고 사냥하는 연장을 모두 불태워 버리게 하였다. 이듬해 수도 부여에 왕흥사(王興寺)를 세웠고, 무왕때에 미륵사를 창건하고 거대한 탑을 조성했는데, 백제에는 승려와 사탑(寺塔)이 많았었다는 사실이 중국의 문헌에도 전해지고 있다.백제 불교의 특징백제의 불교는 계율 중심의 불교, 예술 불교, 외교 불교라고 말할 수 있다.인도로 유학하였던 겸익(謙益: fl. 526)은 백제 성왕 4년(526년)에 인도 상가나대률사(常伽那大律寺)에 이르러 산스크리트어를 익혀 율부(律部)를 깊이 공부하고, 백제 성왕 9년(531 《아비담장(阿毘曇藏)》과 《오부율(五部律)》을 가지고 인도의 승려 배달다 삼장(倍達多三藏)과 함께 귀국했다.[7][8][9] 귀국 시에 겸익은 성왕의 환대를 받았으며, 그 후 흥륜사(興輪寺)에 있으면서 명승 28명을 소집하여 율부 72권을 번역하였다.[7] 당시에 중국에는 《오부율(五部律)》 중 음광부를 제외한 나머지 부파의 율부들은 이미 번역되어 있었다.[10] 그러나 끝내 음광부의 율부는 중국으로 전해지지 못하였는데 이런 점에서 백제에 《오부율》 전체가 전해지고 인도에서 직접 가져온 산스크리트어 율부의 번역이 이루어졌다는 것은 의미가 있다.[11] 겸익의 이러한 활동에 의해 계율 중심의 백제 불교의 특징이 이루어졌다.[7] 중국에서 율종이 성립된 때는 당나라의 도선(道宣: 596-667)이 법장부의 《사분율(四分律)》을 강설하고 저술한 624년인데,[10] 백제에서 겸익에 의해 율종이 성립된 때(526년경)는 이보다 1세기 앞선 것이다.백제는 성왕 30년(552)에 처음으로 일본에 불교를 전래시켰으며 많은 승려와 불서를 일본에 보냈다. 특히 위덕왕(威德王) 24년(577)에는 고승들과 불공(佛工)들을 보냈고, 30년에는 일본왕이 고승 파견을 요청하여 일라(日羅)를 파견하였다. 그 후 무왕 3년(602)에 관륵(灌勒)이 각종 역서(譯書)를 가지고 가서 일본 최초의 승정(僧正)이 되었다. 백제는 일본 불교의 연원지(淵源地)가 되었으며 아울러 탁월한 불교 예술을 진작시켰다.백제 불교의 일본 전수일본에 불교를 처음 전한 때는 성왕(聖王) 30년(552)이었며 많은 승려와 불서를 일본에 보냈다. 달솔(達率) 노리사치계(奴唎斯致契)를 파견하여 금동석가상(金銅釋迦像)과 미륵석불(彌勒石佛) 및 번개(幡蓋) · 경론(經論)을 보낸 것이 일본 불교의 발달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처음 일본 군신들은 이를 믿으려 하지 않았고 소아마자(蘇我馬子)만이 이를 예경(禮敬)하였는데, 석천가(石川家)에 불전(佛殿)을 만들고 이를 모셨으나 그 용도나 의미는 몰랐다. 그때 일본(日本)에 와서 있던 고구려 승려 혜편(惠便)을 발견하여 그의 가르침을 받아 세 사람의 여자 승려(尼僧)를 배출하였고, 소아마자(蘇我馬子)는 사마달과 함께 최초의 일본 불교신자가 되었다. 곧이어 2년 후 성왕은 담혜(曇惠) 등 9인의 승려를 일본에 파견하여 도심(道深) 등 7인과 교체하게 하였다. 