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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맨틱한발발이142
로맨틱한발발이14223.06.16
자유시 참변이라는 사건은 어떤 사건인가요?

일제강점기 독립군과 관련된 내용 중에 '자유시 참변'이라는 사건이 있던데요.

난생처음 들어본 '자유시 참변'은 어떤 사건이었나요?

자유시라는 말은 무슨 뜻인가요?

  • 탈퇴한 사용자
    탈퇴한 사용자23.06.16

    안녕하세요. 임지애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자유시는 알렉셰프스크라는 곳을 뜻합니다.

    이 곳은 현재 스보보드니라는 러시아의 지명을 말합니다.

    자유시참변은 일명 흑하사변라고도 부릅니다.

    1921년 6월 28일, 노령 자유시(알렉셰프스크)에서 3마일 떨어진 수라셰프카에 주둔 중인 한인 부대인 사할린 의용대를 러시아 적군 제29연대와 한인보병자유대대(이하 자유대대)가 무장해제시키는 과정에서 서로 충돌, 다수의 사상자를 낸 사건입니다. 이르쿠츠크파 고려공산당과 상해파 고려공산당의 파쟁이 불러일으킨 한국 무장독립전사상 최대의 비극적 사건입니다.


  • 안녕하세요. 최은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일명 흑하사변으로 1921년 6월 28일 노령 자유시에서 3마일 떨어진 수라셰프카에 주둔 중인 한인 부대의 사할린 의용대를 러시아 적군 제 29연대와 한인보병자유대대가 무장해제시키는 과정에서 서로 충돌, 다수의 사상자를 낸 사건으로 이르쿠츠파 고려공산당과 상해파 고려공산당의 파쟁이 불러일으킨 한국 무장독립전사상 최대 비극적 사건으로 불립니다.

    자유시는 러시아 제야 강변에 위치한 알렉세예브스크 라는 마을이며 현재 스바보드니라는 지명으로 불립니다.

    러시아어로 스바보다가 자유를 뜻하기 때문에 자유시 라고 불렸습니다.


  • 안녕하세요. 손용준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자유시라는 것은 그냥 한문으로 해석 한 것일뿐 자유라는 단어와는 아무런 성관이 없습니다. 1921년 6월27일 극동 공화국 아무르주 자유시 (러시아명: 스보보드니)인근인 수라젭카(Суражевка)에서 붉은 군대의 통수권 접수를 거부한 한인 망명 독립군들이 사할린 부대가 네스토르 칼란다리시비리가 지휘한 극동 공화국 인민 혁명군에게 진압을 당한 사건. 자유시사변(自由市事變), 흑하사변(黑河事變)이라고도 합니다. 중국과 일본에서는 자유시 참변이라는 용어를 쓴다. 자유시에서도 벌어졌다고 교과서의 서술에 나타나 있으나 실제로는 수라젭카에서 발생했습니다.


  • 안녕하세요. 정준영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1920년 10월 일본군이 간도 지역을 대대적으로 침공하여 독립군 부대를 공격하고 수천 여명의 한인들을 무차별적으로 살해한 간도참변(경신참변)이 일어났다. 간도의 독립군들은 월등한 군사력을 가진 일본군 정규 부대와의 정면 대결보다는 군사 역량을 보존하고 독립 투쟁의 장기적 대책을 마련하기 위하여 흑룡강성의 밀산(密山)으로 이동하였다. 밀산에서 여러 독립군 부대가 연합하여 서일(徐一)을 총재로 하는 대한 독립군단을 결성하였다. 그리고 다시 소련의 지원을 기대하며 독립군 부대들은 러시아 흑룡주(黑龍州)의 자유시로 이동했다. 당시 극동 지역 각지에 흩어져 있었던 한인 무장 부대들도 단일한 대부대를 편성하기 위하여 자유시로 집결하고 있었다. 집결한 무장 세력의 수는 4,000여 명 이상을 헤아렸다.


    그런데 1921년 3월 하순 자유시에 집결한 사회주의 계열의 무장 부대들은 러시아 공산당 극동공화국의 지원을 받는 상해파 고려 공산당 계열의 대한 의용군(사할린 의용군)과 코민테른 동양비서부의 지원을 받는 이르쿠츠크파 계열의 고려혁명군으로 양분되어 있었다. 양자는 재러시아 한인 무장 부대들의 지휘권을 놓고 대립하였다. 한편 자유시로 이동한 한인 독립군 부대의 상당수는 대한 의용군과 제휴하고 있었다. 그런 가운데 재러시아 한인 군대의 관할권이 극동공화국에서 코민테른 동양비서부로 이관되면서 상황은 고려혁명군에게 유리하게 전개되었다. 코민테른 동양비서부는 두 파의 대립을 조정하기 위하여 고려혁명군정의회를 설치하고 총사령관에 칼란다리쉬빌리를 임명했다. 그러나 고려혁명군정의회가 두 세력의 대립을 조정하는 데 실패하면서 칼란다리쉬빌리는 대한 의용군에게 무장 해제를 명령했다. 대한 의용군이 이를 받아들이지 않자, 고려혁명군정의회는 대한 의용군에 대한 무장 해제에 착수하였다.


    6월 28일 오전 1시 고려혁명군정의회는 극동공화국 자유시 수비대와 교섭하여 러시아 적군 4개 중대를 차출하였고, 여기에 고려혁명군이 가세하여 대한 의용군의 주둔지인 수라제프카로 진격하였다. 6월 28일 고려혁명군은 수라제프카를 포위하고 대한 의용군에 대해 공격하였다. 그 과정에서 고려혁명군정의회에 부대 지휘권 양도를 거부한 한인 독립군 부대들도 같이 무장 해제를 당하였다. 그 결과, 대한 의용군과 한국 독립군 부대들은 심각한 피해를 당했다. 피해 규모는 자료에 따라 다르다. 사망 36명, 포로 864명, 실종 59명이라는 자료도 있고, 사망 272명, 익사 31명, 실종 250명, 포로 917명이라고 기록된 자료도 있다. 이렇게 무장 해제된 독립군들은 뿔뿔이 흩어져서 자유시를 탈출하고 만주로 돌아오게 된다. 자유시 참변은 사회주의 운동의 파벌 갈등이 빚어낸 사건으로 그 과정에서 만주 지역 한인 독립군의 무장 역량을 크게 손실시킨 일대 비극이었다.

    출처 : 국사편찬위원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