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훈훈한두꺼비124
훈훈한두꺼비124

이완용의 말로는 어땠는지 궁금합니다.

이완용하면 매국 행각 외에 후손들에게 남겨진 유산에 관한 부분들에 대한 사실만 들었던 것 같은데 이완용은 어떻게 죽었는지 그런 내용은 안 들었던 것 같아요. 이완용의 말로는 어땠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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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8개의 답변이 있어요!
    • 순금킹 시계퀸
      순금킹 시계퀸

      안녕하세요. 박남근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이완용의 장례는 고종의 국장이래

      최대의 성대함으로 치러졌다고 합니다


      조문객을 태운 인력거의 행렬은 옥인동에서 광화문에 이르기까지 십 리에 걸쳐 이어졌고 구경하는 인파는 인산인해를 이루었다고 하니까. 일제는 매국노의 장례 일정을 기록영화로 담아 친일을 선전하기 위한 자료로 삼았습니다. 일왕의 휘호가 적힌 만장을 앞세우고 그의 후손들이 뒤를 따랐는데 그들 모두 일제로부터 받은 각종 훈장을 두르고 있었다고 합니다.

      더럽고 구역질이 나는데 그시대는 참 아이러니 합니다


    • 안녕하세요. 이예슬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재산이 점점 증식했던 경제적 사정과는 달리 이완용의 건강은 그리 좋지 못했다고 알려져있습니다.

      암살시도를 당하면서 폐를 다쳤고 당시 대수술을 거쳐 살아났지만 죽을때까지 폐렴으로 고생했다고 알려져있습니다.

      https://www.hani.co.kr/arti/society/society_general/861914.html

    • 안녕하세요. 이선홍 인문·예술 전문가입니다.

      이완용은 1926년 2월 11일(만 67세)에 폐렴으로 죽었습니다. 갑작스런 병으로 인한 죽음으로 그가 생전에 받아 마땅한 벌을 단 하나도 받지 않고 편하게 죽었다는 이야기가 있을 정도입니다.

    • 안녕하세요. 이진광 인문·예술 전문가입니다.이완용은 일본의 보호 아래 당시로서는 최고 수준의 치료와 대수술을 받았다. 이완용이 받은 수술은 한국의 흉부외과 수술 1호이기도 했다. 그를 수술한 의사는 “외과 기술이 10년만 늦었어도 이완용은 이날 죽었다”고 말하기도 했다. 비록 이완용은 가까스로 목숨은 건졌지만 죽는 날까지 폐렴으로 고통을 받아야 했다. 이날 입은 상처는 이로부터 17년 뒤인 1926년, 이완용의 죽음에 원인이 되기도 했다. 일본에서 호화스러운 장례식을 맞이했다니 유감입니다

    • 친일파 아이콘인 이완용의 말로는 대략 다음과 같습니다.

      그가 처음부터 친일파가 된 것은 아닙니다.

      대세의 흐름에 민감하게 움직인 사람입니다.

      친미파 개혁관료에서 친러파로, 친일파로 대세의 흐름에 민감하게 반응한 인물입니다.

      1905년 을사오적의 거두인 이완용은 을사늑약을 체결시키고

      일본은 외교권을 빼앗고, 또 고종을 강제 퇴위시키고 한일신협약을 채결하였습니다.

      이런 안타까운 소식을 들은 이재명은 미국에서 귀국하여 이완용을 제거하려 하였습니다.

      1909년 12월 23일 명동성당에서 벨기에 국왕의 추도식에 이완용이 참석한다는 소식을 듣고

      변장하고 기다리다가 인력거를 타고 갈 때 이재명은 비수를 들고 달려들어 살해하려 합니다.

      가슴을 찌르고, 어깨, 허리 등 3곳을 찔러 깊은 상처를 입혔습니다.

      이재명은 일본 순사에게 잡히고,

      이완용은 대한의원으로 후송되어 일본인 의사들의 외과 수술로 겨우 목숨을 건졌습니다.

