Q. 조선시대 과학자에 대해 질문드립니다.
안녕하세요. 장경수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과학사학자들에 따르면 장영실이 노비출신 등 극적인 개인사 때문에 일반인에게 최고 인기 과학자가 됐다고 한다. 하지만, 문중양 서울대 국사학과 교수는 세종 시대 최고 과학자로 ‘이순지, 이천, 정인지’를, 김근배 전북대 과학학과 교수는 ‘이순지와 이천’을 꼽았다. 이 중 이천은 ‘동에 번쩍 서에 번쩍’이란 말이 어울릴 정도로 여러 분야에서 능력을 발휘한 과학기술자다.특이하게도 이천은 원래 학자가 아닌 ‘무인’ 출신이다. 그는 고려말 1376년에 태어나 조선을 건국한 태조 시절에 무과 급제해 10대 후반에 무인의 길에 들어섰다. 무인이던 그가 태종, 정종 때까지 어떤 일을 했는지, 어떻게 과학기술자로 나서게 됐는지는 자세한 기록이 남아 있지 않아 알 수가 없다.하지만, 그가 천재적인 재능을 발휘하기 시작한 세종 때의 기록은 잘 남아 있다. 1418년 세종이 왕위에 등극하던 해에 이천은 공조 참판으로 재직하면서 왕실 제사에 사용되는 제기를 만들었다. 당시 왕실에서 사용하던 제사 그릇인 제기는 쇠로 만들었는데, 이천이 만든 제기는 이전과 비교가 안 될 정도로 정교했다. 이 제기를 눈여겨본 세종은 곧바로 이천을 불렀다.세종은 이천이 쇠를 다루는 천재적인 기술을 가진 것을 알아보고 기존의 활자를 개량하는 일을 맡겼다. ‘쇠를 떡 주무르듯’ 다루는 이천이었지만 활자 제작 기술은 처음이었고, 전혀 알지 못했다. 이에 이천은 김돈, 김빈, 장영실, 이세형, 정척, 이순지 등 당시 과학 기술자들을 동원하여 공역을 관장하며 새 활자 개발을 위해 온갖 연구를 거듭했다.금속활자 인쇄기술은 조선시대에 비약적으로 발전했다. 조선 태종 때 주자소를 세우고 청동으로 만든 금속활자 ‘계미자’(癸未字)를 제작했다. 하지만, 모양이 크고, 가지런하지 못하며, 주조가 거친 기술적 문제가 있었다. 특히 활자를 고정하는 밀랍이 녹으면서 글자가 쏠리고 비뚤어지는 경우가 많았다.그가 활자 개량에 나선지 2년 만인 1420년 새로운 활자 ‘경자자’(庚子字)가 만들어졌다. 이천은 밀랍 대신 녹지 않는 대나무를 끼워 넣는 획기적인 신기술을 개발해 인쇄할 때 활자가 밀리지 않도록 했다. 그는 이를 개량하고 발전시켜 더 완벽해진 ‘갑인자’(甲寅字)를 만들어냈다.당시 하루에 인쇄할 수 있는 최대 장수가 4장이던 활자 기술을 갑인자는 하루에 40장을 찍어낼 수 있을 정도로 엄청나게 발전시켰다. 갑인자는 경자자보다 모양이 좀 크고, 글자체가 바르고 깨끗한 필서체로 능률이 경자자보다 2배나 높아졌다. 현재 ‘갑인자’로 찍어 낸 ‘대학연의’와 같은 책은 15세기에 전 세계에서 제작된 인쇄물 중에서 가장 아름다운 서적 중 하나로 평가받고 있다. 당시 세종은 책을 통해 높은 수준의 학문을 백성에게 전파하고자 금속활자에 관심을 뒀다.15세기 세계 최고 수준을 자랑한 천문의기 제작의 총책임을 맡았던 과학기술자도 바로 이천이다. 그는 장영실과 함께 혼천의와 간의를 비롯한 일성정시의 등의 해시계를 제작했다. 간의와 앙부일구 등의 기기를 정인지와 정초가 설계하면 이를 최종적으로 만드는 일을 이천이 담당해 훌륭한 결과물로 만들어낸 것이다. 세종이 궁에 설치한 천문대인 간의대는 당시 세계 최고의 천문대로 학계에서 평가받는데, 이 간의대를 건축한 이도 이천이다. 천문 관측 기기 제작에 대한 이천의 업적은 금속활자 업적보다 더 높게 평가되기도 한다.세종 시대 과학기술의 밑바탕이 된 도량형의 표준화도 그가 이룩한 중요 성과다. 그는 저울을 개량해 전국 관청에 나눠줬다. 이 저울은 전국 관청에서 세금을 부과할 때 등 다양하게 사용돼 저울 문제로 발생할 수 있는 논란을 줄였다.