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 최초로 노벨상을 받은 여성 누구인가요?
얼마전 티비에서 퀴즈로 나왔던 문제인데 세계 최초로 여성 노벨상을 받은 사람이 누구인지였는데. 갑자기 기억이 안나는데 누구인가요?
안녕하세요. 이주연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퀴리 부인은 1867년 11월 7일, 동부 유럽 폴란드의 바르샤바에서 태어났습니다.
그녀는 일생 중 많은 업적을 남겼으며, 여성 최초로 노벨상을 받았습니다. 좋은 집안에서 훌륭한 교육을 받은 그녀는 어렸을 때 프랑스의 파리로 수학, 화학, 물리학 등을 배우기 위해 유학의 길을 떠났습니다. 그 당시, 폴란드에서는 여자가 대학에 들어가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습니다. 굳이 대학에 가려고 한다면 다른 나라의 대학에 들어갈 수 밖에 없었습니다.
얼마 후 당시 파리 대학에서 물리학을 가르치던 "피에르 퀴리"와 결혼했으며, 그녀가 세운 위대한 업적은 남편과 함께 세운 것들입니다. 퀴리 부부는 방사능을 함유한 '라듐'을 발견하였습니다. 마리는 방사능의 성분을 연구하여 두 가지 성분을 발견하였는데, '라듐'과 '폴로니움'입니다. 마리는 이 연구로 1903년 노벨 물리학상을 수상하였습니다. 이것은 여성으로서는 최초에 노벨상 수상자가 되었습니다.
그녀는 또 한번 최초의 여성이 되었는데, 소르본 대학 강당에서 학생을 가르친 최초의 여성이었답니다. 당시의 또 다른 노벨 물리학상 수상자는 자연방사능을 발견한 프랑스의 물리학자 "안토니오 헨리 바쿠에렐"입니다.
남편과 사별한 뒤에도 인류의 발전을 위해서 마리는 방사능의 성분 연구에 계속하였고, 1911년에는 두번째 노벨 화학상을 받았습니다. 한 사람이 두 번이나 노벨상을 받은 것은 처음 있는 일이었습니다.
1914년, 마리는 프랑스의 파리에 라듐 연구소를 설립하였습니다. 얼마 후 라듐 연구소는 그녀의 업적을 기려 '퀴리 연구소'로 명칭을 바꾸어 운영되었습니다.
마리 퀴리는 1934년에 생을 마감하였는데, 추측하건데 오랜 연구로 인체에 나쁜 영향을 주는 방사능에 많이 노출되었기 때문이 아닐까 합니다.
일화 1
퀴리 부인이 초등학교 시절에는 그녀의 조국 폴란드는 러시아가 다스리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학교 수업은 모두 러시아어로 해야만 했습니다. 그러나 폴란드 사람들은 폴란드어로 공부하길 원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교실에서 폴란드 역사를 배우고 있을 때였습니다. '찌링, 찌링, 찌링!' 교실에 달아 놓은 벨이 세 번 울렸습니다. 러시아 관리가 왔다는 신호입니다. 러시아에서는 폴란드 학교를 감시하기 위해 가끔 러시아 관리를 학교에 보냈습니다.
학생들은 재빨리 폴란드 역사책을 감추고, 바느질 도구를 책상 위에 내놓았습니다. 잠시 후, 러시아 관리가 거드름을 피우며 교실에 나타났습니다. 관리는 학생들을 한번 둘러보고서, 선생님에게 명령했습니다.
"내가 질문하는 것에 대답하도록, 한 학생을 골라 주시오."
퀴리 부인은
'하느님, 부디 제가 뽑히지 않도록 도와주세요.'
마음속으로 빌었습니다.
그러나, 선생님은 퀴리 부인을 불렀습니다. 왜냐하면 이 학급에서 러시아어를 가장 잘 했기 때문입니다. 이것저것 물어보던 러시아 관리는
"그럼, 지금 우리를 다스리시는 분이 누구인가?"
퀴리 부인은 폴란드 사람입니다. 때문에 러시아 황제가 폴란드를 다스리고 있다고 말해야 하는 것은 괴로운 일이었습니다. 그렇다고 대답을 안 하면 큰일이 벌어지고 말 것입니다. 퀴리 부인은 얼굴이 새파랗게 질린 채 잠시 머뭇거리다가, 할 수 없이
"러시아의 황제 알렉산드르 2세 폐하입니다."
관리는 만족한 표정을 지으며 교실을 나갔습니다.
그 순간, 퀴리 부인은 선생님에게 달려가 와락 안기며 외쳤습니다.
"선생님, 저는 폴란드 사람이에요."
설움이 복받쳐 어깨를 들먹이며 울었습니다. 선생님의 눈에서도 눈물이 글썽였습니다. 부인은 폴란드 사람들이 러시아의 노예처럼 살아야 하는 것이 마음 아팠습니다. 부인의 조국에 대한 사랑은 대단히 높았습니다.
바르샤바 여자 고등학교를 수석으로 졸업한 부인은 몸이 허약해서 시골 친척집에 머물러 있을 때, 그 시골 사람들에게 조국에 대한 사랑을 심어 주기로 다짐하고 폴란드어 사용이 금지된 상황에서 폴란드 말을 사람들에게 가르쳤습니다. 이런 사실이 러시아 당국에 알려지면 큰 일이지만 부인은 조금도 망설임이 없이 폴란드 책을 모아 조그마한 도서실을 차리고, 공장에도 찾아가 여직공들에게 글을 가르쳐 주었습니다.
