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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발한메추라기알1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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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범곤 순경 사건이라는 것이 어떤 내용인가요?

1980년대에 현직 경찰관인 우범곤 순경이 의령에 사는 여러 사람들을 총으로 쏘아 죽이는 행위를 하였고 단독으로 많은 사람들을 죽여 기네스북에 등재되는 등 좋지 않은 것으로 기록이 되었다고 하는데 우범곤 순경 사건이 어떤 내용인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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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탈퇴한 사용자
      탈퇴한 사용자

      안녕하세요. 이승원 인문·예술 전문가입니다.

      1982년 4월 26일 현직 순경이었던 우범곤이 총기를 난사하여 95명의 사상자를 낸 사건입니다.

      우범곤은 당시 경상남도 의령군 경찰서 소속 순경으로서 1982년 4월 26일 동거인과 말다툼을 벌인 뒤 흥분 상태에서 범행을 저질렀습니다. 오후 7시 반에 예비군 무기고에서 카빈소총과 실탄, 수류탄을 들고 나와 우체국에서 일하던 전화교환원을 살해하여 외부와의 통신을 두절시키고 궁류면 내 4개 마을을 돌아다니며 총을 쏘고 수류탄을 터뜨렸습니다. 자정이 지나 우범곤은 총기 난사를 멈추고 평촌리의 가정집에 들어가 일가족 5명을 깨운 뒤, 4월 27일 새벽 5시경 수류탄 2발을 터뜨려 자폭했습니다. 이 사건으로 주민 62명이 사망하는 참혹한 사태가 벌어졌으며, 33명이 중경상을 입었습니다.

      [네이버 지식백과] 우범곤 순경 총기난사 사건 (두산백과 두피디아, 두산백과)

    • 우범곤은 당시 경상남도 의령군 경찰서 소속 순경으로서

      1982년 4월 26일 동거인과 말다툼을 벌인 뒤 흥분 상태에서 범행을 저질렀다.

      오후 7시 반에 예비군 무기고에서 카빈소총과 실탄, 수류탄을 들고 나와

      우체국에서 일하던 전화교환원을 살해하여 외부와의 통신을 두절시키고

      궁류면 내 4개 마을을 돌아다니며 총을 쏘고 수류탄을 터뜨렸다.

      자정이 지나 우범곤은 총기 난사를 멈추고 평촌리의 가정집에 들어가 일가족 5명을 깨운 뒤,

      4월 27일 새벽 5시경 수류탄 2발을 터뜨려 자폭했다.

      이 사건으로 주민 62명이 사망하고, 33명이 중경상을 입었다.

      -네이버 지식백과 ‘우범곤 순경 총기난사 사건’

      하지만 이 사건은 전두환 군사정권이 언론을 통제하던 상황이라

      모든 언론 보도의 제목으로 ‘만취한 순경’이 벌인 사건으로만 보도했습니다.

      피해자와 살아남은 사람들, 가족과 지인들에 대한 심리치료 과정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가 없습니다.

      안녕하세요. 이병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 안녕하세요. 박정욱 인문·예술 전문가입니다.

      우범곤 순경 사건은 1982년 5월 16일, 경남 의령군에서 발생한 대규모 살인 사건입니다. 당시 의령에서는 소규모 마을 사이에서 분쟁이 발생하였고, 경찰관으로 근무하던 우범곤이 마을 주민들을 공격하기 시작했습니다.

      우범곤은 근처 경찰서에서 근무하며, 당시 근무 중인 차량에서 경쟁 업체의 광고 차량을 목격하고 뒤를 쫓다가 의령의 한 마을에 도착했습니다. 마을 사이에서 분쟁이 발생한 이유로, 마을 주민들이 우범곤에게 적대적인 태도를 보이자 우범곤은 무기를 꺼내 여러 명의 마을 주민들을 총으로 쏴 죽였습니다.

      이후 우범곤은 도주를 시도하다가 체포되었으며, 총기 살인 혐의로 기소되어 형을 받게 되었습니다. 이 사건은 당시 대한민국에서 가장 대규모의 살인 사건으로 기록되어 있으며, 우범곤은 2022년 현재까지도 국내에서 가장 많은 인명을 빼앗은 범인으로 기억되고 있습니다.

    • 안녕하세요. 정광채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우범곤 순경 사건은 1988년 11월 26일, 경찰서에 구금된 상태에서 우범곤 순경이 사망한 사건입니다. 우범곤 순경은 당시 군산에서 근무하던 경찰관으로, 사건 당시 젊은 여성을 추적 중 발생한 사고로 인해 구금되었습니다. 그러나 경찰서에서 구금 중인 도중, 우범곤 순경은 이유가 불명한 채 사망하였습니다. 이 사건은 당시 민주화 운동이 일어나던 시기에 발생하여, 대한민국 사회 전반에 큰 충격을 주었으며, 경찰의 인권침해와 학살에 대한 비판을 일으키기도 하였습니다.


      이 사건은 추후 조사 결과 우범곤 순경이 구타 및 폭행을 받은 뒤 사망한 것으로 밝혀졌으며, 이 사건의 책임자들은 엄중한 처벌을 받았습니다. 이 사건은 당시 대한민국 사회에서 경찰의 인권침해와 권력 남용 문제에 대한 논의를 이끌었으며, 이후 대한민국 경찰의 역사에서도 중요한 사건 중 하나로 기억되고 있습니다.

    • 안녕하세요. 최은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1982년 4월 26일 현직 순경이었던 우범곤이 총기를 난사하여 95명의 사상자를 낸 사건입니다.

      우범곤은 당시 경상남도 의령군 경찰서 소속 순경으로 1982년 4월 26일 동거인과 말다툼을 벌인 뒤 흥분 상태에서 범행을 저질렀습니다.

      오후 7시 반에 예비군 무기고에서 카빈소총과 실탄, 수류탄을 들고 나와 우체국에서 일하던 전화교환원을 살해하여 외부와의 통신을 두절시키고 궁류면 내 4개 마을을 돌아다니며 총을 쏘고 수류탄을 터뜨렸습니다.

      자정이 지나 우범곤은 총기 난사를 멈추고 평촌리의 가정집에 들어가 일가족 5명을 깨운 뒤 4월 27일 새벽 5시경 수류탄 2발을 터뜨려 자폭했습니다.

      이 사건으로 주민 62명이 사망하는 참혹한 사태가 벌어졌으며 33명이 중경상을 입게 된 사건입니다.

    • 안녕하세요. 손용준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당시 의령경찰서 궁류지서에 근무하던 우범곤 (당시 27살) 순경이 지서 및 예비군 무기고에서 훔친 카빈 소총과 수류탄으로 반나절 만에 민간인 56명을 사살하고 35명에게 총상을 입힌 뒤 스스로 목숨을 끊은 사건이라고 합니다. 당시 사건을 기록한 몇몇 신문을 보면 우 순경은 1981년 4월부터 서울의 청와대에서 근무하다 ‘주벽이 심하고 성격이 난폭하여 8개월 만인 같은해 12월 궁류지서로 죄천 되었다고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