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손한거북이
- 생활꿀팁생활수돗물은 바로 마시면 안되나요? 몸에 해롭나요?A. 안녕하세요. 자드락비입니다.거주하고 계시는 장소에 따라 오래된 배관에서 나오는 이물질들은 끓여도 사라지지 않고 체내에 쌓인다고 합니다.특히 요즘 같은 시대엔 강에 각종 의약품들을 무분별하게 버려 지며 강으로 유입되고 있다고 합니다. 실제 측정결과 여러종류의 항생물질이 검출되고 심지어 한강에서 비아그라 성분도 검출되고 있다고 합니다. 팔당호에서는 퇴적물과 물고기에서 중금속이 기준치 이상으로 검출되고 이외에 녹조 또한 식수원 오염의 원인이 되고 있습니다.이러한 오염물질들이 수독물에 있을 때 끓인다고 하더라도 없어지지 않는다고 합니다.정수과정에서 중금속과 유기화학 물질들이 100%제거가 됐다해도 배관을 통해 집에 도착한 물입니다. 개인적으로 수돗물을 믿고 마시진 않습니다.생수를 사드시거나 정수기를 사용하시는 방법이 좋아 보입니다.자료출처 : https://blog.naver.com/cotton1121/222547078494
- 생활꿀팁생활물가지수는 어떻게 계산되고 어디에서 확인할수있나요?A. 안녕하세요. 자드락비입니다.https://www.index.go.kr/main.do?cate=1국가지표체계 사이트 입니다.통계청에서 관리합니다.출처 : https://blog.naver.com/alryddid/222721411050
- 생활꿀팁생활조선시대에 독살된 왕이나 왕세자가 있었을까요?A. 안녕하세요. 자드락비입니다.자료가 방대해 편집했습니다.자세한 이야기를 알고 싶으시다면 출처를 참고해 주세요.출처 : https://kin.naver.com/qna/detail.naver?d1id=11&dirId=111001&docId=59296814&qb=7KGw7ISgIOyZlSwg7JmV7IS47J6QIOuPheyCtA==&enc=utf8§ion=kin.ext&rank=4&search_sort=0&spq=0독살설의 시초임금 인종정사인 『인종실록』은 인종이 부왕의 죽음을 너무 슬퍼한 나머지 병을 얻어 사망했다고 적고 있다. 그러나 야사(野史)들은 어김없이 계모 문정왕후가 독살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그 중 한 내용을 소개하면 이렇다. 매번 인종을 핍박하던 대비 문정왕후 윤씨가 하루는 만면에 웃음을 띠면서 떡을 내놓았다. 인종은 계모 윤씨가 난생 처음으로 자신을 반겨주는 것에 감격해 그 떡을 먹었는데 그날부터 앓기 시작하더니 숨을 거두었다는 것이다.사실 문정왕후에 의한 인종 독살설은 조선 사대부들 사이에서 광범위하게 받아들여졌다. 그 이유는 인종이 죽자마자 사화(士禍)가 재발했기 때문이다. 명종 즉위년에 발생한 을사사화(1545)가 그것이다. 조선 초·중기는 「훈구파」라는 구정치세력과 「사림파」라는 신정치세력의 정권을 둘러싼 각축이 심했다. 사화란 집권당인 훈구파가 야당인 사림파를 공격하는 정치 탄압을 말한다. 그런데 중종 때의 기묘사화 이후 거의 종결됐던 사화가 인종 사망 직후 다시 재연된 것이다. 