이천은 도성을 쌓는 건축술, 군선이나 화포 개량 같은 군사 분야, 하물며 악기 제조에까지 그의 기술력이 미치지 않은 곳이 없었다. 그는 대마도를 정벌할 때에 사용하고자 선체가 크면서도 빨리 달릴 수 있는 쾌속선을, 물에 잠기는 부분이 썩지 않도록 판자와 판자를 이중으로 붙이는 방법인 갑조법을 개발했다. 평안도 절제사로 지내면서는 조선식 대형포인 조립식 총통완구를 독창적으로 개발했다. 또한, 박연과 더불어 금, 솔, 대쟁, 아쟁, 생, 우회 등 많은 악기를 만들고, 무희와 악공들의 관복을 제도화하는데도 앞장섰다.이렇게 이천은 수많은 발명품 뒤에서 뛰어난 기술로 공을 세웠다. 그는 문종 1년인 1451년 76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무인이면서 놀라운 기술력을 지녔던 천재적인 과학기술자 이천, 그는 ‘갑옷 입은 과학기술자’였다.
Q. 우리나라의 오랜 역사에 있어서 법전은 어떤것들이 있었나요?
안녕하세요. 장경수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조선경국전 : 정도전이 1394년 3월에 편찬을 완료하여 당시 왕이었던 태조 이성계에게 바친 법전으로, 우리나라 최초의 사찬 법전서이라 할 수 있다.경국대전 : 기존에 있던 《조선경국전》, 《경제육전》과 《속육전》, 이후의 시행 법령을 묶어 만든 통일 법전이다.속대전 : 조선 영조 22년인 1746년에 문신 김재로(金在魯) 등이 왕명을 받아 편찬한 한국의 통일 법전. 총 6권 4책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현재 서울대학교 규장각 등에 소장되어 있다.대전통편 : 조선 정조 9년인 1785년에 왕의 명으로 경국대전, 속대전 및 그 뒤의 법령들을 통합해 편찬한 한국의 통일 법전. 총 6권 5책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현재 한국학 중앙 연구원 장서각, 종로도서관 등에 소장되어 있다.대전회통 : 조선 고종 2년인 1865년에 흥선대원군의 주도로 대전통편(大典通編) 체제 이후 80년간의 수교(受敎), 각종 조례(條例) 등을 보충, 정리한 한국의 통일 법전. 총 6권 5책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현재 서울대학교 규장각 등에 소장되어 있다.
Q. 조선후기 개항과 개화 전개 양상이 궁금합니다.
안녕하세요. 장경수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조선 역시 ‘개항’이라는 피할 수 없는 시대의 흐름과 직면했다. 18세기 후반부터 이양선이라 불리는 서양 선박들이 조선 근해에 빈번하게 나타나기 시작했다. 조선에 최초로 통상을 요구한 것은 동인도회사 소속의 영국 상선 로드 암허스트호였다. 조선은 이들의 요구를 단호히 거절했다. 이후로도 조선은 통상 수교 거부 정책을 고수했다. 하지만 서양세력의 진출과 함께 중국 중심의 동아시아 국제질서는 균열하기 시작했고 조선 역시 나아갈 길을 모색해야만 했다. 조선 정부 내에서는 개항을 두고 두 가지 주장이 팽팽하게 맞섰다. 전통 문명과 질서 안에서, 즉 쇄국정책을 유지하면서 자체적으로 부국강병책을 추진하자는 주장, 서양 문명의 우월함을 인정하고 그것을 수용함으로써 부국강병을 이루자는, 즉 근대화를 적극 추진하자는 것이 또 다른 주장이었다. 사실 대외 개방의 주장은 이미 18세기 말부터 있어 왔다. 박지원, 박제가 등의 북학파 실학자들은 일찌감치 개방의 필요성을 인식하고 청과의 활발한 교류와 서양 선진 기술의 도입을 주장해 왔다. 