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시대 왕들은 체력단련을 어떤식으로 했었나요?
사극 드라마나 영화에 보면 극중에 등장하는 왕들이 가끔 칼도 잘쓰고 싸움도 잘하는 모습으로 그려지기도 합니다. 모두 허구가 가미되어있긴 하지만 무예실력도 출중한 왕들도 있었다고 들었습니다. 예전이야 지금처럼 헬스장이 있지는 않았겠지만 혹 왕들이 따로 운동을 하는 장소 또는 체력단련을 하는 특정한 장소가 있었는지 궁금합니다.
안녕하세요. 이주연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조선시대 군사훈련
조선 시대 왕은 매년 농한기인 봄과 초겨울에 전국에서 군사들을 동원하여 직접 군사 훈련을 실시했다.
이 훈련을 대열(大閱)과 강무(講武)라 한다.
대열은 전국에서 징발한 군사들을 대상으로 전투 대형인 진법훈련을 실시하고 이를 국왕이 친림하여 사열하는 것이다.
오행사상에 입각한 조선시대의 진법은 다섯 부대로 구성되었다.
중앙에 사령부가 위치하고, 전후좌우에 네 부대가 배치되어 중앙을 둘러싸는 형태이다. 왕이 전투에 참여하면 당연히 중앙 사령부가 되었다.
유사시에는 중앙 사령부를 포함한 다섯 부대가 전황에 따라 수시로 대형을 바꾸어야 그 위력이 발휘되었다. 적의 공격이 감당할수 없을 정도로 급박하면 후퇴하고, 반대로 적이 약점을 보이면 곧바로 돌격해 들어가야 했기에 전 병사들이 일사분란하게 움직여야 승리할 수 있었다.
따라서 진법 훈련이란 전쟁 상황을 가정하고 중앙 사령부의 명령에 따라 전후좌우의 부대 병사들이 일사분란하게 움직이도록 반복,연습하는 것이다.
진중에서 명령을 전달할 때는 시청각을 이용하거나 직접 전령을 보냈지만, 전투 중이라는 급박한 상황에서 전령이 왕복하려면 시간이 많이 걸렸으므로 진법 훈련에서는 주로 깃발과 북, 징을 이용하여 지휘, 통제하였다.
깃발은 시각을, 북과 징은 청각을 이용한 것이다.
왕이 직접 참석하는 대열에는 적게는 1만명에서 많게는 10만 명 내외의 병사들이 동원되었다.
10만 명이 징발되면, 약 3만 명은 직접 대열에 참가하고 나머지 군사들은 보급, 대기 등을 맡았다.
조선시대의 대열은 1만 명에서 3만명 정도의 병사들이 국왕 앞에서 진법을 시범을 보이는 대규모 행사였기에 성 밖의 넓은 평지에서 시행되었고, 어느 때는 한양을 벋어나 경기도 이외의 지역에서 대열을 하기도 했다. 반면 나라에 흉년이나 들거나 전염병이 돌면 대열을 중지하기도 했다.
대열은 세종, 문종, 세도대에 자세하게 정비되었고, 특비 병법에 관심이 많았단 문종과 세조대에 진법과 대열에 관한 세부 사랑이 정해져 조선시대의 기준이 되었다.
이에 따르면 대열은 다음과 같이 시행되었다.
대열을 하기로 결정되면, 중앙과 지방에서 대대적으로 병사들을 징집하엿다.
징발하는 병사의 수, 대열 장소, 날짜는 미리 결정하였고 대열 장소의 동서남북에는 각각 군문을 만들었다. 대열을 시행하는 당일 새벽에 병사들은 완전 무장한 상태로 미리 집합하여 대형을 갖추었다.
대열은 전쟁 사항을 가정하여 아군과 적군의 두 부분으로 나뉘는데 보통 청군과 백군으로 구별했다.
아군과 적군은 다 같이 오행에 따른 진형을 갖추고 예행 연습을 하였다.
3만 명이 대열에 참가하면 청군과 백군은 각각 1만 5천명이 되고 다시 3천명의 병력으로 구성된 5개의 부대로 나눈다.
중앙 사령부에서는 깃발을 이용하여 각 부대를 지휘하였고, 사령부의 직속 부대는 황룡기, 동쪽은 청룡기, 서쪽은 백호기, 남쪽은 주작기, 북쪽은 현무기를 이용했다.
각각의 부대에게 명령을 내릴 때도 해당 깃발을 움직였다. 예컨대 정방인 남쪽에 위치한 부대를 돌격시키려면 주작기를 앞으로 반대로 후퇴시킬 때는 뒤로 향하게 했다.
깃발 외에도 북과 징이 명령을 전달하는 도구로 쓰였다. 소 가죽이나 나무로 만든 북은 양을 상징하므로 북을 치는 것은 적진을 향해 돌격하라는 의미였다.
돌격 속도를 높일 때는 북을 급하게 치고, 속도를 줄일 때는 천천히 쳤다. 반대로 쇠로 만든 징은 음이므로 정지 또는 후퇴를 뜻했다. 징을 한 번 울리면 공격을 늦추고, 두 번이면 전투를 중지하고, 세 번이면 뒤로 돌아서고, 네 번이면 후퇴해야 했다.