인종이 승하하고 그의 시신이 채 식기도 전에 발생한 을사사화는 조선 사림파 사대부들로 하여금 문정왕후의 인종독살설을 사실로 믿게 했다.광해군과 선조 독살설즉위한 광해군이 자신을 폐출시키려던 소북을 정리하는 것은 당연한 수순. 광해군은 소북을 숙청하고 자신을 지지한 대북에게 정권을 넘겼다. 정권을 장악한 대북은 영창대군과 인목대비에 대한 강경책을 펴서 영창대군을 사사하고 인목대비를 폐위해 서궁에 가두었다. 이 와중에 나돈 소문이 선조독살설이었다. 소문의 진원지는 당연히 숙청당한 소북과 세를 잃은 서인들이었다.하지만 이때만 해도 선조 독살설이 그리 광범하게 유포되지는 않았다. 선조가 죽기 전해부터 병색이 심각했다는 사실은 조선의 사대부 모두 알고 있던 일이기 때문이다. 선조독살설이 조선 전역에 유출되고 사실처럼 전해진 것은 광해군이 쫓겨난 이후였다.정철의 실각 이후 정권에서 소외됐던 서인들은 광해군의 현실적인 대청외교와 인목대비 폐위 등을 반사대·반윤리적인 행위로 규정짓고 군사 쿠데타를 일으켜 정권을 장악한다. 인조반정이 그것이다. 인조 반정은 대북 정권에 의해 서궁에 유폐됐던 인목대비를 화려하게 복귀시키는 무대이기도 했다. 그녀는 그간 사랑하는 아들 영창대군이 비참하게 저세상으로 가는 비극을 맛보았다. 백년을 씻어도 씻기지 않을 한을 품은 그녀가 다시 대비로 복위한 것이다. 인조반정의 주역들이 반정을 추인해 달라고 요구하자 인목대비는 광해군 부자를 죽이라고 요구한다.『역괴(逆魁:광해군)는 부왕을 시해하고 형을 죽였으며, 부왕의 첩을 간통하고 그 서모를 죽였고, 그 적모(嫡母:인목대비)를 유폐하여 온갖 악행을 다하였다』말하자면 광해군이 선조를 독살했다는 주장이었다. 그러나 이 말을 들은 민성징이 즉각 『지금 하교하신 사실은 외간에서 일찍이 듣지 못한 일입니다. 더욱이 선왕을 시해했다는 말은 더욱 듣지 못한 사실입니다』라고 되물은 데서 알 수 있듯이 별다른 근거가 있는 것은 아니었다. 이는 단지 아들을 잃은 여인이 한풀이를 위해 지어낸 말일 뿐이다.하지만 대비의 입에서 직접 나온 선조 독살설은 서인의 반정 명분을 정당화하는 데 상당히 중요한 구실을 하였다. 서인 편에서 볼 때 선조 독살설의 진위 여부는 중요한 것이 아니었다. 선조 독살설이 광범하게 유포된다는 그 사실 하나만으로도 서인은 쿠데타의 정당성을 주장할 수 있었다. 일반 백성들이야 어차피 구중 궁궐 깊숙한 곳에서 벌어지는 일들을 알 재간이 없었다. 반정 정권은 선조독살설이 정권 기반 강화에 도움이 된다고 해서 조직적으로 유포시켰고, 이것은 하나의 오도된 진실이 되어갔다.소현세자의 이상한 죽음아들을 의심하는 아버지인조가 세자를 의심하는 것을 눈치챈 일부 정치세력이 세자를 모함하고 나섰다. 인조의 후궁인 소용 조씨도 그 중 한 세력이었다. 그녀는 세자와 강빈이 인조를 내쫓고 즉위할 것이라고 참소했다. 세자에 대한 의심과 주위의 참소는 9년 만에 귀국한 세자의 지위를 불안하게 만들었다. 인조는 심지어 환국한 세자에 대한 신하들의 하례조차도 막을 정도로 그를 냉대했다.소현세자는 부왕의 이런 냉대에 상심했으나 그 원인을 분석할 만한 여유도 그에겐 없었다. 귀국한 지 두 달 만에 다시는 돌아올 수 없는 불귀의 객이 되었기 때문이다. 물설고 낯선 이역만리에서 9년간이나 꿋꿋하게 지내던 세자가 갑자기 세상을 떠날 이유는 없었다. 