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문왕 진골세력 숙청 이유???
안녕하세요. 황정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신문왕이 진골세력을 숙청한 이유는 자신의 왕권 강화에 걸림돌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안녕하세요. 최은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문무왕 시절부터 왕권강화를 위한 정치 개혁이 꾸준하게 시행되어지고 있었습니다.
절대왕권과 6두품을 중용하는 이런 정책은 진골 귀족의 반발을 부르고, 난세를 끝낸 영웅이던 문무왕 치세에는 불만을 가지고 김흠돌이라는 구심점으로 뭉칠뿐이었습니다.
아버지 문무왕의 관 앞에 유조에 따라 681년 7월7일 즉위한지 한달 뒤인 681년 8월 신문왕은 삼국통일전쟁 때 김유신 지휘하에 종군해 많은 군공을 세우며 군부의 실력자가 된 김군관을 상대등에서 해임 후 병부령을 강등시키고 각간 진복을 상대등에 임명합니다.
681년 8월8일 장인 김흠돌의 모반사건이 일어나는데, 김흠돌을 김군관처럼 삼국통일전쟁에 상당한 공을 세우며 자신의 딸을 당시 태자였던 신문왕에게 시집을 보낼 정도의 위세를 자랑하였으나 신문왕은 즉위하자마자 권력을 지닌 장인 김흠돌을 견제하여 전제 왕권을 확립하고자 합니다.
김군관 강등으로 김흠돌 세력이 도모하던 역모가 드러나자 김흠돌은 준비기간을 갖지 못하고 반란을 일으키려 하였으나 신문왕은 이미 예상하여 준비한 진압군으로 반군을 제압합니다.
신문왕은 분노하여 반란세력을 추적하고, 대부분을 주살하거나 파진찬 김흥원, 대아찬 진공을 비롯한 상당수의 귀족들이 숙청되었습니다.
그리고 교서를 내립니다.
공이 있는 자에게 상을 주는것은 옛 성인의 좋은 규범이고, 죄가 있는 자에게 벌을 주는 것은 선왕의 훌륭한 법이다.
과인이 왜소한 몸과 볼품없는 덕으로 숭고한 기틀을 받아 지키느라 먹을것도 잊고 아침 일찍 일어나 밤늦게 잠들며 여러 중신들과 함께 나라를 편안케 하려 하였다.
그런데 어찌 상복도 벗지 않은 때에 경성에서 난이 일어나리라 생각했겠는가? 적괴의 우두머리 김흠돌, 김흥원, 진공 등은 벼슬이 자신의 재주로 오른것이 아니고, 관직은 실로 성은으로 오른것인데도 처음부터 끝까지 삼가 부귀를 보전하지 못하였도다, 마침내 불인, 불의로 복과 위세를 마음대로 부려 관료들을 깔보고 위아래를 속였다.
날마나 만족하지 못하는 탐심을 왕성히 하고 포악한 마음을 제멋대로 하여 흉악하고 나쁜이들을 불러들이고 왕실의 근시들과결탁하여 화가 안팎에 통하게 되었다
똑같은 악인들이 서로 도와서 날짜를 정하여 세상을 어지럽히는 반역을 행하고자 하였다. 과인이 위로 하늘과 땅의 보살핌에 힘입고 아래로 종묘의 영험을 받아서인지 김흠돌 등의 악이 쌓이고 죄가 가득 차자 그들이 도모하던 역모가 세상에 드러났다.
이는 바로 사람과 신이 함께 버리고, 하늘과 땅이 용납하지 않음을 증명하는 것이다.
의리를 범하고 풍속을 해침에 이보다 심한것이 없다. 그러므로 병사들을 추가로 모아 은혜를 잊고 의리를 저버린 나쁜 무리들을 없애고자 하였다.
일부는 산골짜기로 도망가 숨고, 일부는 대궐 뜰에서 항복하였다. 그러나 가지나 잎사귀 같은 잔당들을 샅샅이 찾아 모두 죽여 삼사일 안에 죄수 우두머리들이 탕진되었다. 일이 부득이 했으나 사람들을 놀라게 하였으니 근심스럽고 부끄러운 마음을 어찌 한시라도 잊으리오. 이제 요망한 무리들이 숙청되어 먼 곳이나 가까운 곳이나 근심이 없게 되었으니 소집한 병사와 말들을 빨리 돌려보내도록하라. 사방에 공포하여 이러한 뜻을 알게 하라.
왕비였던 김흠돌의 딸도 아버지의 모반죄에 엮여 폐풀시키고, 일길찬 김흠운의 딸 신목왕후를 새 왕비로 맞이하였으니 신문왕의 후계자인 효소왕과 성덕왕은 모두 그녀의 소생이며 김흠운은 태종 무열왕의 사위, 이미 27년 전 655년 백제와의 전쟁에서 퇴각하기 않고 맞서다 전시한 인물로 딸의 나이는 28세 정도였습니다.
신목왕후를 왕비로 맞이하는 과정에서 김개원, 김삼광, 김문영이 중요한 역할을 하였는데 김개원은 태종 무열왕의 아들이자 숙부였고, 김삼광은 김유신의 아들, 김문영은 황산벌 전투의 선봉자였던 김유신의 심복 출신입니다.
김흠운은 무열왕계 형통에 향가 양산가의 주인공으로 칭송받던 전쟁영웅으로 납비의 절차에 참가한 이들은 왕권과밀착된 인물임을 알수 있으며, 새 왕비를 맞이하는 절차는 전제왕권을 강화하려는 의도였음을 짐작케합니다.
김흠돌의 난을 진압한 신문왕은 병부령으로 강등했던 김군관을 처형하고 반역에 연루되었음에도 김군관의 혈족은 멸하지않고 김군관의 아들 1명만 자결시킵니다.
이후 신문왕은 반포한 교서에 역적 무리의 높은 벼슬이 자신의 능력으로 올라간 것이 아니라 은전임을 강조하였으며 681년 19월 왕을 경호하는 부서인 시위부의 장 위에 6인의 장군직을 더 설치합니다.
신문왕의 이러한 행적을 보면, 왕권강화를 위함이라고 볼수 있습니다.
안녕하세요. 경제&금융 분야, 재무설계 분야, 인문&예술(한국사) 분야 전문가, 지식iN '절대신 등급' 테스티아입니다.
* 진골 자체가 당대 가장 유력했던 '기득권 세력'으로 이들은 왕권을 위협할 정도로 위세가 강했습니다. 그래서 왕과 (진골)귀족 간의 관계를 시소 관계라고도 하였죠. 즉, 왕권을 보다 강력하게 구축하기 위해서 이를 위협할 수 있는 진골세력을 숙청한 것으로 봐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