따라서 도심을 위시한 7인의 백제 승려가 집단적으로 이미 일본에 들어가 포교활동을 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위덕왕(威德王) 24년(577)에 경론(經論)과 율사(律師) · 선사(禪師) · 비구니(比丘尼) · 주금사(呪禁師) · 불공(佛工) · 사장(寺匠) 등을 일본에 파견하였고, 일본에서는 그들을 맞아 난파(難波)의 대별왕사(大別王寺)에 머무르게 하였다. 위덕왕 30년(583)에는 일라(日羅)라는 승려가 일본에 건너가 관음신앙(觀音信仰)을 크게 일으키고 또 동(同) 35년에는 불사리(佛舍利)와 사공(寺工) · 화공(畵工) · 와장(瓦匠) 등을 보냈으며, 일본(日本)에서는 소아마자(蘇我馬子)가 백제(百濟) 승려(僧侶)를 청하여 수계(受戒)하는 법을 묻는 등 백제와 일본 간의 교류는 빈번하였다. 이때 일본 최초의 비구니(比丘尼)인 선신니(善信尼) 등이 백제로 건너와 3년 동안 계율을 배우고 돌아갔으며, 같은 해(588)에 혜총(惠聰) · 영근(令斤) · 혜식(惠寔) 등의 사문(沙門)과 함께 불사리(佛舍利)를 일본에 보냈다. 이 일행 가운데 혜총은 계율에 정통하여 그곳 대신인 소아마자에게 수계를 행하였다. 이밖에도 당시 도일(渡日)한 승려로는 영조(聆照) · 영위(令威) · 혜중(惠衆) · 혜숙(惠宿) · 도엄(道嚴) · 영개(令開) 등을 들 수 있다.[12]무왕(武王) 3년(602)에는 관륵(灌勒)이 천문(天文) · 지리 · 역서(曆書) · 둔갑(遁甲) · 방술(方術) 분야의 책을 일본에 전했지만 그는 본래 삼론(三論)의 학장(學匠)으로 그곳에서 일본 최초의 승정이 되어 승단의 기강을 정하는 등 불교계의 지주가 되었다. 그는 또 일본 의학의 시조로도 불린다. 그 후 혜미(惠彌) · 도흠(道欽) · 의각(義覺) · 도장(道藏) · 도녕(道寧) · 다상(多常) · 원각(願覺) · 원세(圓勢) · 방제(放濟) 등 많은 승려가 일본에 건너가 일본의 아스카 문화 시대(飛鳥文化時代: 538~710)를 꽃피운 인물들이 되었다.신라 (263/479~661)고구려와 백제에는 별다른 저항이 없이 불교가 받아들여졌지만, 반도의 동남쪽에 자리잡아 대륙과의 소통도 없고 문화적으로 뒤떨어진 신라에는 백제보다 수십 년 늦게 불교가 전해졌다.최초의 전래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설이 있다. 제13대 미추왕(味鄒王: 재위 262~284) 2년(263)에 고구려의 승려 아도(阿道)가 와서 불교를 전했다는 설, 19대 눌지왕(訥祗王: 재위 417~458) 때 고구려의 승려 묵호자(墨胡子)가 모례(毛禮)의 집에 머물러 불교를 선양했다는 설, 또 21대 소지왕(炤知王: 재위 479~500) 때 아도화상(阿道和尙)이 시자(侍者) 3인과 같이 모례(毛禮)의 집에 있다가 아도는 먼저 가고 시자들은 포교했다는 설, 고구려의 승려 아도(阿道)가 고구려로부터 들어와 일선군(一善郡: 지금의 선산(善山)) 에 있는 불교 신자 모례(毛禮)의 집을 중심으로 은밀히 교화를 폈다는 설 등이 있으나 어느 것이 맞는지 알 수 없다. 