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팔팔한파리매183
팔팔한파리매18323.01.02
우리나라 논농사의 기원은 어디인가요?

우리나라는 옛날부터 쌀을 주식으로 발전했습니다. 하지만 중국의 경우 밭농사가 주로인데 그럼 한자에 논을 뜻하는 한자가 왜 있으며, 논농사의 시초는 어디인가요?

  • 안녕하세요. 단정한너구리141입니다.

    우리나라의 벼농사가 중국에서 전래된 것은 사실이지만 그 경로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설이 있다. 대륙을 거쳐 전래되었다고 하는 북방설과 중국의 산둥반도에서 해로를 타고 한반도 중부에 전래되었다는 설, 그리고 중국 강남에서 남해안지방을 기점으로 전래되었다는 남방설과 북방설 및 남방설의 절충설 등이 그것이다.

    우리나라 벼농사에 관한 최초의 기록은 『삼국지』 위지(魏志) 변진조(弁辰條)에 “변진국들은 오곡과 벼재배에 알맞다(宜種五穀及稻).”라고 씌어 있다.

    또 『삼국사기』 권23 백제본기에 “다루왕 6년(33) 2월 영을 내려 나라의 남쪽 주군(州郡)에 벼농사를 시작하게 하였다(多婁王六年二月下令 國南州郡 始作稻田).”는 기록이 있는 것을 보아 1세기에 벼농사가 시작되었다고 볼 수도 있다.

    그러나 일본에서 벼농사가 시작된 것이 서기전 1세기경이라는 사실(安滕, 日本古代稻作史雜考, 1951)에 비추어 과거 중국 문화가 우리나라를 거쳐 일본으로 건너간 전파과정으로 보아 우리나라 벼농사의 기원은 적어도 서기전 1세기 이전으로 보아야 타당하다는 설도 있다.

    이를 뒷받침하는 유물로 경기도 여주시 흔암리에서 서기전 6, 5세기경으로 추정되는 탄화미(炭化米)가 발견되었을 뿐만 아니라, 기록상으로는 신라본기에 “남해왕 13년(16) 7월 멸구[蝗]의 피해로 백성이 굶주려 창고를 열어 구하였다(七月蝗民飢發倉廩救之).”는 기록과 고구려본기에 “태조 3년(55) 8월, 나라의 남쪽에 멸구가 곡식을 해쳤다(國南蝗害穀).”는 기록들이 있다.

    멸구는 벼식물에만 서식하며 지금도 매년 중국에서 기류를 타고 날아와 우리나라 벼농사에 큰 피해를 주고 있는데, 우리나라에서는 월동이 안 되는 곤충이므로 이들의 피해가 민생에 영향을 줄 정도였다면 벼는 적어도 서기전 1세기 이전부터 많이 재배되었다고 보는 것이 마땅할 것이다.

    330년에는 논벼 재배를 위한 용수를 확보하기 위해 대규모의 저수지인 벽골지(碧骨池)를 축조한 것으로 보아 4세기경에는 남쪽에도 벼농사가 상당히 보편화되었음을 알 수 있다.

    통일신라 때의 벼농사 작부방식(作付方式)은 지력 유지로나 호당 경지규모로 보아 대체로 1년 또는 2년 만에 재배되는 휴한농법(休閑農法)이 관행되었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고려시대에는 농무도감(農務都監)·전농사(典農司) 등의 권농관(勸農官)을 두는 한편, 1363년(공민왕 12)에는 제학(提學) 백문보(白文寶)가 수차(水車) 보급을 건의한 것을 볼 수 있다. 따라서 벼농사는 시대의 흐름에 따라 계속 재배면적이 증가해 왔다는 것을 알 수 있다.


  • 안녕하세요. 그리운재칼13입니다. 논농사와 밭농사는 고대 신석기시대때부터 이용해왔고 신라 지증왕따 우경법이 실시가 되고 조선 세종때 농사직설을 편찬해서 논농사가 널리 퍼지게 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