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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ogermaan
rogermaan23.05.18

고려시대에도 조선시대처럼 과거제도가 있었나요

조선사회는 과거제도가 행하여진 것이 잘 알려진 사실인데요. 고려도 조선과 같은 이런 과거제도가 행하여 졌었는지 궁금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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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변의 개수4개의 답변이 있어요!
  • 탈퇴한 사용자
    탈퇴한 사용자23.05.18

    안녕하세요. 임지애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광종이 왕권을 강화하기 위해 실시한 관리 선발 제도.
    호족을 대신해 왕의 명령에 충실히 따를 새로운 신하들이 필요했던 광종은 과거제를 실시하여 왕권을 강화할 수 있었다.

    왕권을 강화하기 위한 과거제

    958년 광종은 중국에서 온 쌍기의 권유를 받아들여 과거제를 실시했다. 과거제는 중국의 수나라에서 처음 실시된 제도로, 시험을 통해서 관리를 선발하는 제도를 말한다. 우리나라는 그동안 관리를 뽑을 때 다른 사람의 추천을 받거나 출신 집안을 봤는데 이제는 시험을 보는 제도가 생기게 된 셈이다.

    과거제가 생기면서 양인 이상의 신분을 가진 사람이면 누구나 과거에 응시해서 관리가 될 수 있는 길이 열리게 되었다. 집안이 좋고 나쁨에 상관없이 유교의 학식과 능력에 따라 관리가 될 수 있게 된 것이다. 양인이 과거 공부에만 매달린다는 것은 상상하기 어려운 일이었지만, 그래도 기회가 주어졌으니 이전 시대에 비하면 많이 발전한 것이라 할 수 있다. 과거를 통해 새로운 세력들이 정치에 진출하여 왕에게 충성을 바쳤다. 또한 과거제 실시로 학문이 발전하고 학교도 많아져 고려에는 좋은 효과를 불러일으켰다.

    [네이버 지식백과] 고려의 과거제 (한국사 개념사전, 2015. 02. 24., 최인수, 공미라, 김수옥, 김애경, 김지수, 노정희)


  • 안녕하세요. 엄재희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고려 광종이 왕권을 강화를 위해 관리 선발 제도를 실시 하였습니다

    958년 광종은 과거제를 실시했습니다

    그동안 관리를 뽑을 때 다른 사람의 추천을 받거나 출신 집안을 봤는데 과거제가 생기면서 집안이 좋고 나쁨에 상관없이 유교의 학식과 능력에 따라 관리가 될 수 있게 된 것입니다

    과거를 통해 새로운 세력들이 정치에 진출하여 왕에게 충성을 바쳤습니다

    또한 과거제 실시로 학문이 발전하고 학교도 많아져 고려에는 좋은 효과를 불러일으켰습니다


  • 안녕하세요. 경제·금융전문가 조유성 AFPK입니다.

    ✅️ 네, 있었습니다. 고려 초 광종 때 쌍기의 건의로 과거제도를 도입해 시행하였고, 명경과, 제술과, 잡과, 승과 등으로 구분되었습니다.


  • 안녕하세요. 정준영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고려의 과거제는 제술과(製述科), 명경과(明經科), 잡과(雜科), 승과(僧科)로 구분할 수 있으며, 제술과와 명경과는 조선의 문과에 해당하였습니다. 제술과는 문장을, 명경과는 유교 경전의 해석을 시험 보았는데, 조선과 달리 고려에서는 제술과를 명경과보다 훨씬 우대하였고 합격 인원도 많았습니다. 잡과는 기술관을 선발하기 위한 시험이었으며, 승과는 승려들에게 승계(僧階)를 수여하기 위한 시험이었습니다. 고려의 과거제는 조선이나 중국의 과거제와 비교할 때 무과(武科)가 없고 승과가 있다는 점이 특징입니다.


    천인과 향⋅소⋅부곡 등의 주민, 중대한 범죄를 저지른 자 외에 일반 양인층 이상은 원칙적으로 과거에 응시할 자격을 부여받았습니다. 그러나 과거의 종류에 따라 응시 자격은 상당한 차이가 있었습니다. 잡과는 하급 향리의 자손은 물론, 일반 양인에게도 문호가 개방되었습니다. 반면 제술과와 명경과는 응시 자격이 매우 제한되어, 문벌 관료층 자제나 문음(門蔭)을 받은 인사, 국자감 유생, 그리고 지방의 상층 향리 자제 등이 응시할 수 있었습니다.


    원칙적으로는 3년에 한 번 과거가 치러졌으나, 시기에 따라 그보다 자주 시행된 경우도 있었고 3년을 넘겨 시행된 때도 있었습니다.

    향시(鄕試)와 회시(會試), 전시(殿試)의 3단계로 구성된 중국 송나라 이후나 조선의 과거제와 달리, 고려의 과거제는 처음에 예부시(禮部試)만 치르다가 11세기 초 현종대부터 향시를 보기 시작하였습니다. 1차 시험으로 개경에서는 개경시를, 지방에서는 향시를 치렀으며, 합격자들은 국자감에서 다시 시험을 보았습니다. 여기에 합격하면 본시험인 예부시에 응시할 수 있었습니다. 이에 비해 국자감 학생들은 일반 응시자들과 달리 별도의 예비 시험을 치렀는데 이를 감시(監試)라고 하였으며, 감시 합격자들도 예부시에 응시하였습니다.


    한편 고려 시대 과거 문화의 주요 특징 중 하나는 예시의 고시관인 지공거(知貢擧)와 급제자의 관계가 매우 밀접하였다는 점입니다. 시험을 주관하는 고시관인 지공거와 부(副)고시관인 동지공거(同知貢擧)를 좌주(座主)라 불렀고 이때 합격한 인사들을 문생(門生)이라 하였는데, 좌주와 문생은 학문적⋅정치적으로 굳건히 결속하는 양상을 보였습니다. 고려 후기에는 이들의 결속을 통해 문벌이 형성되기도 하였다. 원간섭기에는 고려의 국자감시를 통과한 사람들 중에 원의 제과에 급제한 사람들도 배출되었습니다. 원 간섭기 이후 여러 차례 진통을 겪으며 학교 제도와 함께 과거 제도도 개혁되었습니다. 좌주⋅문생의 강한 유대 관계를 해체하기 위해 국왕이 친히 시험을 보는 전시(殿試)를 도입하고, 지공거 대신 여러 명의 고시관을 두는 제도로 바꾸었으며, 회시에 응시하는 수험생도 일정 나이 이상으로 제한하였습니다. 이외에도 고시 과목과 고시 방식을 조정하였는데, 이러한 개혁은 경전의 자구 해석이나 화려한 문장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나라를 다스리는 정치 철학을 시험해야 한다는 성리학의 문제 의식과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었습니다. 한편 1391년(공양왕 3)에는 무과를 설치하였는데, 이는 조선 시기의 문무 양과 체제로 계승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