다만 민간의 승려가 들어와 공식외교를 통하지 않고 포교를 했다는 점이 고구려와 백제의 불교 전래와의 차이점인데 이런 점에서 쉽게 토착화(土着化)할 수 있는 기회를 가진 셈이다.[6] 그러나 그 전래는 완고하고 배타적인 집권계층의 반대에 부닥쳐 커다란 저항을 받았다.법흥왕(재위 514~540)은 불교를 백성들에게 복을 가져오게 하고 나라에 이익이 된다고 확신하여 즉위 초부터 국가적인 신앙으로 받아들이려 했으나 신하들의 반대로 고심했다. 그러다가 불교 신자요 젊은 신하인 이차돈(503~527)의 순교로 인해 법흥왕 14년(527)에 비로소 불교가 공인되었다. 법흥왕은 불교를 일으켰을 뿐 아니라 정치적으로도 관제를 정비하고 율령을 공포하고 연호를 세우고 문물을 개발하는 등 훗날 신라가 삼국을 통일할 수 있는 기초를 닦은 왕이었다. 그는 불교 신앙을 통해서 백성들이 선량한 국가적 관념을 가질 수 있고, 신라의 문화가 향상 · 발전될 수 있다고 내다보았던 것이다.법흥왕에 의해서 시작된 신라 불교가 특색을 지니게 된 것은 진흥왕(재위 540~576) 때부터로, 이는 왕 자신의 신앙심과 불교 정책에 의해서였다. 진흥왕 5년(544)에 선왕 때부터 짓기 시작한 흥륜사(興輪寺)가 낙성되고, 그해 3월에는 뜻이 있는 자는 승려가 되어 자유롭게 신앙생활을 할 수 있도록 일반에게 출가를 허락하였다. 만년에는 진흥왕 자신도 출가하여 법운(法雲)이라 이름짓고 수도하였으며, 왕비도 영흥사(永興寺)에 들어가 여승이 되었다. 진흥왕은 또 불교이념에 의거한 청소년 수양단체인 화랑도를 창설하여 국민 정신의 함양에 크게 이바지했다.신라는 제30대 문무왕(재위 661~681) 때에 이르러 당나라의 원조를 받아 마침내 삼국통일(676)의 대업을 성취했다. 겉으로는 당나라를 모방한 듯했지만, 안으로는 평화가 깃들여 태평성대를 구가했고 문화는 눈부시게 뻗어갔으며, 불교도 크게 융성했다. 신라의 승려들은 뒤를 이어 당나라에 들어가 그곳의 불교 교학을 배워 왔다. 그래서 한국의 불교사상 유례가 없는 황금시대를 가져오게 되었다.진흥왕과 불교 정책[편집]신라에 처음 불교가 공인된 것은 법흥왕(재위 514~540) 때부터였으나 불교를 진흥, 발전시켜 국가종교로까지 이끈 것은 진흥왕(재위 540~576)에 의해서였다. 그의 치세중의 불교 진흥을 위한 업적은 괄목할 만한 것이었으며, 자신도 불교를 열렬히 신봉하여 말년에 사문(沙門)이 되어 호를 법운(法雲)이라 하였고 부인 역시 영흥사에서 비구니가 되었다. 그의 재위 동안의 불교 업적은 다음과 같이 간략히 요약할 수 있다.[13]왕 5년(544)에 흥륜사(興輪寺)가 완공되었고, 3월에 비로소 출가승니(僧尼)가 되는 것을 국법으로 허락하였다.황룡사(皇龍寺) · 지원사(祗園寺) · 실제사(實際寺) 등 여러 사원들을 계속 새로 세웠으며, 왕 27년(566)에 낙성된 황룡사는 13년 동안에 걸쳐 조성된 거찰(巨刹)이었다.왕 10년(549) 봄에 각덕(覺德)을 위시한 유학승(留學僧)들이 계속 귀국하였고, 이때 불사리(佛舍利)와 함께 경전(經典)을 들여왔다.