당연히 세자의 죽음에 대한 의혹이 뒤따랐다.의혹짙은 세자의 주검세자의 발병일은 인조 23년 4월23일이었다. 병명은 학질이었다. 세자는 발병 3일 후인 4월26일에 돌아올 수 없는 길을 떠났다. 『인조실록』은 그의 시신 상태를 이렇게 적었다.『세자는 병이 난 지 수일 만에 죽었는데 온몸이 전부 검은빛이었고 얼굴의 일곱 구멍에서는 모두 선혈이 흘러나오므로, 검은 멱목(소렴 때 시체의 얼굴을 싸는 검은 헝겊)으로 얼굴 반쪽만 덮어 놓았으나 곁에 있는 사람도 그 얼굴빛을 분간할 수 없어서 마치 약물에 중독돼 죽은 사람과 같았다』이는 소현세자가 독살당했다는 움직일 수 없는 증거다. 이 기록은 당시 염습에 참여했던 진원군 이세완의 아내가 시신의 이상한 상태를 보고 나와 말한 것을 토대로 적은 것이었다. 그녀는 인열왕후(소현세자의 어머니)의 서제(庶弟)였기 때문에 염습에 참여할 수 있었다. 소현세자가 독살당한 것이 분명하다면 소현세자를 죽인 인물은 누구일까?북벌군주 효종의 급서효종이 독대까지 해가며 북벌을 주장하자 송시열은 진퇴양난에 빠졌다. 효종이 산림에 정권을 넘긴 이유는 단 하나 북벌을 수행하기 위해서였는데, 송시열이 북벌 자체를 반대한다면 효종은 미련없이 그를 버릴 것이다. 송시열 등 산림이 정권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북벌을 강력히 추진해야 했다. 그러나 이들에게 북벌은 불가능한 망상이었다.이때 돌발사태가 발생했다. 효종이 급서한 것이다. 효종과 송시열이 독대한 지 두 달 만이었다. 효종의 사인은 사소한 것이었다. 머리 위에 난 종기 때문이었던 것이다. 종기가 독으로 번지자 어의 신가귀(申可貴)가 종기에 침을 놓고 고름을 조금 짜내니 피가 서너 말이나 솟아나왔다. 침이 혈맥을 건드린 것이었다.신가귀가 일부러 효종의 혈락을 건드렸는지는 알 수 없으나 당시 그는 수전증으로 손을 떠는 상태였다 한다. 수전증이 있는 의사가 옥체에 침을 놓는다는 것은 상식적으로 납득할 수 없는 일이 아닐 수 없다. 신가귀가 현종 즉위 후 교수형을 당함으로써 진실은 영원히 미궁에 빠졌다. 수전증의 신가귀가 효종에게 침을 놓은 것도, 침이 혈맥을 건드린 것도 우연일지 모른다. 그러나 우연으로만 돌리기에는 그 결과가 너무 컸기에 고의란 의구심이 이는 것이다.그리고 이후 조정에서 북벌을 주장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물론 송시열도 효종이 세상을 떠나자 더 이상 북벌은 주장하지 않았다. 효종의 시신과 함께 북벌도 땅속에 묻힌 것이다.예송논쟁 와중에 급서한 현종현종이 말하는 「두텁게 구는 누구」란 1차 예송 논쟁 때 1년설을 이끌었던 송시열을 뜻하는 것이었다. 현종은 서인들에 대한 치죄에 나섰다. 평소 원만했던 현종의 성품으로 보아 이례적인 분노였다. 현종은 드디어 예론을 잘못 이끈 책임을 물어 서인 영상 김수흥을 귀양보내기에 이른다. 귀양가는 서인의 자리는 허적, 윤휴 같은 남인들이 메웠다. 이때가 1674년이었으니 남인들은 1623년의 인조반정 이래 반세기 만에 정권을 잡는 길이었다. 분명 새로운 시대가 도래하고 있었다.그러나 이때 누구도 예견치 못한 일이 발생했다. 