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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름달빵단팥빵
보름달빵단팥빵23.09.03

고려충신정몽주는 왜 단심가를 지었나요?

기울어져 가는 고려말에 이성계에 의해서 왕권인 정권을 빼앗기고 망국의 충신인 정몽주가 지은시인 단심가는 정몽주가 왜 지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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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탈퇴한 사용자
    탈퇴한 사용자23.09.03

    안녕하세요. 임지애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단심가의 배경은 다음과 같습니다.

    단심가는 고려왕조가 멸망할 무렵, 뒤에 조선조 태종이 된 이방원(李芳遠)이 정몽주를 초대한 자리에서 <하여가(何如歌)>를 지어 그 마음을 떠보았습니다. 이에 대하여 응답하여 지은 것이 이 노래입니다. 이방원은 만수산 드렁칡과 같이 서로 얽혀 백년까지 누리자고 하였습니다.

    이 말을 받아 정몽주는 일백 번 고쳐 죽더라도 뜻이 변하지 않으리라고 하였습니다. 조선조 개국과정에서 반대파의 주장을 대변하였던 이 노래가 개국 후에는 신하의 충성심을 나타내는 노래로 널리 퍼졌습니다. 조선조가 내세운 유교적 지배질서와 부합하는 내용이기 때문입니다. 또한, 이 노래는 절박한 상황에서도 묘미있는 표현을 개척함으로써, 고려말 새로운 갈래로 등장한 시조가 정착되는 데 상당한 기여를 하였습니다.

    정몽주는 단심가를 통해 '설사 죽더라도 고려를 향한 충심은 바꾸지 않는다'라고 답한 것입니다.

    이에 이방원은 회유를 포기하고 부하를 시켜 선죽교에서 정몽주를 철퇴로 때려 죽였다고 합니다.


  • 안녕하세요. 최은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단심가는 고려왕조가 멸망할 무렵, 뒤에 조선조 태종이 된 이방원이 정몽주를 초대한 자리에서 하여가를 지어 그 마음을 떠보았고, 이에 대해 응답하여 지은 것입니다.

    노골적으로 왕조가 바뀐들 무슨 상관이냐, 얌전이 우리 손잡고 부귀영화를 누리며 새왕조를 세워 잘 나가보자라는 의미인 하여가로 정몽주를 회유하려던 이방원에게 정몽주는 단심가를 통해 설사 죽더라고 고려를 향한 충심은 바꾸지 않는다 라고 답한것입니다.


  • 안녕하세요. 김기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고려말에 성리학을 바탕으로 학문을 닦으며 불사이군의 충절을 보인 인물 중 3은으로 불리우는 인물 중 한명이 포은 정몽주입니다. 조선 건국의 1등 공신인 태종 이방뭔은 이런 정몽주를 설득하여 회유함으로써 조선건국의 명분을 확보하기 위해 정몽주를 만나 하여가를 부릅니다. 그러나 정몽주는 불사이군의 충절을 보이면서 단심가로 답합니다. 이에 격분한 이방원은 선죽교에서 정몽주를 살해하고 맙니다.


  • 안녕하세요. 이상훈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하여가에 대한 정몽주의 단심가로 답변을 합니다.

    이런들 어떠하리 저런들 어떠하리 만수산 드렁칡이 얽혀진들 어떠하리 우리도 이같이 얽혀 백년까지 누려보세 라고 하며 거사를 함께 하자고 했지만 정몽주는 단심가를 통해 자신의 신념을 표현하였습니다. 이몸이 죽고 죽어 일백번 고쳐죽어 백골이 진토되어 넔이라도 있든 없든 임 향한 일편단심이야 가실 줄이야 있으랴


  • 안녕하세요. 손용준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고려의 정몽주 가 조선 의 이방원 이 부른 하여가 에 대한 답가 로서 불렀다는 시조가 바로 단심가 입니다. 노골적으로 '왕조가 바뀐들 무슨 상관인가 얌전히 우리 손잡고 부귀영화를 누리며 새 왕조 를 세워 잘 나가 보자. '라는 의미인 하여가로 정몽주를 회유하려던 이방원에게 정몽주는 단심가를 통해 '설사 죽더라도 고려 를 향한 충심은 바꾸지 않는다 '라고 답했는데요. 그래서 이방원은 정몽주를 설득하는 것을 포기하고 부하를 시켜 선죽교 에서 정몽주를 철퇴 로 때려죽이게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