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탈퇴한 사용자
탈퇴한 사용자23.05.12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어떻게 생성되었나요?

안녕하세요? 일제시대 때 픽박과 억압을 많이 받았는데 그때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수립하고 독립운동을 펼친걸로 알고 있습니다. 그러면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어떻게 생성되었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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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안녕하세요. 이승원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상하이에서도 임시정부 수립이 준비되었다. 1919년 2월 말 3 · 1 운동을 모의하던 천도교와 기독교 지도자들은 현순 목사를 상하이로 보냈다. 현순이 상하이에 도착한 날은 때마침 3월 1일이었다. 현순은 천도교에서 받은 2,000원을 종잣돈 삼아 프랑스 조계주1 안에 독립임시사무소를 차렸다. 3 · 1 운동 소식이 알려지면서 더 많은 독립 운동가들이 상하이를 찾았고 독립임시사무소는 독립운동을 이끌 임시정부를 세우기 위한 임시기구 역할을 하였다.

    1919년 3월 26일과 27일에 임시정부 수립을 논의하기 위한 모임이 열렸다. 입장은 갈렸다. 빠른 시일에 최고기관을 수립하자는 측과 국내 민족대표 33인의 뜻을 기다려 결정하자는 측이 맞섰다. 결국 다수가 조속한 임시정부 수립에 동의하면서 본격적인 절차가 진행되었다.

    먼저 임시의회를 설립하였다. 4월 10일 임시의정원을 구성하고 정부 수립 절차를 마련하였다. 국호는 대한민국으로 정하였다. ‘대한’은 일본에 빼앗긴 나라를 되찾는다는 뜻을, ‘민국’은 1912년에 수립한 ‘중화민국’에서 ‘민국’이 의미하는 것처럼 공화제 국가임을 분명히 한다는 결의를 담고 있었다. 다음날인 4월 11일에는 「대한민국임시헌장」(이하 임시헌장)이 반포되고 대한민국임시정부가 수립되었다.

    4월 25일에는 임시의정원이 「임시의정원법」을 제정하였다. 이에 따르면 임시의정원은 각 지방 인민의 대표위원으로 조직하고 위원의 자격은 대한 인민으로서 중등교육을 받은 만 23세 이상 남녀로 한정하였다. 의원 수는 인구 30만 명에 각 1인을 선출하는 것으로 하였고, 임기는 2년으로 하였다.

    상하이 임시정부는 3 · 1 운동을 전후하여 수립된 여러 임시정부를 통합하는 데 나섰다. 국내에서 수립한 한성정부나 신한민국정부는 제대로 활동할 수 없으므로, 그들의 인정을 받아 법통성 있는 정부를 해외에 수립한다는 방침을 세우고 연해주에서 수립한 대한국민의회와의 통합을 추진하였다. 통합 임시정부 수립에 앞장선 이는 상하이 임시정부 내무총장인 안창호였다. 그는 상하이 임시정부와 연해주 대한국민의회를 통합하되, 한성정부의 내각 명단을 수용하는 방식으로 법통성을 세우고자 하였다.

    하지만 대한국민의회의 양대 세력인 문창범계와 이동휘계 중 후자만 통합 임시정부 수립에 참여하였다. 통합 임시정부로서의 대한민국임시정부는 상하이에 두기로 하였다. 임시의정원은 9월 6일 「대한민국임시헌법」을 마련하고 한성정부 명단에 따라 대통령 이승만, 국무총리 이동휘를 비롯한 내각을 선출하였다.

    3 · 1운동의 격랑 속에서 본격화된 임시정부 수립 운동이 그해 9월 상하이에서 통합 임시정부 수립으로 결실을 맺었다. 1918년 한인사회당을 결성한 이동휘가 국무총리에 선임된 것에서도 알 수 있듯이 통합 임시정부는 좌우 합작적 성격을 띠면서 출범하였다.

    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 잘난몽구스218
    잘난몽구스21823.05.12

    안녕하세요. 최은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대한민국임시정부는 1919년 3월 1일 3.1운동 당시 독립선언을 계기로 경술국치와 그로 인한 식민 통치를 부인하고 한반도 내외의 항일 독립운동 주도와 민주공화국 설립을 위한 목적으로 건립되었습니다.

    한일병합조약을 통해 대한제국 황제 순종이 대한제국의 주권을 일본 제국에게 양도한 행위는 무효이며 포기한 주권은 대한민국에게로 승계되었다는 정신이 확립되어 제1차 세계대전 이후 파리 강화 회의가 열리자 신한청년당은 파리 강화 회의에 대표를 파견, 일본에는 장덕수를 파견하여 2.8독립선언을 하도록 했고 이러한 일련의 소식이 식민지 조선에 전해지자 독립에 대한 희망이 생기고 태상황 고종의 사망으로 군중이 운집한 상황에서 3.1운동이 일어납니다.

    결과 상하이에서 항일 독립운동가들이 모여 1919년 4월 10일 임시의정원을 창설, 여기에서 국호와 정부 형태, 임시헌법 등을 논의하게 되는데 신석우가 대한으로 망했으니 대한으로 흥자하 라고 제안해 국호를 대한민국으로 정하고 이와 함께 대한민국 임시헌장을 제정하고 1919년 4월 11일 임시의정원은 대한민국 임시헌장을 제정하고 이승만을 초대 국무총리로 하여 상해임시정부를 결성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