현종이 급서했던 것이다. 현종은 왜 갑자기 세상을 떠났던 것일까? 『현종실록』은 『현종의 기운이 몹시 지쳐 병이 시작되었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일종의 과로라는 뜻이다. 과로로 쇠약해진 몸에 열이 발생했고, 그런 지 열흘 만인 그해 8월 승하하고 말았던 것이다.의혹을 부추기는 점은 이때가 약방에서 시약청을 설치한 하루 만의 일이라는 점이다. 임금의 병이 조금 심하다 싶으면 서둘러 시약청을 설치하는 것이 관례였다. 시약청 설치 하루 만에 사망하는 일은 전례없는 일이었다. 당시 현종은 「임금에게 야박하게 구는」 서인들을 한창 몰아세우던 중이었으므로 의혹이 잇따랐다. 그런 의혹을 남긴 채 현종은 가고 15세의 어린 숙종이 뒤를 이었다.노론에 둘러싸인 소론 임금 경종경종의 사인(死因)이 두고두고 의혹의 대상이 되는 것은 임인옥사 수사보고서인 임인옥안에 세제 연잉군의 이름도 역적으로 등재돼 있었기 때문이다. 노론 사대신을 제거한 소론 강경파의 공세는 이제 세제를 향했다. 소론 강경파 김일경과 경종비 선의왕후 어씨는 세제를 제거하는 방법으로 경종에게 양자를 들여 그를 후사로 삼고 세제를 폐출하려 하였다. 그러나 이 방법은 성사되지 못했다.경종이 급서했기 때문이다. 경종의 급서는 효종·현종의 사망과는 비교도 되지 않을 파문을 불러왔다. 경종이 독살당했을지도 모른다는 정치적·의학적 정황 증거는 한둘이 아니었다. 정치적 정황 증거는 소론강경파와 경종비가 노론계인 연잉군 폐출을 계획하던 와중에 발생한 사건이란 점이었다.의학적 견지의 정황 증거도 많았다. 그 하나가 게장과 생감이었다. 경종의 식욕이 부진하자 노론계인 대비와 연잉군이 게장을 진어하고 곧바로 생감을 올렸다. 그런데 게장과 생감은 의가(醫家)에서 꺼리는 상극이었다고 『경종실록』은 적고 있다. 우연의 일치인지는 몰라도 바로 그날 밤부터 경종의 가슴이 조이듯이 아파왔던 것이다. 그 후 심각한 병세에 빠진 경종의 처방을 놓고 연잉군은 다시 어의와 다툰다. 연잉군이 인삼차를 올리려 하자 어의(御醫) 이공윤이 『자신이 쓴 강한 처방약과 인삼은 서로 상극』이라면서 절대로 써서는 안 된다고 말렸다. 그러나 연잉군은 어의 이공윤을 꾸짖어가며 인삼차를 연달아 세 번이나 올렸는데 그 직후 경종이 세상을 떴던 것이다.정치적으로는 양자 입적 문제, 의학적으로는 게장과 생감, 그리고 인삼차 진어문제 등이 경종 독살설을 진실로 믿게 만들었다. 더구나 소론과 노론이 격하게 대립하는 와중에 역안에 등재된 노론계 세제가 어의와 다투어가며 특별 처방을 고집한 것은 이해관계가 없는 제3자가 보아도 문제 있는 처신임에는 분명했다.
- 생활꿀팁생활사무실용 인터넷 설치가 궁금합니다. 답변좀 주세요A. 안녕하세요. 자드락비입니다.https://tongsinbogam.kr/default.asp통신보감이라는 인터넷 설치 대리점입니다.다른 사이트들 몇군데 찾아 봤는데요.이 사이트에만 사무실 인터넷 설치 안내가 되어 있었습니다.KT 인터넷은 KT Biz (사업장 / 사무실 최적화 인터넷)SK는 확인 안됨LG 인터넷은 LG소호인터넷(사업장 / 사무실 인터넷)상담원과 상담해보시면 될 것 같아요.
