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까칠한호저17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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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조가 무예도보통지를 만들도록 명한 이유가 뭔가요?

정조는 오래살지는 못했지만 굉장히 비범한 인물이었다고 알고 있습니다. 정조의 업적 중 하나가 무예도보통지를 만들도록 한 것인데 문인을 더 중시하던 조선시대에서는 굉장히 특이한 것 같습니다. 그렇다면 정조가 무예도보통지를 만들도록 명한 이유가 뭔가요?

    2개의 답변이 있어요!
    • 수려한벌11
      수려한벌11

      정조가 무예도보통지를 만들도록 명한 이유는 몇 가지가 있습니다. 정조는 문인을 중시하면서도 무예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는 국가의 안전과 군사력 강화를 위해서였습니다.

      1. 국방 강화: 정조는 국가의 군사력을 강화하기 위해 무예의 훈련과 발전을 중요하게 여겼습니다. 무예는 군인들의 훈련과 전투력을 향상시키는 데에 중요한 역할을 하였습니다.

      2. 균형 잡힌 군사력: 정조는 문과와 무과를 모두 중시하며, 무예를 통해 문인들의 군사적 기술과 무기력을 향상시키려는 목적이 있었습니다. 이를 통해 군대 내에 학문적인 지식과 실전적인 능력을 갖춘 인재들을 배출하고자 했습니다.

      3. 사회 질서 유지: 무예도보통지는 무예의 기술과 규범을 정리하여 전승하고자 하는 목적도 있었습니다. 이를 통해 사회 질서를 유지하고 공평한 경쟁과 규율을 강조하려는 의도가 있었습니다.

      정조는 문과와 무과를 조화롭게 발전시키는 것을 추구하였고, 무예도보통지는 그 중 하나로써 무예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전승함으로써 국가의 군사력을 향상시키고 안정을 추구하는 데에 기여하였습니다.

    • 탈퇴한 사용자
      탈퇴한 사용자

      안녕하세요. 정준영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서문에서는 정조가 이 책을 간행하게 된 동기를 간략히 밝히고 있습니다. 이에 따르면, 당시 우리 나라에는 창이나 검의 병기는 없이 궁술(弓術)만 있었습니다.


      그런, 임진왜란 뒤 선조 때 곤봉(棍棒)·장창(長槍) 등 여섯 가지 기예를 다룬 『무예제보』가 편찬되었으며, 영조 때에는 여기에 죽장창(竹長槍)·예도(銳刀) 등 12기를 더하여 『무예신보』를 간행하였고, 다시 마상(馬上)·격구(擊球) 등 6기를 더하여 도합 24기로 된 도보를 만든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병기총서에서는 군문(軍門)의 건치(建置), 병서(兵書)의 편찬, 내원(內苑)에서의 시예(試藝) 등을 연대순으로 간술하고 있습니다. 이는 조선 초부터 『무예도보통지』 편간까지의 전투기술사 또는 병기사(兵技史)로서 큰 가치를 인정받고 있습니다.

      척·모사실에서는 이 책을 편찬하는 데 표준으로 삼은 『기효신서』와 『무비지(武備志)』의 저자인 척계광(戚繼光)과 모원의(茅元義)의 소전(小傳)을 다루었으며, 기예질의는 한교가 병기에 관하여 명나라의 허유격(許遊擊)과 문답한 것을 모은 것입니다.

      이 질의 끝에 있는 한교의 약전(略傳)에는 『기효신서』에 관한 구입 경로와 해석, 기예의 훈련 등에 관한 일화도 실려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