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정왕후는 불교를 중흥시켰는데 선비들의 반발은 없었나요?
조선이라는 나라는 불교보다는 유학을 숭상하는 나라인데
어떻게 문정왕후는 불교중흥정책을 했던 건가요.
유교의 나라에서 불교를 중흥시켰는데 선비들의 반발은 없었나요?
안녕하세요. 이승원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숭유억불’이 국시인 조선이었지만 왕실에서 조차 알게 모르게 불교를 통해 기복하는 예가 많았다. 특히 왕비를 비롯한 왕실 여성들 중에는 독실한 불교신자가 많았다. 삼국시대부터 고려시대까지 천년을 넘게 지배이데올로기로 군림했던 불교를 조선에 들어와 아무리 핍박한다 하여도 뿌리깊은 신앙심은 어쩔 수 없는 부분이었다.백척간두의 위태로운 정치상황을 헤쳐나온 문정왕후 또한 독실한 불교신자였다. 어차피 성리학를 신봉하는 남성학자 관료군들과는 그 출발이 달랐던 문정왕후는 국시인 ‘숭유억불’에 매달리지 않았다. 그녀는 앞서의 성군 세종도, 엄군 세조도 차마 해내지 못한 일을 기어이 해냈다. 밖으로는 불교를 배척하는 정책을 쓰면서도 실제로는 독실한 불교 신자였던 세종과 세조도 신하들의 눈치를 보느라 하지 못한 불교 부흥책을 떳떳하게 내놓은 것이다.
그녀는 강원 감사 정만종의 추천으로 승려 보우를 데려와 봉은사 주지로 임명하고 본격적으로 불교를 육성하기 시작하였다. 성리학자들인 관료들의 반대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도첩제를 실시해 선교 양종에서 각각 30명의 승려를 뽑았으며 전국에 300여개 절을 공인하였다. 전국의 유학자들이 문정왕후의 때 아닌 불교 부흥책에 아연실색하여 반대 상소를 빗발치듯 올렸지만 문정왕후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이때의 불교 부흥책으로 임진왜란 때 활약한 승려 유정과 휴정이 발탁되기도 하였다.보우를 인생의 스승으로 신뢰했던 문정왕후는 그의 건의에 따라 죽은 남편인 중종의 묘를 봉은사 옆으로 이장해오고 자신도 그 곁에 묻히기를 소원했다. 그녀는 봉은사를 크게 일으켰으며 갖가지 불교 행사를 연이어 열었다. 도처에서 유학자들이 문정왕후의 이러한 정책에 반발하였지만 그녀는 앞서의 그 어떤 왕도 해내지 못한 독단으로 생전에 불교 진흥을 이루어냈고 죽으면서 유언에서까지 불교의 미래를 걱정했다.
명종이 즉위하고 20년, 즉 실질적 제 1권력자로 조선을 20년 간 통치한 문정왕후는 회암사에서 열 큰 재를 앞두고 목욕재계를 한 뒤 다시는 일어나지 못했다. 그녀가 죽자 염려대로 보우는 유배되었다가 살해되었고 불교는 다시 핍박받기 시작하였다. 그녀의 곁에서 전횡을 휘둘렀던 동생 윤원형과 정난정 또한 비참한 최후를 맞았다. 중종 옆에 묻히기 위해 무리하게 남편의 능을 이장했던 그녀의 소원은 이루어지지 못했다. 이장한 중종의 묘에서 물이 나오고 지관이 서울 북쪽에 태산을 봉하면 나라가 안정 될 것이라는 의견을 내놓자 아들 명종은 어머니 문정왕후의 능을 지금의 서울 공릉동에 조성하였다. 이것이 바로 태릉이다. 비록 어머니가 죽고 난 후 명종은 문정왕후의 정책 중 많은 부분은 폐기하였지만 명종에게 있어서 어머니 문정왕후는 나라를 지켜줄 태산과도 같은 존재로 인식되어 있긴 하였던 듯하다. 그러기에 문정왕후의 능은 서울 북쪽 태산을 봉하는 위치에 태릉이라는 능호를 달고 조성되었던 것이다.
문정왕후는 조선시대 동안에는의붓아들을 죽이고 참람하게도 여자면서 정권을 휘두른 악후라는 평가를 천편일률적으로 받았지만, 오늘날에는 남성중심의 조선사회에서 자신의 목소리를 내고 정권을 오로지한 탁월한 전략가이자 정치가로 평가하는 의견도 많아지고 있다.
[네이버 지식백과] 문정왕후 [文定王后] - 수렴청정으로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른 왕비 (인물한국사, 김정미, 장선환)
안녕하세요. 김종호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문정왕후의 숭불정책의 중심에는 보우(普雨)가 자리하고 있었다. 문정왕후는 강원감사 정만종(鄭萬鍾)의 추천을 통해 보우를 소개받은 후 보우를 매우 존경하게 되었다. 그리고는 보우를 봉은사[서울](奉恩寺) 주지로 임명한 후 본격적으로 불교를 중창하기 시작하였다. 유신들의 반대에도 아랑곳않고 도첩제(度牒制)를 실시해 선·교 양종에서 각각 30명의 승려를 선발하였으며 전국에 300여개 사찰을 공인하였다. 이러한 숭불정책으로 인해 임진왜란 때 활약한 승려 휴정[서산대사](休靜(西山大師)), 유정[사명대사](惟正(四溟大師)) 등이 발탁되는 등 조선의 불교는 일시적인 중흥기를 맞이하게 되었다. 조정의 유신들은 물론 전국의 사림들이 문정왕후의 때아닌 숭불정책에 격렬하게 반대하였으나 그녀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출처:우리역사넷