- 생활꿀팁생활중종반정과 인조반정은 왜 일어났나요?A. 안녕하세요. 자드락비입니다.1506년 조선 제10대 왕 연산군을 몰아내고 이복동생인 진성대군(晉城大君:중종)을 왕으로 추대한 사건.연산군은 무오사화와 갑자사화를 일으키면서 많은 선비들을 희생시켰고, 자신의 행동을 비판하는 세력을 축출하였으며, 경연의 폐지와 대간들의 직언을 금지하게 하는 신언패(愼言牌)의 실시, 성균관의 연락(宴樂) 장소화, 도성 밖 30리 내의 민가 철거, 언문 도서의 폐기, 사대부 부녀자의 농락, 사치와 방탕한 생활로 인한 정치의 파탄 등 수많은 악행과 폭정을 거듭하였다. 이에 훈구세력을 중심으로 연산군의 폐위 움직임이 일기 시작하였다. 성희안과 박원종 등은 연산군 폐위를 밀약하고 당시에 인망이 높던 이조판서 유순정(柳順汀), 연산군의 총애를 받고 있던 군자감부정(軍資監副正) 신윤무(申允武) 등의 호응을 얻어 왕이 장단(長湍) 석벽(石壁)에 유람하는 날을 기하여 거사 계획을 도모하였다. 그러나 연산군의 유람이 중지되면서 거사에 차질을 빚을 뻔 했으나 호남지역에서 연산군 폐위의 거사 격문이 서울에 나돌게 되면서 당초 계획을 강행하였다. 그리하여 1506년 9월 1일, 박원종 ·성희안 ·신윤무를 비롯해서 전 수원부사(前水原府使) 장정(張珽), 군기시첨정(軍器寺僉正) 박영문(朴永文), 사복시첨정(司僕寺僉正) 홍경주(洪景舟) 등이 무사를 훈련원에 규합하였다. 그들은 먼저 궁금세력(宮禁勢力)으로 권력을 쥐고 있던 임사홍(任士洪) ·신수근(愼守勤)과 그 아우 신수영(愼守英) 및 임사영(任士英) 등 연산군의 측근을 죽인 다음 궁궐을 에워싸고 옥에 갇혀 있던 자들을 풀어 종군하게 하였다.반정에 성공한 박원종 등은 군사를 몰아 텅 빈 경복궁에 들어가서 성종의 계비이며 진성대군의 어머니인 대비 윤씨의 허락을 받아 연산군을 폐하여 강화도에 안치하였다. 그리고 다음날인 9월 2일 진성대군을 맞아 경복궁 근정전에서 왕위에 오르니 그가 조선왕조 제11대 왕인 중종이다. 이 정변을 중종반정이라고 한다.1623년 이귀, 김유 등 서인 일파가 정변을 일으켜 광해군을 폐위시키고 인조를 왕위에 앉힌 사건.광해군은 임진왜란으로 황폐화된 국가체제를 회복하기 위해 노력했으며, 명(明)·청(淸) 교체기의 국제 현실에서 균형 있는 중립외교를 펼쳐 조선의 안보를 유지하려 했다. 대동법(大同法)을 시행하고, 군적(軍籍) 정비를 위해 호패법을 실시했으며, 《동의보감(東醫寶鑑)》 등의 서적을 간행하였다. 하지만 붕당 간의 대립이 심화된 상태에서 왕권의 기반은 매우 취약했다. 그래서 1613년 계축옥사(癸丑獄事)을 일으켜 왕위를 위협하던 영창대군(永昌大君) 세력을 제거하고, 1617년에는 인목대비(仁穆大妃)의 존호를 삭탈하고 경운궁(慶運宮)에 연금시키는 등 왕권을 둘러싼 갈등이 날카롭게 드러나기도 하였다. 그리고 이러한 일은 성리학적 윤리관에 기초하고 있던 사림 세력에게 패륜으로 비판을 받았으며, 중립외교로 후금(後金)과 평화관계를 유지한 것도 사림 세력에게는 명나라에 대한 명분과 의리를 저버린 행위로 비판되었다.계축옥사로 서인과 남인은 대부분 조정에서 쫓겨나고 대북파가 정권을 장악하였는데, 김유(金瑬)·이귀(李貴)·이괄(李适)·최명길(崔鳴吉) 등 서인 일파는 사림 세력의 이러한 불만을 이용하여 정변을 꾀했다. 1620년 광해군의 조카인 능양군(綾陽君)과 가까웠던 이서(李曙)·신경진(申景禛)·구굉(具宏)·구인후(具仁垕) 등이 정변을 모의하고 준비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김류(金瑬)·이귀(李貴)·최명길(崔鳴吉)·장유(張維)·심기원(沈器遠)·김자점(金自點) 등이 모의에 참여하면서 더욱 본격적으로 추진되었다. 이들은 1622년(광해군 14) 가을에 이귀가 평산부사(平山府使)로 임명된 것을 계기로 군사를 일으키려 했으나 사전에 발각되었다. 