왕 11년(550)에 대서성(大書省)과 소년서성(少年書省)을 설치하여 불교의 제반 업무를 관장케 하였으며 안장법사(安藏法師)를 대서성으로 삼았다. 왕 12년(551)에는 신라로 귀화한 고구려승 혜량(惠亮: fl. 551)을 승통(僧統)으로 임명, 교단을 지도 · 육성케 하고 이 승통 밑에 대도유나(大導唯那) · 도유나랑(都唯那娘) 등을 두고 승관제(僧官制)를 정비하였다.왕 12년(551)에 승통(僧統)인 혜량(惠亮: fl. 551)에 의해 인왕백고좌법회(仁王百高座法會)와 팔관회(八關會)가 시작되었다. 인왕백고좌법회는 《인왕호국반야경(仁王護國般若經)》의 내용에 따라 국가의 안태(安泰)를 기원하고 내란(內亂)과 외환(外患)을 소멸시키기를 비는 법회였으며, 팔관회는 본래 하루하나의 계(戒)를 닦는 법회였으나 신라에서는 전몰장병을 위한 위령제였다는 점에서 인왕백고좌법회와 함께 팔관회는 국가의 현실적인 의도와 이익에서 베풀어진 법회들이었다.왕 26년(565)에 진(陳)나라 사신 유사(劉思)와 승려 명관(明觀)이 귀국할 때 1700여 권의 경전을 들여왔다.왕 35년(574)에 황룡사 장륙존상(丈六尊像)을 주성(鑄成)하였다.왕 37년(576)에 안홍법사(安弘法師)가 중국에서 돌아올 때 인도의 승려 비마라(毘摩羅) · 농가타(農伽陀) · 불타승가(佛陀僧伽) 등이 그를 따라 입국하였고 이때 《능가경》·《승만경》 등 발전된 대승경전을 왕에게 바쳤다.이 밖에도 진흥왕은 재위시 신라 국민사상의 총화를 이룬 화랑도(花郞道)를 제정하여 삼국통일의 기반을 닦았다. 이러한 일련의 불교진흥책은 진흥왕으로 하여금 정교일치(政敎一致) 정책을 써서 불국토(佛國土)를 신라 사회에 현실화시키려 했고, 왕 자신도 정법(正法)으로 세상을 다스리는 전륜성왕(轉輪聖王)의 이념에 심취되었다고 생각할 수 있으므로 신라 사회에서의 불교 발전은 진흥왕과 불가분의 관계에 있었다.
Q.  명나라의 만력제는 어떤 황제였나요?
안녕하세요. 이명훈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중국 명(明)의 제13대 황제로서 이름은 주익균(朱翊鈞), 묘호(廟號)는 신종(神宗)이다. 재위(在位) 때 만력(萬曆, 1573~1620)이라는 연호(年號)를 사용하여 만력제(萬曆帝)라고 부른다. 1563년 9월 4일 융경제(隆慶帝, 재위 1567~1572)의 셋째 아들로 태어났으며, 생모(生母)는 귀비(貴妃) 이씨(李氏)이다. 위로 두 형이 있었지만 일찍 죽어 여섯 살 때인 1568년 황태자가 되었으며, 1572년 7월 융경제(隆慶帝)가 황위(皇位)에 오른지 6년만에 죽자 10살의 나이로 즉위하였다. 그 뒤 1620년 8월 18일 죽을 때까지 명(明) 왕조(王朝)에서 가장 오랜 기간인 48년 동안 황위(皇位)에 있었다.어린 나이에 즉위한 만력제(萬曆帝)는 즉위 초기 10여년 동안은 선제(先帝)의 뜻에 따라 내각대학사(內閣大學士) 장거정(張居正, 1525~1582)에게 정무(政務)를 맡겨 내정(內政) 개혁을 추진하였다. 