이들의 학문적 주장은 이규경, 최한기로 이어졌고 19세기 후반 박규수에 이르러 정치적 영향력을 갖기 시작했다. 대원군 집권기에는 전자인 척화론을 지지하는 사람들의 주장이 훨씬 강했다. 병인양요와 신미양요를 겪은 이후 척화론은 더욱 강화되었고, 전국 곳곳에 척화비를 세워 쇄국정책을 더욱 확고히 하고자 했다. 그러나 1873년, 대원군이 퇴진하고 고종이 친정하면서 쇄국의 기조는 변화하기 시작했다. 그 무렵 동아시아의 국제질서 역시 급변했다. 중국은 자신의 지배력을 계속 유지하고자 했지만 개항 이후 1868년 메이지유신으로 근대국가 수립에 성공한 일본은 이미 전통질서의 틀을 벗어나 신흥 제국주의로 향하고 있었다. 굳게 걸어 잠근 조선의 문을 연 나라는 구미 국가가 아닌 제국주의 후발 국가였던 일본이었다. 사실 구미 국가들은 조선에 관심이 적었다. 그들은 상품시장으로서의 가치가 컸던 중국에 관심을 집중했다. 그러나 일본은 달랐다. 그들에게 조선은 자국의 주권을 지키고 이익을 확보할 수 있는 돌파구였다. 일본은 조선 개항에 가장 적극적이었다. 1868년 메이지 정부를 수립하면서 국교 수립을 요청했던 일본. 외교문서인 서계를 문제 삼아 조선이 이를 거절하자 1875년, 일본은 군함 운요호를 앞세워 무력시위를 펼쳤다. 이어, 1876년 2월 일본은 또다시 사절단을 파견, 운요호 사건 처리를 명목으로 조선의 개항을 압박했다. 척화론자들은 왜양일체론을 주장하며 교섭을 반대했다, 그러나 조일수호조규, 이른바 강화도조약은 교섭을 시작한 지 한 달이 채 안 된 1876년 2월 27일에 최종 타결됐다.개항 이후의 사회적 변화평등 사회로의 이행문호 개방 이후, 조선 사회는 열강의 경제적 침탈에 의하여 전통적인 체제가 크게 흔들리게 되었고, 근대적 사상이 전래되면서 새로운 사회를 건설하려는 움직임이 나타났다. 즉, 일부 선각적인 양반, 중인 출신의 인사들은 개화 사상을 수용하고 개화당을 조직하여 위로부터의 사회 개혁을 추진하였다.갑신정변 당시의 개화당 정부는 14개조의 정강에서 문벌의 폐지, 인민 평등권의 확립, 지조법(地租法)의 개정, 행정 기구의 개편 등을 내걸고 근대 사회의 건설을 위한 대개혁을 단행하려 하였으나, 보수 세력의 방해와 청의 무력 개입으로 실패하고 말았다. 그런데 당시의 민중들은 개화당의 개혁 의지를 이해하지 못하였고, 오히려 이들을 적대시하였다.한편, 조선 후기의 민란에서 비롯된 민중의 저항 운동도 계속되었다. 양반 중심의 신분 제도와 봉건적 수취 체제에 불만을 가진 농민의 저항 운동은, 인간 평등과 사회 변혁에 기초한 동학 사상과 결합하여 동학 농민 운동으로 발전하였다. 동학 농민군은 12개조의 폐정 개혁안에서, 탐관 오리의 처단, 노비 문서의 소각 등을 내세웠다. 그리고 집강소를 설치하여 차별적 신분 제도를 타파하고, 농민을 위한 토지 개혁을 단행하여 새로운 사회를 만들고자 하였다. 동학 농민 운동은 비록 실패로 끝났지만, 이 운동은 양반 중심의 전통적 신분제 사회를 붕괴시키는 데 크게 기여하였다.갑신정변과 동학 농민 운동이 보수 세력의 방해와 외국의 무력에 의하여 좌절된 뒤에, 신분 차별이 없는 평등한 사회를 추구하려는 노력은 갑오개혁과 을미개혁으로 이어졌다. 갑오개혁과 을미개혁은 정치, 경제, 사회 등 국정의 모든 분야에 걸친 개혁이었으나, 그 중 양반 중심의 신분 제도를 폐지한 사회 개혁은 획기적인 것이었다.갑오개혁과 을미개혁은 양반, 평민의 계급을 타파하고, 백정, 광대 등 일체의 천민 신분을 폐지하였으며, 공사 노비 제도를 혁파하고, 인신 매매를 금지하였다. 또, 조혼의 금지, 과부의 개가 허용, 고문과 연좌법의 폐지 등을 실시하여 봉건적인 폐습을 타파하였다.갑오개혁과 을미개혁은, 일본의 영향하에서 그들의 침략을 위한 체제 개편의 성격이 있음을 부정할 수는 없다. 