하지만 대간(臺諫)이 이귀를 잡아다 문초할 것을 청하였으나 심기원과 김자점이 후궁에 청탁을 넣어 사건은 흐지부지되었다. 그 뒤 반정 세력은 장단부사(長湍府使)로 있던 이서가 덕진(德津)에 산성을 쌓는 것을 감독하게 되자, 그곳에 군졸을 모아 훈련시키며 정변을 준비하였다.반정세력은 이듬해인 1623년 음력 3월 12일을 거사일로 정해 준비하였다. 그리고 훈련대장 이흥립(李興立)을 한편으로 끌어들이고, 장단부사 이서와 이천부사(伊川府使) 이중로(李重老) 등이 군졸을 이끌고 모여들었다. 하지만 이이반(李而攽)이 이 사실을 고변하여 정변 계획은 사전에 발각되었다. 그래서 정변이 예정되었던 3월 12일 저녁에 박승종(朴承宗) 등은 추국청(推鞫廳)을 설치해 고발된 모든 사람을 체포하려 했다. 하지만 후궁과 연회를 벌이던 광해군은 이를 재가하지 않았고, 붙잡았던 이흥립마저 풀어주었다. 결국 이이반의 고변으로 상황이 더욱 급박해진 반정세력은 예정대로 정변을 추진하기로 했다. 능양군은 친병(親兵)을 이끌고 연서역(延曙驛)으로 가서 이서 등과 합류하였는데, 무리가 1,400여명이 되었다. 이들은 삼경에 창의문(彰義門)의 빗장을 부수고 도성으로 들어가 곧바로 창덕궁(昌德宮)으로 갔다. 이흥립은 궁궐을 지키던 병사들을 움직이지 못하게 하여 내응하였고, 초관(哨官) 이항(李沆)이 돈화문(敦化門)을 열어 반정세력을 궐 안으로 끌어들이면서 정변은 손쉽게 성공하였다.출처1 : https://terms.naver.com/entry.naver?docId=1143750&cid=40942&categoryId=31778출처2 : https://terms.naver.com/entry.naver?docId=1136365&cid=40942&categoryId=31778
- 생활꿀팁생활국수는 누가 언제 처음 만들어서 먹었을까요?A. 안녕하세요. 자드락비입니다.옛날 메소포타미아 지방에서 최초로 국수를 만들어 먹었다고 추정한다.누들로드 등 면 관련 자료를 보면 인류 최고(最古) 문명 발상지와 가까운 중앙아시아 지역에서 가장 오래된 국수를 발굴하였다. 여기서 서쪽으로 퍼진 것은 최초의 국수와 가까운 형태인 파스타[4], 동쪽으로 퍼진 것은 쌀국수, 탕면 등 각기 독자 형태로 발전했다. 이후 아시아 쪽에서는 꽤 널리 퍼졌지만 유럽 쪽에서는 파스타를 제외하고는 그리 널리 보편화 하지 않았다.한국에서는 삼국 시대나 남북국 시대에 전래되어 먹었다고 추정되나 구체적인 문헌 증거는 없다. 일단 고려도경에 식사 접대를 할때 내온 음식 중 하나로 국수를 언급 하고 있어 늦어도 고려 시대부터 먹었던 것으로 보인다. 당시에 국수는 접대는 물론 제례에도 사용되었으며 사찰에서 만들어 팔기도 했다. 노걸대에 ‘우리 고려인은 습면(濕麵)을 먹는 습관이 있다’는 내용이 기록되어 있어 생각보다 자주 먹은 것으로 보인다.다만 한반도가 밀을 많이 재배할 수 있는 환경이 아니다보니 밀가루가 비싼지라 밀가루로 만든 국수는 성인식이나 혼인식같은 귀한 잔칫날에만 먹는 고급 음식이었다. 대신 메밀을 사용하거나 밀가루를 녹두나 전분과 섞는 방식으로 면을 만들었는데 이 중 메밀로 만든 국수 종류가 가장 많았다. 보통 한반도 북부에서는 메밀을 이용한 온면이나 냉면, 막국수가 발달했고 남부 지방은 밀가루를 이용한 칼국수가 발달했다. 현재까지 문헌에서 그 모양이 구체적으로 나오는 가장 오래된 국수는 녹말로 면을 만든 녹두나화이다.일본의 대표적인 국수라고 할 수 있는 우동은 헤이안 시대 때 중국에서 들어왔지만[5] 소바는 임진왜란 이후 조선에서 전래했다. 메밀국수가 전래하기 이전에는 메밀로 국수를 만든다는 개념이 없어서 그냥 메밀가루를 호화시켜 만든 소바가키(そばがき)라는 것을 먹었다.근대 시기에는 일본에서부터 건면 제조를 시작하였는데 이후 한국전쟁 때 미국에게서 받은 구호품으로 밀가루가 대량으로 풀린 이후 일반화되었다. 