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에 독살된 왕이나 왕세자가 있었을까요?

2022. 06. 13. 19:52

안녕하세요? 고대 중국의 역대 왕조에 왕이나 왕세자가 독살되고 정권이 교체된 사례를 많이 봤습니다. 우리 조선시대에도 독살설이 도는 왕이나 왕세자가 있었는지 궁금합니다.


총 2개의 답변이 있어요.

안녕하세요. 자드락비입니다.

자료가 방대해 편집했습니다.

자세한 이야기를 알고 싶으시다면 출처를 참고해 주세요.

출처 : https://kin.naver.com/qna/detail.naver?d1id=11&dirId=111001&docId=59296814&qb=7KGw7ISgIOyZlSwg7JmV7IS47J6QIOuPheyCtA==&enc=utf8&section=kin.ext&rank=4&search_sort=0&spq=0

<독살설에 휘말린 조선 임금들>


독살설의 시초임금 인종

정사인 『인종실록』은 인종이 부왕의 죽음을 너무 슬퍼한 나머지 병을 얻어 사망했다고 적고 있다. 그러나 야사(野史)들은 어김없이 계모 문정왕후가 독살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그 중 한 내용을 소개하면 이렇다. 매번 인종을 핍박하던 대비 문정왕후 윤씨가 하루는 만면에 웃음을 띠면서 떡을 내놓았다. 인종은 계모 윤씨가 난생 처음으로 자신을 반겨주는 것에 감격해 그 떡을 먹었는데 그날부터 앓기 시작하더니 숨을 거두었다는 것이다.

사실 문정왕후에 의한 인종 독살설은 조선 사대부들 사이에서 광범위하게 받아들여졌다. 그 이유는 인종이 죽자마자 사화(士禍)가 재발했기 때문이다. 명종 즉위년에 발생한 을사사화(1545)가 그것이다. 조선 초·중기는 「훈구파」라는 구정치세력과 「사림파」라는 신정치세력의 정권을 둘러싼 각축이 심했다. 사화란 집권당인 훈구파가 야당인 사림파를 공격하는 정치 탄압을 말한다. 그런데 중종 때의 기묘사화 이후 거의 종결됐던 사화가 인종 사망 직후 다시 재연된 것이다. 인종이 승하하고 그의 시신이 채 식기도 전에 발생한 을사사화는 조선 사림파 사대부들로 하여금 문정왕후의 인종독살설을 사실로 믿게 했다.



광해군과 선조 독살설

즉위한 광해군이 자신을 폐출시키려던 소북을 정리하는 것은 당연한 수순. 광해군은 소북을 숙청하고 자신을 지지한 대북에게 정권을 넘겼다. 정권을 장악한 대북은 영창대군과 인목대비에 대한 강경책을 펴서 영창대군을 사사하고 인목대비를 폐위해 서궁에 가두었다. 이 와중에 나돈 소문이 선조독살설이었다. 소문의 진원지는 당연히 숙청당한 소북과 세를 잃은 서인들이었다.

하지만 이때만 해도 선조 독살설이 그리 광범하게 유포되지는 않았다. 선조가 죽기 전해부터 병색이 심각했다는 사실은 조선의 사대부 모두 알고 있던 일이기 때문이다. 선조독살설이 조선 전역에 유출되고 사실처럼 전해진 것은 광해군이 쫓겨난 이후였다.

정철의 실각 이후 정권에서 소외됐던 서인들은 광해군의 현실적인 대청외교와 인목대비 폐위 등을 반사대·반윤리적인 행위로 규정짓고 군사 쿠데타를 일으켜 정권을 장악한다. 인조반정이 그것이다. 인조 반정은 대북 정권에 의해 서궁에 유폐됐던 인목대비를 화려하게 복귀시키는 무대이기도 했다. 그녀는 그간 사랑하는 아들 영창대군이 비참하게 저세상으로 가는 비극을 맛보았다. 백년을 씻어도 씻기지 않을 한을 품은 그녀가 다시 대비로 복위한 것이다. 인조반정의 주역들이 반정을 추인해 달라고 요구하자 인목대비는 광해군 부자를 죽이라고 요구한다.

『역괴(逆魁:광해군)는 부왕을 시해하고 형을 죽였으며, 부왕의 첩을 간통하고 그 서모를 죽였고, 그 적모(嫡母:인목대비)를 유폐하여 온갖 악행을 다하였다』

말하자면 광해군이 선조를 독살했다는 주장이었다. 그러나 이 말을 들은 민성징이 즉각 『지금 하교하신 사실은 외간에서 일찍이 듣지 못한 일입니다. 더욱이 선왕을 시해했다는 말은 더욱 듣지 못한 사실입니다』라고 되물은 데서 알 수 있듯이 별다른 근거가 있는 것은 아니었다. 이는 단지 아들을 잃은 여인이 한풀이를 위해 지어낸 말일 뿐이다.

