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라의 여왕인 선덕여왕, 진덕여왕, 진성여왕에 대한 평가는 어떠한가요?
우리나라 역사에서 여왕은 신라의 선덕여왕, 진덕여왕, 진성여왕 3명뿐이라고 알고 있는데요. 이 신라 여왕 3명에 대한 평가는 어떠한가요?
안녕하세요. 황정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선덕여왕은 우리나라 역사상 최초의 여왕으로, 김유신과 김춘추 등의 지지세력을 활용해 위기를 극복하고, 사상적으로는 불교의 힘을 이용함으로써 자신의 권위를 세운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진덕여왕은 당나라의 연호를 사용하여 왕위 권위를 보여준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친당 정책은 진덕 여왕이 아닌 김춘추가 주도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진성여왕은 한국사의 세 번째이자 마지막 여왕으로, 신라 말의 혼란기가본격적으로 시작된 시기의 왕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소행이 좋지 못하고 음란하기 그지없었다는 평가가 있으나, 이는 신라의 문제점이 봇물 터지듯이 터진 것으로 보는 시각이 더 많습니다.
안녕하세요. 윤지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소개와 평가입니다.
선덕여왕은 우리나라 역사상 최초의 여왕으로, 632년 정월에 진평왕이 죽자 뒤를 이어 왕위에 올랐습니다. 여왕이라는 이유로 국내 정치세력의 저항과 주변국의 압박을 받았지만, 김유신과 김춘추 등의 지지세력을 활용해 위기를 극복하고, 사상적으로는 불교의 힘을 이용함으로써 자신의 권위를 세웠다고평가받고있습니다.진덕여왕은 신라의 제28대 왕으로, 진평의 모제 국반갈문왕의 딸입니다. 연호는 태화이며,647년∼654년 3월까지 재위했습니다. 진성여왕은 888년∼897년까지 재위했던 신라의 51대왕으로 경문왕과 문의왕후 김씨의 딸이자 헌강왕과 정강왕의 동생입니다.
안녕하세요. 강요셉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우리나라의 역사상 세 명의 여왕이 있었는데 여성이 왕이 될 수 있었던 때는 신라의 골품제라는 신분제도가 있어 가능했던 일이지만 선덕여왕과 진덕여왕은 어느 왕의 견주어도 손색이 없을만큼 통치력을 발휘해 삼국통일부터 신라의 기반을 공고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습니다 그러나 마지막 여왕인 진성여왕은 무능하고 음탕하여 신라의 멸망을 재촉했다고 알려졌습니다 신라 멸망의 원흉으로 지목 받고 있지만 이미 신라말 위기의 시기에 즉위한 진성은 신라 역사를 정리하는 삼대목을 집정케 하고 화랑세력과 중앙에 통치력을 강화하여 국가 위기를 극복하려 노력을 했습니다 그러나 오히려 그것이 미소년들과 은밀히 내통하여 국정을 망쳤다는 비난을 받아 왕임에도 불구하고 음탕한 여성이란 오명을 받았고 어쩌면 그 오명에 의해 통치기간의 모든 업적이 정당한 평가를 받지 못했을는지도 모릅니다 진성은 모든 수습이 실패하자 자신의 부덕함을 내세워 스스로 후회자에게 양해했는데 이러한 과정은 여왕이었기 때문에 취할 수 있었던 리더이자 동시에 한계였다고 볼 수 있을 것입니다 물론 진성 여왕의 지도력 정치가로서의 자질의 문제가 있었을 수도 있지만 그녀가 통치를 잘못해서 신라가 멸망에 이르게 되었다고 평가하는 것은 타당성이 없습니다 그녀의 잘못이라기보다는 장기간의 평화를 누리면서 나태해진 신라 귀족들과 그 이전에 여러 왕의 잘못이 더 큽니다 진덕 여왕은 삼국시대 신라의 제28대 왕인데 재위 기간은 647년에서 654년이며 신라시대 3인의 여왕 중 한 사람으로서 선덕여왕의 유언에 따라 즉위를 했고 즉위하면서 비담의 난을 진압했고 고구려와 백제의 침략이 빈번해지자 김유신을 중심으로 방어하는 남편 김춘추를 당나라에 보내 군사적 지원을 요청했고 신라 문제의 소극적이던 당나라로부터 군사적 지원을 허락받고 긴밀한 외교관들을 구축했습니다. 의관을 중국식으로 바꿨고 연호도 중국의 연호를 사용하는 등 한화 정책을 폈으며 집사부 설치 행정관부의 체계화로 중앙집권적 귀족 관료 체제를 완성하였습니다 선덕여왕은 신라의 제27대 왕인데 재위 기간은 632년에서 647년이며 진평왕의 장녀로 진평왕의 아들이 없이 죽자 화백 회의에서 왕으로 추대했고 재위 기간 또한 고구려 백제의 침략이 빈번해지자 당과 연합하여 국가를 보전하려 했고 백제의 침략으로 낙동강 방면의 거점인 대야성이 함락되자 당에 사신을 보내 구원을 요청하기도 했지요 당에 유학 중이던 자장을 귀국시켜 불교 사상을 왕권 강화책으로 적극 활용했고 호국 중심 사찰인 황룡사의 왕권의 상징물로 9층 목탑을 건립했지요 비담 등 진골 귀족들의 반란 와중에 재위 16년 만에 죽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