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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한나라와 국력에서 밀리지 않은 흉노의 지도자 묵돌선우 생애에 업적이 궁금합니다.

중국은 한족 외에는 다 오랑캐로 보는 중화민족 사상이 있잖아요. 한 고조 유방시대 흉노의 위엄이 대단해서 그 후, 만리장성도 쌓았고요. 흉노족한테는 위대한 지도자에 해당할테고요. 묵돌선우 생애와 업적이 궁금합니다. 그리고 그 후 흉노족은 어떻게 변천했는지도 알고 싶습니다.

    2개의 답변이 있어요!
    • 잘난몽구스218
      잘난몽구스218

      안녕하세요. 최은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진나라의 진시황은 만리장성을 쌓고 몽염에 북방 수비를 맡겨 흉노에 대비하게 했고 이후 진시황이 죽고 몽염도 권력다툼의 와중에 죽게 되자 흉노의 지도자 두만 선우는 오르도스 지역을 회복하고 다시 이 일대를 누비게 됩니다. 묵돌은 그의 맏아들로 이때 두만에게 후궁이 낳은 어린 아들이 있었는데 두만은 묵돌 대신 이 아들에게 뒤를 잇게 하기 위해 묵돌을 월지에 인질로 보낸 후 월지와 전쟁을 일으킵니다. 그러나 묵돌은 월지에게 죽지 않았고 오히려 월지의 명마를 훔쳐 흉노로 도망쳐 왔습니다. 이에 두만은 묵돌에게 태자에게 주게 되어있는 좌현왕의 작위를 내리고 1만 명의 기병의 대장으로 삼았습니다.

      그러나 묵돌의 지위는 안정적이지 않아 이에 묵돌을 반란을 도모합니다. 묵돌은 소리나는 화살인 명적을 가지고 자신의 휘하에 있는 1만의 기병을 훈련시켰고 훈련 동안 그는 자신이 어떤 표적을 향해 활을 쏘면 모두가 그 표적을 향해 활을 쏴야 한다고 가르쳤으며 이를 어기고 쏘지 않는 자는 반드시 목을 베었습니다. 처음으로 그는 자신이 가지고 있던 명마를 쏘았고 몇 부하가 따라 쏘기를 주저하기에 목을 벤 후 이번에는 자신의 연지를 향해 활을 쏘았고, 이번에도 몇 부하가 주저하기에 다시 목을 베었습니다.

      마지막으로 사냥터에서 그는 자신의 아버지인 두만 선우를 향해 활을 쏘았고 1만 명의 기병은 한 명도 주저없이 두만을 향해 활을 쏘았고, 묵돌이 두만을 대신해 선우의 자리에 오르게 됩니다.

      예부터 흉노의 동방에는 동호가 자리잡고 있었고 묵돌이 자리에 오른 후 동호가 견제의 움직임을 보이는데 동호의 왕은 처음 묵돌에게 사자를 보내 흉노의 보물인 천리마를 요구합니다. 일부 신하들이 반대했지만 묵돌은 천리마를 선물로 주었고, 다시 동호의 왕은 묵돌의 애첩 하나를 줄 것을 요구, 이에 많은 신하들이 반대하나 자신의 애첩 또한 선물로 주었고, 또 동호왕은 양국의 경계에 있는 구탈지를 내놓으라고 하니 한 신하가 묵돌에게 '구탈지는 버려진 땅이니 주어도 좋고 주지 않아도 좋다'라고 하자 묵돌은 '토지는 국가의 근본이다. 어떻게 이를 줄수있겠느냐! '하고 동호에 쳐들어가 동호를 크게 무찌르고 왕을 죽였습니다.

      동방의 동호를 무찌르고 묵돌은 서방의 월지도 정복, 남으로 한나라와의 경계 지대에 있는 누번과 백양을 병합해 이제 막 등장한 한나라와 맞서게 됩니다.

      기원전 202년 한 고조 유방은 진나라 붕괴 이후 혼란스럽던 중국을 통일 , 고조는 흉노를 견제하기 위해 측근인 한왕 신을 북방에 배치하고 흉노 토벌을 명하나 한왕 신은 흉노 토벌이 어렵다 생각해 화평을 시도, 이후 고조가 이를 책망하자 흉노로 투항합니다.

      한왕 신이 투항하자 묵돌은 그의 인도를 받아 대의 땅을 공격해 들어갔고 현재의 산서성 동쪽의 평성에 이르렀으며 한 고조는 몇 차례 한왕 신과 흉노의 군대를 무찌르고 평성까지 북상했으나 이는 묵돌의 유인책이었습니다. 묵돌은 한나라 군대를 백등산에서 7일간 포위했고 이후 한 고조는 묵돌의 연지에게 선물을 주어 포위를 풀고 장안으로 도망갑니다.

      한왕 신 이후에도 노관이 유방을 배신하고 흉노로 들어간 바 있으며 이후 한 고조가 죽고 효혜제가 즉위, 묵돌은 고조의 황후인 여태후에게 '나도 독신이고 그대도 독신이니 잘 해보자'라는 내용의 편지를 보냈고 여태후는 크게 노하여 흉노를 토벌하고자 하나 주변에서 모두 고조의 예를 들어 만류해 토벌을 취소합니다.

      묵돌 시절 월지는 흉노의 서방에 자리잡고 있으면서 당시 서역 나라들에게 영향력을 행사했고 당시 우현왕이 한나라와 소규모 전쟁을 벌인 이듬해인 기원전 176년 , 묵돌과 효문제가 편지를 교환, 묵돌이 보낸 편지는

      지금 작은 관리들이 약속을 깨뜨렸기 때문에 그 죄를 물어 이번에 우현왕에게 그 벌로써 서쪽으로 월지를 토벌하게 하였소. 다행히 하늘의 가호로 단련된 정예 병사와 강건한 말로써 월지를 쳐부수어 이를 모조리 죽이거나 항복시키고 누란, 오손, 호게 및 그 인접 26개 국을 평정하여 이들을 모두 흉노에 병합하였소. 이리하여 각 유목민족은 합하여 한 집안이 되었고, 북쪽 지방은 이미 안정을 찾았소.

      여기에서 알수 있듯 묵돌은 월지는 물론 서역의 여러 나라를 점령하여 북방 유목민족을 하나도 토합했으며, 위 편지를 받ㅇ느 효문제는 답장을 통해 우현왕을 책망하지 말것을 부탁했고, 선우에게 옷 수십필을 선물로 주었습니다.

      편지를 교환한지 얼마 못되어 묵돌은 죽고, 아들인 계육이 즉위해 노상선우라 칭했습니다.

    • 안녕하세요. 안동주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묵돌선우는 투르크어로 '용감한 자'라는 뜻을 가진 이름입니다. 초한 전쟁에서 고조선의 군대를 무찌르고 동호, 월지, 정령 등 주변 민족을 정복하여 제국을 세웠습니다. 또한 서역의 26개국을 정복하여 북방의 유목 민족을 통합하기도 했습니다.

      묵돌선우 이후에도 호족은 한나라와 형제 맹세를 맺고 매년 여왕과 조공을 주고받았습니다. 그러나 기원전 48년 남북으로 분열되면서 호족은 약화되었고, 남흉노는 한나라의 일부가 되었고, 북흉노의 후예들은 다른 유목 부족과 섞여 살게 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