장거정은 고성법(考成法)을 실시하여 관리가 상주(上奏)하여 황제의 재가를 얻은 사안의 집행 여부를 달마다 보고하도록 하여 행정 체계의 효율성을 높이고 기강을 바로잡으려 하였다. 그리고 새로 전국의 농지를 측량하고, 이에 근거하여 각종 조세와 요역을 통합하여 은(銀)으로 납부하도록 하는 일조편법(一條鞭法)을 실시하였다. 또한 몽골 타타르[韃靼]에 대해 화평(和平) 정책을 추진하고, 척계광(戚繼光, 1528~1587)과 이성량(李成梁, 1526~1615) 등을 중용하여 왜구(倭寇)나 몽골, 여진(女眞)의 위협에 대한 국방(國防) 체계를 정비하였다. 이러한 개혁 정책은 명(明)의 정치적 안정에 크게 기여하여 이른바 ‘만력중흥(萬曆中興)’이라고 불리는 사회와 경제, 문화의 발전을 가져왔다. 이 시기에 명(明)은 이른바 ‘남왜북로(南倭北虜)’의 외환(外患)을 극복하고, 국가 재정(財政)을 크게 확충하였다. 강남 지방을 중심으로 상공업이 크게 발달하였고, 해외 무역도 확대하여 은(銀)의 유입이 크게 늘면서 명(明) 문화의 최성기(最盛期)를 가져왔다.하지만 1582년 장거정(張居正)이 죽고 만력제(萬曆帝)의 친정(親政)이 시작되면서 개혁 정책의 후퇴가 나타났다. 장거정은 탄핵되었으며 고성법(考成法)은 폐지되었다. 특히 1586년(萬曆 14년) 이후 만력제(萬曆帝)가 황태자의 책봉 문제로 내각(內閣)과 대립하여 정사(政事)를 돌보지 않는 ‘태정(怠政)’을 지속하면서 명(明)은 심각한 정치적 혼란에 빠졌다. 만력제는 황귀비(皇貴妃) 정씨(鄭氏)를 총애하여 장자(長子)인 주상락(朱常洛, 1582~1620) 대신에 정귀비가 낳은 셋째 아들 주상순(朱常洵, 1586~1641)을 황태자(皇太子)로 삼으려 하였다. 내각(內閣) 대신(大臣)들이 종법(宗法)의 원칙을 내세워 이에 반대하자 만력제는 1589년 이후 30여년을 조정(朝廷)에 나오지 않고 정무(政務)을 내팽개치는 태정(怠政)을 하였다. 대신(大臣)들도 몇 년 동안 황제의 얼굴을 보지 못하는 경우도 있었으며, 신료(臣僚)들의 상주문(上奏文)은 회답이 없이 궁중에 방치되었다. 고위 관직이 비어도 후임자를 제대로 임명하지 못해 내각(內閣)이나 지방 관청의 상당수가 관리가 제대로 충원되지 못해 업무가 제대로 추진되지 못하는 사태가 벌어졌다.게다가 만력제(萬曆帝)는 국가 재정을 무시하고 개인의 축재(蓄財)에만 힘을 쏟아 1596년(萬曆 24년)부터 환관(宦官)들을 광세사(鑛税使)로 파견하기 시작해 백성들의 원성(怨聲)을 샀다. 광세사(鑛税使)로 파견된 환관(宦官)들은 지하에 광맥(鑛脈)이 있다는 것을 알면 채굴(採掘)을 위해 그곳에 있는 백성들을 모두 몰아냈다. 그리고 채굴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으면 인근의 상인들에게 도광(盜鑛)의 책임을 물어 배상을 강요했다. 광세사(鑛税使)들은 상인과 백성들을 마구잡이로 약탈하였고, 환관의 발호(跋扈)가 나타나면서 환관과 내각 사이의 당쟁도 격화하였다. 