사랑하는 프랑스 사람을 만나 결혼을 결정하려 할 때에도 ' 내가 프랑스 사람을 만나 결혼을 하면 조국 폴란드사람이 아닌 프랑스 사람으로 살아야 하는 것이 아닌가'하고 고민을 했습니다. 그녀의 조국을 사랑하는 마음은 위대했습니다.
1914년, 제1차 세계 대전이 일어났습니다. 그 당시, 군대 병원에는 몸 속을 비춰 볼 수 있는 엑스선 장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군인들의 몸 속에 들어 있는 총알의 위치를 찾아 낼 수 없었습니다. 몸에 박힌 총알을 뽑아내지 못해 죽는 군인들이 매우 많았습니다. 부인은 곧, 엑스선 장치를 한 진료 차를 많이 만들도록 하였습니다. 자신도 그 차에 타고 병원을 돌아다니며, 부상병의 치료를 도왔습니다. 그 뿐만이 아니라, 퀴리 부인은 여러 병원에 엑스선 치료 시설을 갖추도록 하여 수많은 부상병들의 생명을 구했습니다. 1918년 전쟁이 끝나자 부인은 다시 학생들을 가르치는 일과 연구에 열중하였습니다. 그녀는 항상 남편의 말을 가슴에 담고 열심히 생활했습니다.
"인류의 학문은 꾸준히 발전되어야 하오. 그러므로, 학문을 연구하는 우리는 죽는 날까지 어떠한 일이 있어도 학문을 계속해야 할 의무가 있소."
그녀는 일생을 통해 훌륭한 업적뿐만이 아니라 훌륭한 생활 모습과 강직한 의지를 항상 실천에 옮기는 사람이었습니다.안녕하세요. 조형원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노벨상을 수상한 세계 최초의 여성은 마리 퀴리입니다.그녀는 1903년 남편 피에르 퀴리, 앙투안 앙리 베크렐과 함께 방사능에 대한 획기적인 연구로 노벨 물리학상을 수상했습니다. 마리 퀴리는 나중에 폴로늄과 라듐 원소를 발견한 공로로 1911년에 노벨 화학상을 수상했습니다.
안녕하세요. 정준영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폴란드에서 태어난 마리(Marie Curie, 1867년~1934년)는 고등 학교를 졸업한 뒤 프랑스의 소르본 대학에서 공부했다.
가난해서 겨울에 불을 때지 못했고 끼니를 굶기도 했지만, 열심히 공부해 물리학 학사 시험에서 1등을 하고 이듬해 수학 학사 시험에서 2등을 했다.
마리는 물리학자 피에르 퀴리(Pierre Curie, 1859년~1906년)를 만나 1895년에 결혼하고 함께 연구를 했다.
하루에 4시간 이상 자 본 적이 없을 정도로 마리는 남편과 함께 연구에 몰두했다.
남편인 피에르는 당시 유명한 과학자였다.
그런데 아내가 여자라는 이유로 능력을 발휘하는 데 제한받는 것을 안타깝게 여겨 논문에 아내의 이름을 당당하게 올렸다.
이렇게 남편이 곁에서 존중하며 뒷받침해 준 결과 마리 퀴리는 우라늄과 토륨이 광선을 내뿜는다는 것을 발견했다.
마리 퀴리는 이 빛을 ‘방사능’이라고 이름지었다.
3년 뒤 퀴리 부부는 우라늄보다 방사능 강도가 330배나 높은 폴로늄을 발견했다.
폴로늄은 러시아에게 빼앗긴 조국 폴란드를 생각하며 붙인 이름이다.
이는 20세기 원자력 시대를 여는 큰 업적으로, 1903년에 마리 부부는 노벨 물리학상을 받았다.
또한 폴로늄을 발견한 그 해 12월에 라듐을 발견했다.
이 두 원소는 방사성 원소로서 발견된 최초의 것이었다.
특히 라듐은 우라늄보다도 200만 배가 강한 에너지를 발산하는 물질로 의학, 생물학, 유전학 등 많은 부분에 유용한 것이었다.
하지만 부와 명예에 별 욕심이 없었던 그녀는 이 물질을 아무 대가 없이 인류를 위해 사용하도록 내놓았다.
마리 퀴리는 남편이 마차 사고로 사망하자 함께 연구하던 것을 마무리짓고 남편이 맡았던 물리학 교수가 되었다.
소르본 대학(파리 대학)의 첫 여교수가 된 것이다.
그리고 라듐 원소를 분리해 낸 공로로 1911년에 두 번째 노벨상인 노벨 화학상을 받았다.
최초의 여성 노벨상 수상자이자 최초의 노벨상 2회 수상자인 마리 퀴리는 1934년에 숨을 거두었다.
그리고 이듬해에 퀴리의 맏딸인 이렌 퀴리가 남편과 함께 인공 방사성 원소를 발견해 노벨 화학상을 받으면서 역사상 최초로 2대에 걸친 노벨상 수상 가족이 되었다.
출처 : 한 권으로 끝내는 교과서 위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