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산 정약용의 자신들이 한양(서울)으로 복귀하지 못한 배경은 조선 후기의 정조 사망 이후 정치적 변화와 실학자, 남인 계열의 사회적 지위 하락과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습니다.
비록 정약용은 정조의 총애를 받으며 벼슬길 올랐으나 정조가 1800년에 갑자기 사망하면서 주도권이 노론 벽파 등 보수적 사림 세력으로 넘어갔습니다. 이들은 실학자와 남인 계열을 탄압했고, 1801년 신유박해로 정약용은 천주교와의 연루 혐의로 유배를 당하며, 가문 전체가 폐족이 되었습니다. 비록 유배가 풀렸어도 그는 한양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고향인 남양주에 머물렀으며, 그의 자선들 역시 정치적 불이익과 사회적 차별로 인해 한양 복귀가 어려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