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백회의와 관련하여 질문드립니다.
진지왕이 화백회의 때문에 폐위됐다고 알고 있는데 폐위가 된 이유가 폐위된 연도도 함께 알려주세요. 그리고 화백회의를 이루고 있는 사람들은 귀족들뿐인가요???안녕하세요. 손용준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서기 572년(진흥왕 33년)에 왕이 죽었기 때문에 진흥왕에 이어서 즉위해 무열왕계(武烈王系)의 시조 진흥왕의 둘째아들인 진지왕의 경우 진흥왕의 적손(嫡孫), 즉 동륜 태자의 아들인 백정(白淨 : 뒤의 진평왕)이 있었기 때문에 실제로는 왕위 계승권자가 될 수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그러나 그는 진흥왕대의 대표적 인물이었던 거칠부(居柒夫)의 지원을 받아 왕위를 찬탈했을 가능성이 있다. 그러나 즉위 576년인 재위 4년 만에 정란황음(政亂荒淫)을 이유로 화백회의(和白會議)의 결정에 따라 폐위되었으며, 독자적인 연호를 가지지 못했던 사실에 근거합니다. 국가의 기틀이 잡힌 후에는 상대등의 주관 하에 대등들이 열었던 회의인데 문제는 귀족중의 진골만 대등이 될 수 있어서 사실상 종친 회의로 전락해버린 것입니다.
안녕하세요. 이승원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화백회의(和白會議)라는 명칭의 뜻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화(和)는 조화시킨다는 뜻이며 이는 회의 참석자인 귀족들의 의견을 수렴, 조정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또한 백(白)은 아뢴다는 뜻이며 이는 회의의 결론사항을 왕에게 보고한다는 것을 의미한다.[1] 요컨대, 화백회의란 주요 귀족세력의 뜻을 조율하여 이를 왕에게 아뢰기 위한 회의를 의미합니다.
그렇다면 이는 신라 상대까지 회의에 왕이 직접 참여했다는 기록과 어긋나는 뜻이 된다. 포항 냉수리 신라비와 봉평비 등을 통해 당시 회의에는 이미 왕으로 재임 중이던 지증왕과 법흥왕이 참여하고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즉, 이 당시에는 왕도 회의의 참석자이므로 따로 결론을 보고받을 입장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따라서 화백회의라는 명칭은 법흥왕 시기 상대등을 설치하고 왕은 직접 회의에 참석하지 않게 된 이후부터 알맞은 명칭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그 이전 시기에는 별다른 명칭으로 불리었을 것으로 추론할 수 있습니다.왕의 주재에서 벗어났다고는 하나 당시는 귀족이 위세를 떨치던 사회였으므로 화백회의의 위세도 막강했습니다. 그래서 국왕직 수행에 하자가 있다고 판단한 진지왕을 퇴위시키는 결정을 하고 실제 실행에 옮기기도 했다. 또한 화백회의의 장(長)인 상대등은 정당한 왕위계승권을 가진 자가 따로 없을 경우 왕위를 계승할 주요 후보자로 여겨졌다. 이후 문무왕, 신문왕 등 진골을 대대적으로 숙청하던 신라 중대를 거치면서 왕권이 강해지고 왕의 직속 회의 기구였던 집사부와 집사부의 수장인 시중의 권한이 강화되고, 상대등과 화백회의의 위상이 약화되었다가 다시 왕권이 추락하는 신라 하대에 다시 강화된 것으로 여겨집니다.
출처: 나무위키 화백회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