하지만 대비의 입에서 직접 나온 선조 독살설은 서인의 반정 명분을 정당화하는 데 상당히 중요한 구실을 하였다. 서인 편에서 볼 때 선조 독살설의 진위 여부는 중요한 것이 아니었다. 선조 독살설이 광범하게 유포된다는 그 사실 하나만으로도 서인은 쿠데타의 정당성을 주장할 수 있었다. 일반 백성들이야 어차피 구중 궁궐 깊숙한 곳에서 벌어지는 일들을 알 재간이 없었다. 반정 정권은 선조독살설이 정권 기반 강화에 도움이 된다고 해서 조직적으로 유포시켰고, 이것은 하나의 오도된 진실이 되어갔다.


소현세자의 이상한 죽음

아들을 의심하는 아버지
인조가 세자를 의심하는 것을 눈치챈 일부 정치세력이 세자를 모함하고 나섰다. 인조의 후궁인 소용 조씨도 그 중 한 세력이었다. 그녀는 세자와 강빈이 인조를 내쫓고 즉위할 것이라고 참소했다. 세자에 대한 의심과 주위의 참소는 9년 만에 귀국한 세자의 지위를 불안하게 만들었다. 인조는 심지어 환국한 세자에 대한 신하들의 하례조차도 막을 정도로 그를 냉대했다.

소현세자는 부왕의 이런 냉대에 상심했으나 그 원인을 분석할 만한 여유도 그에겐 없었다. 귀국한 지 두 달 만에 다시는 돌아올 수 없는 불귀의 객이 되었기 때문이다. 물설고 낯선 이역만리에서 9년간이나 꿋꿋하게 지내던 세자가 갑자기 세상을 떠날 이유는 없었다. 당연히 세자의 죽음에 대한 의혹이 뒤따랐다.

의혹짙은 세자의 주검

세자의 발병일은 인조 23년 4월23일이었다. 병명은 학질이었다. 세자는 발병 3일 후인 4월26일에 돌아올 수 없는 길을 떠났다. 『인조실록』은 그의 시신 상태를 이렇게 적었다.
『세자는 병이 난 지 수일 만에 죽었는데 온몸이 전부 검은빛이었고 얼굴의 일곱 구멍에서는 모두 선혈이 흘러나오므로, 검은 멱목(소렴 때 시체의 얼굴을 싸는 검은 헝겊)으로 얼굴 반쪽만 덮어 놓았으나 곁에 있는 사람도 그 얼굴빛을 분간할 수 없어서 마치 약물에 중독돼 죽은 사람과 같았다』

이는 소현세자가 독살당했다는 움직일 수 없는 증거다. 이 기록은 당시 염습에 참여했던 진원군 이세완의 아내가 시신의 이상한 상태를 보고 나와 말한 것을 토대로 적은 것이었다. 그녀는 인열왕후(소현세자의 어머니)의 서제(庶弟)였기 때문에 염습에 참여할 수 있었다. 소현세자가 독살당한 것이 분명하다면 소현세자를 죽인 인물은 누구일까?



북벌군주 효종의 급서


효종이 독대까지 해가며 북벌을 주장하자 송시열은 진퇴양난에 빠졌다. 효종이 산림에 정권을 넘긴 이유는 단 하나 북벌을 수행하기 위해서였는데, 송시열이 북벌 자체를 반대한다면 효종은 미련없이 그를 버릴 것이다. 송시열 등 산림이 정권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북벌을 강력히 추진해야 했다. 그러나 이들에게 북벌은 불가능한 망상이었다.

이때 돌발사태가 발생했다. 효종이 급서한 것이다. 효종과 송시열이 독대한 지 두 달 만이었다. 효종의 사인은 사소한 것이었다. 머리 위에 난 종기 때문이었던 것이다. 종기가 독으로 번지자 어의 신가귀(申可貴)가 종기에 침을 놓고 고름을 조금 짜내니 피가 서너 말이나 솟아나왔다. 침이 혈맥을 건드린 것이었다.

신가귀가 일부러 효종의 혈락을 건드렸는지는 알 수 없으나 당시 그는 수전증으로 손을 떠는 상태였다 한다. 수전증이 있는 의사가 옥체에 침을 놓는다는 것은 상식적으로 납득할 수 없는 일이 아닐 수 없다. 신가귀가 현종 즉위 후 교수형을 당함으로써 진실은 영원히 미궁에 빠졌다. 수전증의 신가귀가 효종에게 침을 놓은 것도, 침이 혈맥을 건드린 것도 우연일지 모른다. 그러나 우연으로만 돌리기에는 그 결과가 너무 컸기에 고의란 의구심이 이는 것이다.