      살아남은 이완용은 황제의 인장을 위조하여 강제병합조약을 체결하고

      백작에서 후작에 올라 일신의 부귀와 영화를 누리다가 1926년 69세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안녕하세요. 이병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 안녕하세요. 이주연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이완용은 명동성당 앞에서 이재명(李在明)의 칼을 맞고 오른쪽 폐를 관통당했지만 목숨을 건졌습니다.

      1910년 8월 29일 총리대신으로 정부 전권위원이 되어 일본과 한일병합조약을 체결하였습니다.

      조선통감부는 조선총독부로 명칭이 변경되고 데라우치가 초대총독이 되었습니다.

      이완용은 그 공으로 일본정부에 의해 백작이 되었습니다.

      조선총독부 중추원 부의장이 되었고 1911년 조선귀족원 부회장을 역임하였습니다.

      1920년 매일신보에 경고문을 발표하여 3.1운동을 비판한 공로로 1920년 후작에 올랐으며 그의 아들도 일본으로 부터 남작의 지위를 받았습니다.

      1926년 69세를 일기로 사망했습니다.

    • 안녕하세요. 이완용은 조선시대 말기의 학자이며, 동학사상을 중심으로 한 동학운동의 대표적 인물 중 한 사람입니다. 그러나 이완용은 그의 이론과 사상이 현 정권에 반하는 것으로 인해 매국적인 행동을 저질러 결국 처형되었습니다.

      이완용은 청나라에 대한 배신죄로 불이익을 받고, 흥선대원군의 반정부 쿠데타 참여와 경성의 동학반란 등의 매국행위를 일으켜 결국 1864년 처형되었습니다.

      이완용은 자신의 죽음을 인정하면서도 동학사상과 이를 위한 희생의 의미를 강조하며, "나의 몸은 죽어도, 나의 사상은 영원히 이어질 것이다"라는 유명한 명언을 남겼습니다. 이완용의 명언은 그의 죽음 이후에도 동학사상을 계승하는 데 큰 영향을 미쳤으며, 지금까지도 많은 사람들에게 인기 있는 명언 중 하나입니다.

    • 안녕하세요. 최은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이완용은 국권 피탈 이후 일본으로부터 훈1등 백작 작위를 받았고, 그 뒤에도 사망할때까지 조선인들을 일제가 노예화하여 착취하는 작업에 아이디어를 제시하거나 기존에 있던 조선인 착취를 위한 나쁜 제도를 더 확대하도록 자문하는 등 착취와 핍박의 행위를 주안으로 하는 삶을 계속했습니다.

      1919녀 3.1운동이 일어나자 이완용은 경고문을 세차례 발표했고 다음 해 후작으로 승급하였으며 1921년 창덕궁을 일본 황실 별궁으로 만들자고 본인 스스로 2번이나 건의했다 무산되기도했습니다.

      그 이후 조용히 살았는데 1925년 12월 16일에는 자던 도중 식객 노릇하던 조카를 푸대접한것때문에 조카한테 침실에서 습격당해 폭행당하기도 했고, 일제 강점기 당시 일본에 저항하는 내용의 화장실 낙서 중 상당수가 이완용을 거명하며 모욕하는 내용이었습니다.

      1926년 2월 11일 만 67세의 나이에 폐렴에 걸려 그가 생전에 받아야 할 합당한 벌을 단 하나도 받지 않고 편히 죽었습니다.

      사후 일본인과 한국인으로 이루어진 50명의 장례위원들이 참석하고 조선총독부 중추원 부의장 정2위대훈위 후작 이공지구란 휘황찬란한 깃발을 들고 장례가 치뤄지고 그의 장례 행렬은 그의 3000평짜리 집 옥인동부터 광화문까지 이어졌는데, 고종 사후 이후 최대 인파가 몰렸다고 하며 그의 묘는 전라북도 익산군 낭산면에 있었는데 매국노이다 보니 지속적인 훼묘사건이 빈번히 일어났고, 광복이후에는 매후 심하게 훼손되었으며 지속적으로 훼묘사건이 발생하고 수풀이 너무 무성하게 자라 관리가 불가능할 지경에 이르러 1979년 이완용의 증손자 이석형이 파묘를 하고 유골을 화장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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