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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ogermaan
rogermaan23.05.19

조선시대 비변사는 어떤 기능을 수행하는 기관인가요

조선 후기 들어서 특히나 비변사의 기능은 많이 확대된 것 같은데요. 이런 비변사의 기능은 조선 정부에서 어떠한 역할을 수행했는지 궁금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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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탈퇴한 사용자
    탈퇴한 사용자23.05.19

    안녕하세요. 이승원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조선 시대에 국방이나 군사에 관련된 업무를 맡아하는 관청은 병조였다. 중요한 일은 최고 기구인 의정부에 보고하여 결정했다. 하지만 외적이 쳐들어오거나 전쟁이 일어나면 병조뿐 아니라 의정부와 6조의 대신, 각 지방의 수령이나 장군들이 함께 모여 대책을 논의했다.

    그런데 외적이 침입한 뒤에 회의를 소집하면 이미 늦다는 지적이 나오면서 새로운 기구를 설치하자는 의견이 제시되었다. 이에 조선 조정은 국방에 관한 대책을 미리 의논하기 위해 중종 때인 1517년에 새로운 기구인 비변사를 설치했다. 하지만 이때에도 비변사는 논의가 필요할 때만 활동하는 임시 기구의 성격이 강했다.

    비변사가 상시적인 정부 기구로서 제대로 돌아가기 시작한 것은 임진왜란이 일어나면서였다. 나라 안의 모든 관청과 조직이 전쟁 대책을 세우는 데 온힘을 기울이게 되자, 비변사는 국방뿐 아니라 외교와 산업, 교통, 통신 등 거의 모든 일을 의논하고 결정하는 최고 기구가 되었다. 이렇게 비변사의 기능이 강화되면서 원래 중요한 나랏일을 결정하는 최고 기구였던 의정부나 결정된 일을 집행하는 6조의 기능은 차츰 약해졌다.

    임진왜란이 끝난 뒤 비변사의 힘이 너무 크고, 다루는 일의 종류나 양도 너무 많다는 비판이 제기되었지만 기능이 줄어들지는 않았다. 이렇게 조선 후기에 최고 기구의 역할을 하던 비변사는 흥선 대원군이 집권하면서 원래의 기능으로 축소되었다. 흥선 대원군은 비변사에서 하던 기능 가운데 행정에 관한 일은 의정부로, 군사에 관한 일은 삼군부로 넘긴 뒤 결국에는 폐지했다.

    [네이버 지식백과] 비변사 - 조선 시대에 문무 대신이 모여 나랏일을 결정하던 회의 기구 (한국사 사전 1 - 유물과 유적·법과 제도, 2015. 2. 10., 김한종, 이성호, 문여경, 송인영, 이희근, 최혜경, 박승범)


  • 안녕하세요. 임지애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조선시대 군국기무(軍國機務)를 관장한 문무합의기구(文武合議機構).

    비국(備局)·주사(籌司)라고도 한다. 조선의 군사행정은 국방부격인 병조에서 관장하였는데, 외적의 침입 등 변방에 국가적 비상사태가 발생하면 병조 단독으로 군사 문제를 처결할 수 없어, 의정부와 육조(六曹)의 대신, 그리고 변방의 일을 잘 아는 지변사재상(知邊司宰相:경상도·전라도·평안도·함경도의 관찰사와 병사(兵使)·수사(水使)를 지낸 종2품 이상의 관원)으로 구성한 회의에서 협의, 결정하였다.

    그러나 이 회의는 대개 적의 침입이 있다는 보고를 받은 연후에 소집되어 즉각 대처하지 못하는 일이 많았기 때문에, 남쪽 해안과 북쪽 국경지대에 대한 국방대책을 사전에 마련하기 위해, 1517년(중종 12) 6월 비변사를 설치하였다. 그러나 초기에는 1524년의 여연(閭延)·무창(茂昌)에 침입한 야인(野人)을 격퇴할 때, 1544년 사량왜변(蛇梁倭變)이 일어났을 때, 1555년(명종 10) 을묘왜변이 일어났을 때와, 기타 변방에 중대한 사건이 일어났을 때만 활동하였다.