제2차 세계 대전이 끝나고 유럽의 농업이 정상화 할 때까지 오래 걸리리라고 여겨 밀가루를 대량으로 생산해 두었었는데 생각보다 빨리 정상화 하여 남아 돌던 밀가루가 한국까지 유입된 것이다. 이 때 원래대로라면 메밀로 만들던 냉면을 밀가루로 만들어 밀면이 탄생하는 등 새로운 면 음식이 생겼다. 쌀이 부족하니 비교적 싼 수입산 밀가루로 끼니를 대신할 수 있도록 혼분식 장려 운동을 시작하며 국수 문화를 다시 보편화 하였다.출처1 : https://namu.wiki/w/%EA%B5%AD%EC%88%98출처2 : https://foodman0312.tistory.com/62
- 생활꿀팁생활주식 시장외거래는 어떻게 하는건가요??개인도할수있는건가요A. 안녕하세요. 자드락비입니다.개인이 시간외거래 가능하긴 하지만 비추천합니다. 당하기 쉽습니다.출처 : https://dontbeafraid.tistory.com/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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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생활꿀팁생활다리미 없이 주름 펴는 방법이 있을까요?A. 안녕하세요. 자드락비입니다.제일 많이 쓰이는 방법으로는 물을 뿌려두는 것입니다.분무기로 물을 뿌리고 말려주시면 주름이 펴집니다.자연스럽게 말려주셔도 되고 선풍기나 헤어드라이기로 옷감이 상하지 않는 거리에서 말려주셔도 좋습니다.
- 생활꿀팁생활휴대폰 지문인식이 잘 안되는데 왜 그런가요? A. 안녕하세요. 자드락비입니다.대부분 지문인식 시스템이 지문을 잘 인식하지 못하는 때는 사용자의 지문이 건조하거나 혹은 이물질이 묻어서 그런 경우가 많습니다. 특히 손이 건조한 사람은 등록 시에도 잘 인식되지 않는 경우가 있습니다.지문인식이 잘 되지 않는 또 다른 이유로는 지문센서에 이물질이 묻어있는 경우가 있습니다.일반적으로 여러 사람이 계속해서 사용하므로 땀이나 지문자국 등의 이물질이 남아 지문센서가 사용자의 지문을 제대로 인식하지 못할 때가 있습니다.[출처] 간혹 잘 되지 않는 지문인식기. 그 이유는 ?|작성자 시큐리스https://blog.naver.com/cqris/222366482442※ 간헐적으로 지문 인식이 잘 안되거나, 반응 속도가 느려질 수 있습니다.아래대로 해보셨거나, 보호 필름 제거 후에도 동일한 현상이 발생되는 경우에는 가까운 서비스센터에 방문 후 점검받으시도록 안내 바랍니다. ① 보호필름이 깨끗하게 부착되지 않아 스마트폰 화면과 보호필름 사이에 이물 또는 공기가 유입되어 지문 인식이 잘되지 않거나, 반응이 느려질 수 있습니다 ② 부착된 보호필름의 지문 센서 위치가 오염 혹은 긁힘 등으로 지저분할 경우에 지문 인식이 잘되지 않거나, 반응이 느려질 수 있습니다. ③ 보호필름 제거 또는 새로 부착한 경우 지문센서 위의 환경이 변한 것이기 때문에 지문 인식이 잘되지 않을 수 있습니다. (지문 재등록 필요) ④ 손가락(지문)을 넓게 접촉시켜 주시기 바랍니다. 손끝으로 누를 경우 접촉 면적이 적어서 지문이 센서를 전부 덮지 못할 수 있습니다. 손가락 바닥으로 넓게 누르시기 바랍니다.출처 : https://www.samsungsvc.co.kr/solution/37619
- 생활꿀팁생활고등어낚시 시작하는데 채비법좀 알려주세요?A. 안녕하세요. 자드락비입니다.여름과 가을에 쉽게 잡을 수 있는 고등어와 전갱이(메가리) 낚시 채비법을 소개합니다.[출처] 아주 쉽게 잡는 고등어, 전갱이 낚시및 채비법|작성자 벵에셔틀콕https://blog.naver.com/fooljin/22251710969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