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굳센때까치29
굳센때까치2923.06.19

고려시대 만적의 난은 어떤 사건인가요?

고려시대 무신정변 이후에 일어난 만적의 난 사건이 있다고 들었는데요. 어떤 이유에서 반란이 일어났고, 그 결과는 무엇인지 궁금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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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안녕하세요. 천지연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만적의 난 > 1198년 (태종 신종1) 만적이 중심이 되어 일으키려다 미수에 그친 노비해방운동 입니다.

    민란의 배경>

    1170년 고려 중기에 일어난 무신의 난은 당시의 정치현안과 함께 신분계급에 큰 파동을 일으켜 하극상의 풍조가 팽배하였습니다. 중앙정부는 정치 투쟁과 권력다툼으로 관리기능이 약회되었으며 관리들의 부정부패는 극에 달했다 하층민에 대한 과중한 세금과 착취가 심화 되었습니다. 결국 상층계급과 하급계급 사이에 충돌이 일어나게 되었고 급기야 농민과 노비에 의한 반란까지 유발 시켰습니다. 그 중에서도 가장 대규모적이고 목적이 뚜렷한 것이 만적의 난 이었습니다.


  • 안녕하세요. 정준영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무신집권기에 천민 출신의 인물이 관직에 오르고 출세하는 사례가 있었으므로 신분에 대한 전통적인 권위의식이 무너져갔다. 그리고 당시 농민들의 봉기 또한 빈발함으로써 천민들이 이에 합세하거나 독자적으로 향·소·부곡민이나 천민들이 신분해방을 위한 반란을 일으키게 되었다.


    1176년(명종 6)에 신량역천(身良役賤)의 특수행정구역으로서 천시되었던 공주 명학소(鳴鶴所)에서 일어난 망이(亡伊)·망소이(亡所伊)의 난이나, 1182년(명종 12)전주에서 일어난 관노(官奴)들의 봉기가 그것이었다. 1196년(명종 26)에는 최충헌(崔忠獻)의 집권에 반발해 상장군 길인(吉仁)이 군사를 일으켰을 때 노비들도 이에 참여한 사례가 있었다.

    1198년 5월에 사동(私僮: 私奴) 만적·미조이(味助伊)·연복(延福)·성복(成福)·소삼(小三)·효삼(孝三) 등 6명이 개경 북산(北山)에서 나무를 하다가 공·사노예들을 불러모아 “무신란 이후에 고관이 천한 노예에서 많이 나왔으니 장상(將相)이 어찌 종자가 있겠는가. 때가 오면 누구나 할 수 있는 것이다.”라고 선동하면서 반란을 계획하였다.


    이들은 갑인일(甲寅日)에 흥국사(興國寺)에서 모여 궁중으로 몰려가 난을 일으키고, 환관과 궁노들의 호응을 받아 먼저 최충헌을 죽인 다음 각기 자기 주인들을 죽이고 천적(賤籍)을 불사르기로 하였다.


    그러나 약속한 날에 수백 명 밖에 모이지 않았으므로 4일 후에 다시 보제사(普濟寺)에 모여 거사하기로 약속하였다. 그때 율학박사(律學博士) 한충유(韓忠愈)의 종 순정(順貞)이 주인에게 고발함으로써 반란계획이 누설되어 실패로 끝났고, 만적 등 1백여 명은 죽임을 당하였다.


    이 반란은 비록 실패로 끝났지만 무신집권기에 신분해방을 목표로 일어난 천민반란의 가장 대표적인 것이었다. 1200년(신종 3)에도 진주에서 또다시 공·사노예들의 반란이 일어나 합주(陜州)의 민란에 가세한 일이 있었다.


    또한 밀성(密城)에서 관노 50여 명이 운문(雲門 : 지금의 경상북도 청도)의 민란에 합세하는 등 천민들의 반란이 계속되었다.

    출처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