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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용한문어80
조용한문어80

아나니 사건이 무엇인지 역사적 배경이 궁금합니다.

중세시대 유럽에서 교황권 약화의 계기가 된 사건이 아나니 사건이라고 알고는 있는데

아나니 사건이라는 것에 대해 디테일하게 설명 좀 해주세요.

    55글자 더 채워주세요.
    6개의 답변이 있어요!
    • 잘난몽구스218
      잘난몽구스218

      안녕하세요. 최은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로마교황 보니파시오 8세와 프랑스왕 필르프 4세 간의 정치적 사건으로 아아니는 로마의 남동쪽 약 60km의 곳에 있으며 교황 보니파시오 8세가 태어난 곳이며, 그의 별장이었습니다. 성직자에 대한 과세문제로 프랑스왕 필리스 4세와 1296년 이후 대립한 교황은 1300년의 성년축제의 성공에 자신을 얻어 02년 교서 우남 쌍탑에 의해 교황의 영적인 권위가 국왕의 현세적인 권위보다 우위임을 양검론에 의거해 주장합니다.

      필리스 4세는 03년 3월 삼부회를 소집하고 교황에 대한 비난을 가하고 공의회에서 교황의 이단 혐의를 심의하도록 제안합니다.

      이 결의는 국왕의 측근인 기요무 도 노가레에 의해 아나니에 체재중인 교황에게 전달, 교황은 국왕의 파문과 폐위로서 그에 대응했으므로 노가레는 교황에게 폭행을 가한 후 감금했고 3일 후 교황은 아나니의 주민에게 구출되어 로마로 돌아왔는데 이 사건의 충격으로 얼마되지 않아 서가했고, 이 사건은 교회의 보편성이 국가권력 앞에 패배한 전기가 됩니다.

    • 탈퇴한 사용자
      탈퇴한 사용자

      안녕하세요. 정준영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로마교황 보니파시오 8세와 프랑스왕 필리프 4세 간의 정치적 사건. 아나니(Anagni)는 로마의 남동쪽 약 60km의 곳에 있으며, 교황 보니파시오 8세가 태어난 곳이며, 그의 별장이 있었다. 성직자에 대한 과세문제로 프랑스왕 필리프 4세와 1296년 이후 대립한 교황은 1300년의 성년축제의 성공에 자신을 얻어서 02년 교서 『우남 쌍탑(Unam Sanctam)』에 의해서 교황의 영적인 권위가 국왕의 현세적인 권위보다 우위임을 양검론(兩劍論)에 의거해서 주장했다. 필리프 4세는 03년 3월 삼부회를 소집하고, 교황에 대한 비난을 가하고, 공의회에서 교황의 이단혐의를 심의하도록 제안했다. 이 결의는 국왕의 측근인 기요무 도 노가레에 의해서 아나니에 체재중인 교황에게 전달되었다. 교황은 국왕의 파문과 폐위로서 그에 응대하였으므로, 노가레는 교황에게 폭행을 가한 후에 감금했다. 3일 후 교황은 아나니의 주민에게 구출되어 로마로 돌아왔는데, 이 사건의 충격으로 얼마되지 않아 서거했다. 이 사건은 교회의 보편성이 국가권력 앞에 패배한 전기가 되었다.

      출처 : 종교학대사전

    • 안녕하세요. 임지애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결론부터 말하면

      국왕의 측근인 노가레는 교황을 삼일동안 감금을 시켰고

      교황은 이 충격으로 서거했다고 합니다.

      이로써 교회 보편성이 국가에 패배한 전기가 되었다고 합니다.

      로마교황 보니파시오 8세와 프랑스왕 필리프 4세 간의 정치적 사건. 아나니는 로마의 남동쪽 약 60km의 곳에 있으며, 교황 보니파시오 8세가 태어난 곳이며, 그의 별장이 있었다고 합니다.

      성직자에 대한 과세문제로 프랑스왕 필리프 4세와 1296년 이후 대립한 교황은 1300년의 성년축제의 성공에 자신을 얻어서 02년 교서 『우남 쌍탑(Unam Sanctam)』에 의해서 교황의 영적인 권위가 국왕의 현세적인 권위보다 우위임을 양검론에 의거해서 주장했습니다.


    • 안녕하세요. 김종호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아나니 사건(Anagni Incident, 1303년 9월 7일)은 프랑스 왕 필리프 4세가

      교황 보니파시오 8세를 습격하여 교황에게 치욕을 안겨준 사건입니다.

      이 사건이후 아비뇽 유수가 발생하며 교황권은 크게 추락하였고, 1303년 교황 보니파시오 8세는 교황별궁이 있는

      아나니에서 생포된 후 로마 귀족가문

      출신 '시아라 콜로나'에게 빰을 맞았고

      그 충격으로 인해 한 달 만에 사망하고 말았습니다.

    • 안녕하세요. 강경원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아나니 사건(Anagni Incident, 1303년 9월 7일)은 프랑스 왕 필리프 4세가 교황 보니파시오 8세를 습격하여 교황에게 치욕을 안겨준 사건이다. 이 사건이후 아비뇽 유수가 발생하며 교황권은 크게 추락하였다.[1] 1303년 교황 보니파시오 8세는 교황별궁이 있는 아나니에서 생포된 후 로마 귀족가문 출신 '시아라 콜로나'에게 빰을 맞았고 그 충격으로 인해 한 달 만에 사망하고 말았다

    • 안녕하세요. 이주연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1303년 프랑스왕 필리프 4세가 교황 보니파시오 8세를 습격한 사건. 1303년 9월 7일 필리프 4세의 고문관 로마의 법학자 G. 노가레가 교황의 정적 콜로나가(家)와 결탁하여, 로마시 남동쪽 교황의 별궁이 있는 아나니(Anagni)를 습격하여 보니파시오 8세를 이단자라고 하며 퇴위를 강요했다. 이 사건은 11세기의 <서임권투쟁(敍任權鬪爭)>에서 비롯된 성속(聖俗) 두 권력의 대립이 중세에서 최종국면에 이른 것을 상징한다. 그 직접적 동기는, 조기 절대주의를 따르기 시작한 프랑스 왕권이 교황권 우위의 이념을 내세우는 보니파시오에 대하여 경제적·정치적 압박을 가한 데 있다. 교황측은 필리프가 무단으로 강행한 프랑스 성직자에 대한 임시과세, 1301년 반왕권적 태도를 이유로 파미에 주교를 체포한 사건 등에 대해서 일련의 항의성명을 발표하고 1300년에는 로마에서 성대한 성년축전(聖年祝典)을 열어 교황권의 옹호와 앙양에 힘썼다. 이에 대하여 왕권측도 1302년 중세 최초의 의회가 된 삼부회(三部會)를 파리에 소집하여 왕국 내에 반교권적 여론 조성에 힘썼다. 같은 해 교황권지상설(敎皇權至上說)을 총괄적으로 표명한 회칙 <우남 상크탐>을 최후통첩으로 여기고, 교황의 신병을 프랑스에 납치할 계획을 세움으로써 이 사건을 야기시켰다. 습격 후 보니파시오는 아나니주민의 협력으로 구출되었고, 그는 필리프 이하의 관계자들을 파문시켰다. 그러나 교황은 1개월 후에 병사하여 교황청 내의 추기경단(樞機卿團)에게 나중의 아비뇽시대와 <교회분열>의 원인이 되는 파벌대립의 후유증을 남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