그리고 이후 조정에서 북벌을 주장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물론 송시열도 효종이 세상을 떠나자 더 이상 북벌은 주장하지 않았다. 효종의 시신과 함께 북벌도 땅속에 묻힌 것이다.


예송논쟁 와중에 급서한 현종

현종이 말하는 「두텁게 구는 누구」란 1차 예송 논쟁 때 1년설을 이끌었던 송시열을 뜻하는 것이었다. 현종은 서인들에 대한 치죄에 나섰다. 평소 원만했던 현종의 성품으로 보아 이례적인 분노였다. 현종은 드디어 예론을 잘못 이끈 책임을 물어 서인 영상 김수흥을 귀양보내기에 이른다. 귀양가는 서인의 자리는 허적, 윤휴 같은 남인들이 메웠다. 이때가 1674년이었으니 남인들은 1623년의 인조반정 이래 반세기 만에 정권을 잡는 길이었다. 분명 새로운 시대가 도래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때 누구도 예견치 못한 일이 발생했다. 현종이 급서했던 것이다. 현종은 왜 갑자기 세상을 떠났던 것일까? 『현종실록』은 『현종의 기운이 몹시 지쳐 병이 시작되었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일종의 과로라는 뜻이다. 과로로 쇠약해진 몸에 열이 발생했고, 그런 지 열흘 만인 그해 8월 승하하고 말았던 것이다.

의혹을 부추기는 점은 이때가 약방에서 시약청을 설치한 하루 만의 일이라는 점이다. 임금의 병이 조금 심하다 싶으면 서둘러 시약청을 설치하는 것이 관례였다. 시약청 설치 하루 만에 사망하는 일은 전례없는 일이었다. 당시 현종은 「임금에게 야박하게 구는」 서인들을 한창 몰아세우던 중이었으므로 의혹이 잇따랐다. 그런 의혹을 남긴 채 현종은 가고 15세의 어린 숙종이 뒤를 이었다.


노론에 둘러싸인 소론 임금 경종

경종의 사인(死因)이 두고두고 의혹의 대상이 되는 것은 임인옥사 수사보고서인 임인옥안에 세제 연잉군의 이름도 역적으로 등재돼 있었기 때문이다. 노론 사대신을 제거한 소론 강경파의 공세는 이제 세제를 향했다. 소론 강경파 김일경과 경종비 선의왕후 어씨는 세제를 제거하는 방법으로 경종에게 양자를 들여 그를 후사로 삼고 세제를 폐출하려 하였다. 그러나 이 방법은 성사되지 못했다.
경종이 급서했기 때문이다. 경종의 급서는 효종·현종의 사망과는 비교도 되지 않을 파문을 불러왔다. 경종이 독살당했을지도 모른다는 정치적·의학적 정황 증거는 한둘이 아니었다. 정치적 정황 증거는 소론강경파와 경종비가 노론계인 연잉군 폐출을 계획하던 와중에 발생한 사건이란 점이었다.

의학적 견지의 정황 증거도 많았다. 그 하나가 게장과 생감이었다. 경종의 식욕이 부진하자 노론계인 대비와 연잉군이 게장을 진어하고 곧바로 생감을 올렸다. 그런데 게장과 생감은 의가(醫家)에서 꺼리는 상극이었다고 『경종실록』은 적고 있다. 우연의 일치인지는 몰라도 바로 그날 밤부터 경종의 가슴이 조이듯이 아파왔던 것이다. 그 후 심각한 병세에 빠진 경종의 처방을 놓고 연잉군은 다시 어의와 다툰다. 연잉군이 인삼차를 올리려 하자 어의(御醫) 이공윤이 『자신이 쓴 강한 처방약과 인삼은 서로 상극』이라면서 절대로 써서는 안 된다고 말렸다. 그러나 연잉군은 어의 이공윤을 꾸짖어가며 인삼차를 연달아 세 번이나 올렸는데 그 직후 경종이 세상을 떴던 것이다.

정치적으로는 양자 입적 문제, 의학적으로는 게장과 생감, 그리고 인삼차 진어문제 등이 경종 독살설을 진실로 믿게 만들었다. 더구나 소론과 노론이 격하게 대립하는 와중에 역안에 등재된 노론계 세제가 어의와 다투어가며 특별 처방을 고집한 것은 이해관계가 없는 제3자가 보아도 문제 있는 처신임에는 분명했다.

2022. 06. 13. 22: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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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안녕하세요. 경제&금융 분야, 재무설계 분야, 인문&예술(한국사) 분야 전문가, 지식iN '절대신 등급' 테스티아입니다.

    * 네, 있었습니다. 당장 조선 초기 문종과 조선 후기 경종과 정조 등이 독살설에 휘말려있는 왕들이며, 세자 중에서도 인조의 세자였던 소현세자 왕, 영조의 세자였던 효장세자 행이 독살되었다는 설이 있습니다.

    2023. 01. 12. 21: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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