그러나 이 개혁은 실제로는 조선의 개화 관료들에 의하여 갑신정변과 동학 농민 운동의 기반 위에서 추진되었으며, 이로써 차별적 신분 제도가 폐지되고 근대적 평등 사회의 기틀이 마련되었다.사회 의식의 변화차별적 신분 제도가 폐지되었다고 하여 곧바로 평등 사회가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었다. 거기에는 사회 일반의 의식의 변화와, 보다 구체적인 제도가 마련되어야 했다. 이를 위한 노력은 대한 제국 초기에 독립 협회의 민권 운동에서 구체성을 띠게 되었다. 동학 농민 운동은 신분 제도 타파 의식을 분명히 보여 주었으나, 그것이 근대적 사회 의식으로 직결되는 것은 아니었다.한편, 갑신정변과 갑오⋅을미개혁은 근대적 사회 의식을 보여 주었으나, 그것이 바로 민권의 확립에 의한 민주주의 사회를 기약하는 것은 아니었으며, 민중과 유리된 한계성도 가지고 있었다. 독립 협회 운동은 이러한 문제점을 발전적으로 보완하며 추진되었다.독립 협회는 근대적 지식과 국권⋅민권 사상으로 민중을 계몽하였다. 이러한 민중 계몽 운동에 의하여 민중의 근대적 정치⋅사회 의식이 높아졌고, 높아진 민중 의식을 바탕으로 하여 근대적 민중 운동이 일어났다. 이에 독립 협회와 민중은 국권 수호 운동과 민권 보장 운동을 전개했을 뿐만 아니라, 의회 설립 운동까지 벌이게 되었다. 이와 같은 독립 협회의 국권⋅민권 운동에 의하여, 제한된 범위에서나마 자유⋅민권에 입각한 민주주의 사상과 근대적 민족주의 사상이 보급되었고, 민중에 바탕을 둔 자주적 근대 개혁 사상이 정착되었다.만민 공동회에서 시전 상인이 회장에 선출되고, 관민 공동회에서 천인 출신인 백정이 연사로 나섰다는 사실은, 새로운 평등 사회의 출현을 알려 주는 현상이었다. 독립 협회 운동에 동조하기 위하여 가게 문을 닫은 상인에게 순검들이 와서 문을 열라고 했을 때, “지금은 전과 달라 관인의 무례한 압제를 아니 받겠노라.”고 거절한 어느 상인의 말은, 당시 사회 의식의 변화와 사회 자체의 변화를 단적으로 보여 주는 것이다.백정 박성춘의 관민 공동회 연설문(1898)나는 대한의 가장 천한 사람이고 무지몰각합니다. 그러나 충군 애국의 뜻은 대강 알고 있습니다. 이에, 이국 편민(利國便民)의 길인즉, 관민이 합심한 연후에야 가하다고 생각합니다. 저 차일에 비유하건대, 한 개의 장대로 받친즉 역부족이나, 많은 장대를 합한즉 그 힘이 공고합니다. 원컨대, 관민이 합심하여 우리 황제의 성덕에 보답하고, 국운(國運)이 만만세 이어지게 합시다.독립 협회 운동은 대한 제국 말기에 애국 계몽 운동으로 계승되었다. 애국 계몽 운동은 사회, 교육, 경제, 언론 등의 각 분야에서 폭넓게 추진되어, 국민의 근대 의식과 민족 의식을 고취시켰다. 애국 계몽 운동의 영향으로 국민의 교육열이 고양되어 근대 교육이 널리 보급되었으며, 근대 지식과 근대 사상이 점차로 보편화되어 사회 의식의 전환을 가져왔다.애국 계몽 운동은 일제의 보호국 체제하에서 적극적인 정치 투쟁으로 전개되지는 못했지만, 민주주의 사상을 한 단계 진전시켰다. 19세기 말에 독립 협회는 민주주의 실현과 국민 국가의 건설을 목표로 활동하였으나, 이를 공개적으로 거론하지는 못하였다. 그러나 20세기 초에는 애국 계몽 운동가들이 민주 공화 정체의 우월성과 국민 국가 건설의 필요성을 공개적으로 주장할 만큼 상당한 사회 의식의 변화를 보여 주었다.갑오개혁과 을미개혁을 통하여 사회적 신분 제도가 폐지되고, 대한 제국 시기의 독립 협회 운동과 애국 계몽 운동을 통하여 근대 의식이 점차로 보편화되면서 근대 사회가 진전되어 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