    또, 청사가 설치되고 관원이 임명된 것도 1555년이었다. 이때에는 변방의 군무 외에도 전국의 군무를 모두 처리하였기 때문에, 주무대신인 병조판서와 국가 최고행정기관인 의정대신(議政大臣)도 군사기밀·군무를 알지 못하는 폐단이 생겨, 행정체계가 무너진다는 비판이 일어 폐지론이 대두되기도 하였다. 그러나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이 일어나 국가의 모든 행정이 전쟁 수행에 직결되자, 비변사의 기구가 강화되고 권한도 크게 확대되었다. 따라서 의정(議政)·판서·오군문(五軍門)의 장, 사도유수(四都留守) 등 국가 주요기관의 장이 모두 도제조(都提調) ·제조(提調)가 되어 이에 참여하였으며, 국방문제뿐만 아니라 외교·산업·교통·통신 등 주요 국정(國政) 전반을 비변사회의에서 토의·결정하였다.

    이렇게 되자 국가 최고행정기관인 의정부와 육조는 실권이 없어 제구실을 하지 못하였다. 관원으로는 도제조·제조·부제조·낭청(郞廳)을 두었는데, 도제조는 시임(時任:現任) 삼의정(三議政)과 과거에 의정을 지낸 사람이 자동적으로 겸임하게 하였다. 제조는 처음엔 지변사 재상, 이(吏)·호(戶)·예(禮)·병(兵)의 4판서, 강화유수(江華留守)가 겸임하였으며, 부제조는 정3품 당상관의 문관 중에서 병사에 능한 사람을 뽑아 임명하였다. 이들 도제조 ·제조 ·부제조를 비변사 당상이라 하였다. 또한 이중에서 병무에 통달한 사람 3명을 뽑아 유사당상(有司堂上:常任委員)으로 임명하여, 매일 비변사에 나가 군무를 처리하게 하였다.

    그뒤 훈련도감·대제학·형조판서·개성유수(開城留守)·어영대장(御營大將)·수어사(守禦使)·총융사(摠戎使)·금위대장(禁衛大將)·수원유수·광주유수(廣州留守) 등도 제조를 겸직하게 하여, 비변사 당상의 수는 수십 명에 이르렀다. 1713년(숙종 39)에는 8도구관당상제(八道勾管堂上制)를 두어 각 도에 1명의 구관당상관이 군무를 분담하여 그 도의 장계(狀啓)와 문부(文簿)를 처리하고, 다시 4명의 읍사당을 두어 각기 2도의 군무를 담당하게 하였다. 또한, 낭청은 종6품으로 12명을 두었는데, 1명은 병조의 무비사(武備司) 낭청이 겸직하고, 3명은 문관, 8명은 무관 중에서 임명하였다. 이 밖에도 잡무를 맡아본 서리(書吏) 16명, 서사(書寫) 1명을 두었고, 잡역을 맡아본 고직(庫直) 2명, 사령(使令) 16명, 청직(廳直) 1명, 문서직(文書直), 수직군사(守直軍士) 3명, 발군(撥軍) 3명 등을 두었다.

    여기에서 토의 ·결정된 중요사항을 기록하여 1년에 1권씩(사건이 많을 때는 2∼3권) 비변사등록(備邊司謄錄)을 엮어냈다. 현존하는 것으로는 임진왜란 이전의 것은 없고, 1617년(광해군 9)부터 1892년(고종 29)까지 등록 273권이 있다. 행정상의 질서, 기능상의 중복, 그리고 권한의 한계성 등 때문에 폐지론이 여러 차례 제기되었으나 후기까지 존속하다가, 1865년 대원군이 집정하면서 의정부와 비변사의 한계를 규정, 국정 의결권을 의정부에 이관하면서 그 기능이 약화되었다. 이후 3군부(三軍府) 제도를 부활시켜 군무를 처리하게 함으로써 폐지되었다.

    [네이버 지식백과] 비변사 [備邊司] (두산백과 두피디아, 두산백과)


  • 안녕하세요. 최은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외적이 침입한 뒤 회의를 소집하면 이미 늦는다는 지적이 나오면서 새로운 기구를 설치하자는 의견이 제시되어 조선 조정은 국방에 대한 대책을 미리 의논하기 위해 중종 때 1517년 새로운 기구인 비변사를 설치합니다.

    국방, 외교, 산업, 교통, 통신 등 거의 모든 일을 의논하고 결정하는 최고의 기구가 됩니다.


  • 안녕하세요. 손용준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비변사는 조선 의 의결기관으로, 국경 변방 (邊)의 일에 대비 (備)하는 기관 (司)이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고 합니다. 원래 조선 초기에는 전쟁 등 비상시를 대비해 설치한 기구였으나, 임진왜란 때 국무 수행 기능을 이양받았고 전쟁이 끝난 뒤에도 계속 유지되면서 이후 의정부를 제치고 사실상 조선의 최고 국가 의결 기관이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