깃발을 움직이거나 북과 징을 칠 때는 병사들을 주목시키기 위해 먼저 '뿌~우'하는 소리의 각(角)을 불었다. 예컨대 동쪽의 부대를 전진시키려면, 먼저 각을 불고 이어서 청룡기를 앞으로 향하게 하거나 북을 쳤다.
중앙 사령부는 각과 깃발, 북과 징을 이용하여 1만 5천 명의 군사들을 질서정연하게 움직였고, 엄격한 군율과 훈련으로 단련된 군사들은이라면 수만 명이라도 한 명을 부르듯이 할 수 있었다.
강적을 만나도 명령에 따라 적진을 향해 돌격하도록 병사들을 훈련시키는 것이 바로 조선시대 대열의 목적이었다.
대열은 왕이 궁궐을 출발하여 대열 장소의 북쪽에 도착해 자리를 잡으면서 시작되었다.
중앙 사령부에서 깃발을 눕히면 군사들은 모두 왕을 향해 네 번의 절을 올렸고, 깃발을 들면 보병은 일어나고 기병은 말을 탔다.
진지의 형태를 가동하기 전에 먼저 청군과 백군의 사령광이 휘하 지휘관들을 소집하여 훈시했다.
이 훈시는 각 부대 병사들에게도 전달되었다. 실제로 대열에서 규율을 위반하는 병사들은 모두 군법으로 처리되었는데, 전진 또는 후퇴 명령을 받고도 이에 따르지 않으면 목을 베도록 했다.
군율이 해이해지면 전쟁에 임할 수 없기 때문이다.
훈시 이후에는 곧바로 대열에 들어갔는데, 먼저 기본훈련이 되어 있는지를 시험하기 위해 깃발과 북, 징을 이용하여 병사들에게 전지과 후퇴를 명령해다. 이어서 청군과 백군으로 나누어 다서 차례씩 서로 번갈아 공격과 방어를 하게 했다.
칼과 방패를 가진 병사 50명이 나와 공격하는 쪽에서 먼저 돌격을 개시하면, 방어하는 쪽에서 재빨리 진형을 갖추고 응전했다.
마지막은 청군과 백군 전 부대가 달려가면서 공격과 방어를 했는데. 이는 전면적인 백병전의 상황이었다. 이 때 실감나도록 화살촉을 뺀 활을 쏘거나 날을 헝겊으로 묶은 창이나 칼로 서로를 베기도 했다.
수만명의 기병과 보병이 함성을 지르면서 접전하는 광경은 실제 전쟁을 방불케 했다.
대열이 끝나면 왕은 수고한 대소 신료나 훈련을 잘한 병사들을 선발하여 상을 주었다. 또 병사들의 사기를 드높이기 위해 무과를 시행하기도 했다.
강무는 사냥을 통한 실전 연습이었다.
대열은 1년에 한 번만 했지만, 강무는 봄과 초겨울에 두 번을 했다.
이 훈련은 직접 활을 쏘면서 사냥을 하기 때무에 대열보다 더 실전에 가까웠으며 하나의 산 전체를 둘러싸야 하는 강무에 동원되는 병사의 수도 대열에 못지 않게 많았다.
강무 때는 왕도 직접 말을 타고 대기하였다.
강무가 시작되면 말을 탄 병사들이 함성을 지르면서 짐승을 몰아 왕이 있는 곳으로 가게 하였고, 몰아오는 짐승은 적어도 세 마리 이상이어야 했다.
이렇게 세 차례를 몰면, 세 번째에 비로소 왕이 활을 쏘아 사냥을 하였고, 이후에는 왕자와 공신들, 장수들이 활을 쏘았다.
사냥한 짐승은 관통한 화살의 방향에 따라 상, 중, 하로 나뉘었다. 왼쪽 어깨 또는 넓적다리 앞에서 반대 방향으로 관통한 것이 상, 오른쪽 귀 부근으로 관통한 것이 중, 왼쪽 넓적다리에서 어깨 방향으로 관통한 것이 하였다.
이 중에서 상품은 종묘에 올리고 중품은 빈객에게 접대했으며, 하품은 주방에 내렸다.
대열과 강무는 조선 후기로 가면서 점차 줄어들었는데, 이는 문치주의의 결과였다.
주로 가뭄 또는 홍수를 명분으로 대렬과 강무를 실시하지 않았으나 실제는 군사 훈련보다 심성 수련을 통해 정치를 잘하는 것이 더 필요하다는 유교적 사고 방식 때문이었다.
그러나 군사 훈련의 필요성 그 자체가 무시된 것은 아니었다.
왕이 직접 참여하는 군사 훈련에는 대열과 강무 외에도 성조(城操)라는 것이 있었다. 성조는 전쟁 때 왕이 도성이나 피난지에서 적을 맞아 싸우는 상황을 가정한 군사 훈련으로 한성이나 행차한 지역에서 행하였다.
성에서 시행하는 군사 훈련이었으므로 의미상 수군(水軍)이 행하는 수조(水操)에 대비된다.
왕이 성조에 참여할 때는 성의 사령부인 장대(將臺)에서 적의 공격을 가정하고 공격과 수비를 지휘하였다. 장대는 화성의 서장대나 남한산성의 수어장대처럼 성의 사방이 한눈에 보이는 곳에 위치했다.
성조의 지휘수단도 북, 꽹과리. 깃발 등이었는데, 야간 군사 훈련인 야조(夜操)를 할 때는 횃불을 밝히고 했으므로 장엄한 광경을 연출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