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해군이 펼친 외교중 유명한 사건은 무엇이 있나요?
안녕하세요? 선조에 이어 왕이 된 광해군은 조선을 일으키기 위해 노력을 많이 기울였는데요~ 그중 외교 중 배울만한 외교사건이 있었다고 하던데요~ 그 외교 사건은 무엇이 있나요?
안녕하세요. 권기헌 전문가입니다.
광해군이 즉위한 시기는 명나라가 저물어가고, 후금이 강성해지고 있었기 때문에 광해군 입장에서 무조건적인 명나라에 대한 사대는 조선을 위험에 빠뜨릴 수 있다란 생각을 하였고, 명나라의 지원군 요청에서도 드러나듯이 파병군을 맡은 강홍립에게 여차하면 투항하라는 지시를 내렸다고 하죠. 그만큼 광해군은 대외적인 부분에서 감각이 있는 왕이었으나 인조반정으로 모든 것들이 수포로 돌아갑니다.
안녕하세요. 라민경 전문가입니다.
광해군은 뛰어난 중립외교를 펼쳤습니다. 당시 중국은 명나라는 쇠퇴해져 가고 후금은 세력이 강해져 갔습니다.
하지만 조선은 임진왜란때 명으로부터 군사 원조를 받았기에 명나라 군사를 요청하는 것을 받아 들여야 하는
상황에서 명에 군대를 파견하지만 한편으론 후금의 식량을 지원하는 등 후금과의 사이도 잘 다져 나갔습니다.
이런 중립외교가 잘 보이는 사건이 강홍립 사르후 전투 참여입니다.
강홍립과 군대를 파견하되 명과 후금사이에서 중립외교를 펼칩니다. 강홍립은 1차 전투에는
맹렬히 싸웠지만 이후에는 후금에 투항하게 되는 사건입니다.
광해군은 명과 후금 사이에 중립외교를 펼쳤습니다. 이는 조선의 생존을 위해 실리적이고 신중한 외교 전략로 평가합니다. 당시 명나라는 쇠퇴하고 후금은 급성장하며 대립하던 상황에서 광해군의 명의 군사적 지원 요청에 따라 강홍립을 도원수로 삼아 군대를 파병했지만 후금과 적극적으로 충돌하지 말고 상황에 따라 대처하라고 명령하였습니다.
1619년 강홍립은 심하 전투에서 후금군에 의해 조명 연합군이 대패하자 후금에 투항하였습니다. 후금에 억류된 강홍립은 조선으로 정보를 보내며 후금과 관계를 주선하는데 기여했습니다. 그러나 조정에서는 그를 역적으로 몰아 관직을 삭탈하였습니다. 이후 이 사건은 인조반정의 원인이 됩니다.
안녕하세요. 조유성 전문가입니다.
✅️ '중립외교'입니다. 무작정 명나라를 섬기는 것이 아닌 후금(청)과의 중립적인 외교를 통해 조선의 이익을 도모하는 형태의 외교 방식이었는데, 이는 당시 인용되기 어려운 외교정책이었고 인조 반정의 명분을 제공해 준 정책이기도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