광세사(鑛税使) 파견은 명(明) 시대에 나타난 대표적인 악정(惡政)으로 꼽힐 만큼 백성들의 반감을 샀지만, 만력제(萬曆帝)는 재위 기간에 광세사(鑛税使)의 파견을 중단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렇게 모아들인 돈을 왕실 재정인 내탕[內帑]에 두고 개인적인 사치로 낭비하여 더욱 백성들에게 원성(怨聲)을 받았다. 심지어 1618년 누르하치[努爾哈赤, 1559~1626]가 이끄는 후금(後金)의 군대가 푸순[撫順]을 점령하자 병부상서(兵部尙書) 설삼재(薛三才)를 비롯한 대신들이 랴오둥[遼東] 방어를 위한 군비(軍費)가 모자라 내탕(內帑)에서 지원해달라고 요청하였으나, 만력제(萬曆帝)는 이조차도 거절하였다.만력제(萬曆帝)의 태정(怠政)으로 명(明)은 매우 빨리 몰락하였다. 황태자의 책봉 문제를 둘러싼 내각(內閣)과 황제의 대립은 정치적 불안정과 당쟁의 격화를 가져왔으며, 환관(宦官) 세력이 발호(跋扈)하는 계기가 되었다. 그리고 1592년 닝샤[寧夏]에서 일어난 발배(哱拜)의 난(亂)과 1594년 쓰촨[四川]과 구이저우[貴州]에서 일어난 양응룡(楊應龍)의 난(亂), 1592년 조선(朝鮮)에서 일어난 임진왜란(壬辰倭亂) 등에 대규모로 군사를 파견하였는데, 이른바 ‘만력3정(萬曆三征)’이라고 불리는 이 사건들은 명의 국가 재정을 크게 악화시켰다. 이러한 명(明)의 정치적 혼란은 후금(後金) 세력이 강성해지는 계기가 되었으며, 누르하치[努爾哈赤]는 1619년 사르후[薩爾滸] 전투에서 대승을 거두면서 명(明)을 위협하는 세력으로 등장하였다. 명(明) 조정(朝廷)은 웅정필(熊廷弼, 1569~1625)을 파견하여 랴오둥[遼東]의 정세를 안정시키려 하였지만, 결국 정치적 혼란을 극복하지 못하고 농민반란과 후금(後金)의 침략에 시달리다가 1644년에 멸망하였다.만력제(萬曆帝)는 1620년 8월 18일 죽어 정릉(定陵)에 안장되었고, 범천합도철숙돈간광문장무안인지효현황제(範天合道哲肅敦簡光文章武安仁止孝顯皇帝)라는 시호(諡號)를 받았다. 정릉(定陵)은 1960년대 문화대혁명(文化大革命) 시기에 홍위병(紅衛兵)들에게 파헤쳐졌고, 만력제(萬曆帝)의 유골이 소각되는 일을 겪기도 했다. 등의 사서(史書)에서 만력제(萬曆帝)는 명(明) 멸망의 근본적인 원인을 제공한 인물로 평가를 받아왔다. 만력제(萬曆帝)가 태정(怠政)을 한 원인에 대해서는 다양한 해석이 나타난다. 그가 누군가의 부축을 받지 않고는 혼자 걸을 수 없을 정도로 심각한 비만이었고, 등과 다리가 굽은 신병(身病)을 앓아 움직이기를 싫어하게 되었기 때문이라는 해석도 있다. 실제 1958년 정릉(定陵)의 발굴이 이루어져 만력제(萬曆帝)의 유골이 복원되었는데, 상체가 심하게 굽어 있었다는 사실이 확인되기도 하였다. 일부에서는 그가 아편 중독에 빠져 있었을 가능성이 제기되며, 어려서 총명함을 보였던 그가 장거정(張居正)이 죽은 뒤에 급격히 정무를 게을리 한 사실을 두고 자신이 믿고 의지하던 인물을 잃음으로써 심각한 우울증을 앓았기 때문이라고 보는 견해도 있다.
Q.  백제 멸망 후 백제에 대한 평가 중에 궁금한 점이 있습니다.
안녕하세요. 이명훈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항차 밖으로 곧은 신하는 버리고 안으로 요사스러운 부인을 믿어, 형벌은 오직 충직스럽고 어진 자에게만 미치고 총애와 신임은 아첨하는 자에게 먼저 더해졌다.『정림사지 5층 석탑 』고구려 승려 도현(道顯)의 《일본세기(日本世記)》[27]에 "7월에 운운, 춘추지(春秋智)가 대장군 소정방(蘇定方)의 도움을 얻어 백제를 협공하여 멸망시켰다. 혹은 백제는 자멸하였다. 왕의 하시카시(대부인, 大夫人)[28]가 요사스럽고 무도하여 국정을 좌우하고 현명하고 어진 신하를 주살하였기 때문에 이러한 화를 초래하였다. 삼가지 않을 수 있겠는가."《일본서기》권 제26 백제왕 의자(義慈), 그의 처 은고(恩古), 그 아들 융(隆) 등, 그 신하 좌평 천복(千福), 국변성(國辨成), 손등(孫登) 등 모두 50여 명이 가을 7월 13일에 소장군(蘇將軍, 소정방)에게 사로잡혀 당(唐)에 보내졌다. 아마도 이것은 까닭 없이 무기를 들고 다닌 징험일 것이다.《일본서기》 권 26 물론 왕의 부인이 여러 명일 수는 있다. 그러나 여러 기록들을 살펴보면 은고, 대부인(大夫人), 왕후, 당고종의 질책을 들은 여인이 모두 동일인임을 알 수 있다.至庚申年七月。百濟遣使奏言。大唐。新羅幷力伐我 旣以義慈王。々后。太子爲虜而去경신년 7월에 이르러 백제가 사자를 보내, 당과 신라가 힘을 합해 우리를 공격하여 이미 의자왕, 왕후, 태자를 포로로 하여 갔다고 아뢰었다.『《일본서기》 사이메이 덴노 6년, 660』4년(서기 644) 봄 정월, 당나라에 사신을 보내 조공하였다. 당 태종이 사농승(司農丞) 상리현장(相里玄獎)을 양국에 보내 알아듣도록 타일렀다. 임금이 표문을 올려 사죄하였다. 왕자 융(隆)을 태자로 삼았다. 죄수들을 크게 사면하였다. - 《삼국사기》 -의자왕-드디어 태자 효(孝)와 함께 북쪽 변경으로 달아났다. 소정방이 성을 포위하자 임금의 둘째 아들 태(泰)가 스스로 왕이 되어 병사를 거느리고 굳게 지켰다. - 《삼국사기》 -의자왕-또한 '《한서》 '에 따르면 '대부인(大夫人)'은 정실 부인이면서 세자를 둔 부인을 말한다. 《삼국유사》의 저자 일연은 태자는 어디까지나 부여융이고 부여효는 잘못되었다고 부정하지만 신라인과 당나라 사람들은 부여효를 태자라고 여겼다.또한 《일본서기》에 은고를 의자왕, 부여융, 그 외 좌평들이 당나라로 잡혀간 원인이 '아마도 이것은 까닭 없이 무기를 들고 다닌 징험일 것이다.' 라고 하는 것으로 봐서 정적 숙청에 은고와 부여효가 깊게 관여했음을 짐작할 수 있다.644년에 부여융을 태자로 세웠다는 기록이 있는데 정작 백제 멸망 당시 기록에는 부여융은 그냥 왕자고 부여효가 태자라고 기록되고 있는데, 이 기록 차이를 해석해 의자왕이 태자를 교체했단 설이 있다. 만약 은고가 부여효의 어머니라서 부여효로 태자를 바꾸고 대부인이 된 거라면 '왕비의 전횡'을 뒷받침하는 하나의 근거가 될 수 있다. 만약 태자를 교체했다면 태자궁을 화려하게 꾸몄다는 기록이 있는 655년이 가장 가능성이 높다.
5152535455
아하앤컴퍼니㈜
사업자 등록번호 : 144-81-25784사업자 정보확인대표자명 : 서한울
통신판매업신고 : 2019-서울강남-02231호개인정보보호책임 : 이희승
이메일 무단 수집 거부서비스 이용약관유료 서비스 이용약관채널톡 문의개인정보처리방침
© 2025 Aha.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