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의 조박은 어떤 인물인가요?
안녕하세요.
조선시대에 있었던 '조박'은 어떤 인물인가요?
조박의 일대기는 어떠하였으며
조박에 대한 기록이나 업적은 뭐가 있나요?
안녕하세요. 임지애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조선전기 개성유후사 유후, 호조판서, 동북면도제찰사 등을 역임한 문신.
본관은 평양(平壤). 자는 안석(安石), 호는 우정(雨亭). 문하시중 조인규(趙仁規)의 4세손이며, 아버지는 전의령(典儀令) 조사겸(趙思謙)이다.
생애 및 활동사항
1382년(우왕 8) 문과에 동진사(同進士)로 급제하여 여러 관직을 거쳐 삼사좌윤(三司左尹)에 이르렀다.
1389년(공양왕 1) 12월에는 좌사의(左司議) 오사충(吳思忠)과 함께 문하사인(門下舍人)으로서 판문하부사 이색(李穡)과 권신 이인임(李仁任)을 탄핵하여 이색 부자를 파면시키고 대장 조민수(曺敏修)를 폐하여 서인주1으로 만들었다. 다음 해 5월에는 명나라에서 돌아온 조반(趙胖)에 의해 보고된 윤이(尹彛) · 이초(李初)의 사단에 의거하여 소를 올려서 이색 일파에게 일대 타격을 가하였다.
이방원(李芳遠)과 동서간이어서 이성계(李成桂)를 따르고 복종하였다. 이에, 정적인 정몽주(鄭夢周)에 의해 청주목사로 좌천, 수원부에 이르렀을 때 사주를 받은 수원부장에게 살해될 뻔했으나 도망쳤다. 1392년 4월 간관들에게 탄핵을 받아 청주목사직이 삭탈되고 귀양갔으나, 8월에 조선이 개국되자 예조전서로서 개국공신 1등이 되어 전(田) 170결(結)과 노비 20구를 받았으며 평원군(平原君)에 봉해졌다. 또한, 9월에 양광도안렴사, 1394년(태조 3) 전라도관찰사로서 민심수습에 힘썼다.
1395년 군사를 점고하지 않고 변방에 대한 보고를 늦게 했다는 이유로 공주에 안치되었다가 다음 달에 석방되었다. 1398년 겸대사헌(兼大司憲)으로서 지경연사정당문학(知經筵事政堂文學) 하륜(河崙)과 함께 사서(四書)의 구절에 방점(傍點)주2하여 왕이 볼 수 있도록 하였다. 같은 해 10월 제1차 왕자의 난에 이방원을 도와 참찬문하부사(參贊門下府事)로서 정사공신(定社功臣) 1등에 올랐다.
11월에 지경연사로서 경연에서 『대학』을 강론하고 12월에 겸대사헌으로서 좌정승 조준(趙浚), 정당문학 하륜, 중추원학사 이첨(李詹), 봉상시소경(奉常寺少卿) 정이오(鄭以吾), 좌간의대부 조용(趙庸)과 함께 『사서절요(四書節要)』를 찬술하였다.
1399년(정종 1) 정월에 지경연사로서 경연에 사관이 입시할 것을 주장했고, 3월에 대사헌으로서 조준과 함께 집현전제조관이 되었다. 그 해 5월에 제1차 왕자의 난으로 주살된 이방석(李芳碩)의 기생첩을 상당후(上黨侯) 이저(李佇)가 취하여 부자간에 천상(天常)을 어지럽혔다고 폭로한 일로 이천으로 귀양갔다가, 곧 경상도감사가 되었다.
1400년 8월 조준을 무고한 혐의로 이천에 다시 유배되었다가, 11월에 참찬문하부사가 되었다. 1401년(태종 1) 태종을 옹립한 공로로 좌명공신(佐命功臣) 3등에 봉해지고 판한성부사가 되었으며, 동지공거(同知貢擧)를 겸하였다. 다음 해 10월 판한성부사로서 하정사(賀正使)주3가 되어 명나라에 갔다가 다음 해 4월에 돌아와 참찬의정부사를 제수받았다. 1404년 3월 예문관대제학을, 10월 개성유후사 유후(開城留後司留後)가 되었다. 1406년 정월 서북면도순문사가 되어 토관(土官)의 제도를 개혁하자고 건의하였다.
1407년 6월 이강(釐降: 공주를 신하에게 시집보냄)의 의논에 참여한 죄로 양주로 귀양갔다가 다음 달에 소환되고, 다음 해 4월에 호조판서, 7월에 동북면도제찰사가 되었다가 53세의 나이로 죽었다. 1409년 생전에 불교를 신봉했다는 탄핵을 받아 공신녹권이 추탈주4되었고, 1422년(세종 4) 공신녹권이 소각되었다. 시호는 문평(文平)이다.
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조박
안녕하세요. 정준영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본관은 풍양(豊壤). 자는 숙온(叔薀), 호는 석곡(石谷). 조세찬(趙世贊)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조경(趙硬)이고, 아버지는 조희윤(趙希尹)이며, 어머니는 성순원(成順元)의 딸입니다.
1603년(선조 36) 생원이 되고, 1606년 식년문과에 갑과로 급제하였습니다. 1614년(광해군 6) 공조정랑을 거쳐 이듬해 배천현감을 지내고, 1617년 무장현감이 되었으나 우패(愚悖)하다는 탄핵을 받고 파직되었습니다.
1618년 평안도도사가 되었으나, 역시 정치적으로 대북파의 탄핵을 받고 파직되었습니다. 1625년(인조 3) 나주목사로 나갔으나 어리석다 하여 탄핵을 받고 해임되었으며, 이듬해에도 봉상시정으로서 탄핵을 받았습니다. 통정대부(通政大夫)를 지냈습니다.
안녕하세요. 김종호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조박은 고려 말, 조선 초의 문신이다. 본관은 평양, 자는 안석, 호는 우정, 시호는 문평, 군호는 평원군이다. 문하시중 조인규의 4세손으로, 증조는 조충신, 조부는 조후이다. 1356년에 전의령 조사겸의 아들로 태어났다. 영의정 조준의 7촌 조카이다.
-출처: 위키백과
조박(趙博)은 조선시대의 문신(문관) 중 한 사람으로, 본관은 광주(廣州)이었습니다. 조박은 조선 세조(1397~1450) 시대에 활동한 인물로 알려져 있습니다.
조박은 세조 때 정계에 영향력을 행사하였으며, 세조의 왕위 계승 문제에서 중요한 역할을 맡았습니다. 그는 세조의 형 세종대왕(13971450)을 지지하였고, 세조와 함께 공동으로 세조의 아들 태종(14011418)을 후계자로 삼는 일에 기여했습니다.
조박은 태종이 왕위에 오른 후에도 영향력을 유지하였으며, 세조와 태종의 정책 수립에 관여하였습니다. 조박은 세조의 균형 잡힌 정치 체제를 구축하는 데에 기여하였고, 중앙 집권화와 엘리트 계층의 강화에도 일조하였습니다.
조박의 정확한 일대기와 업적에 대한 구체적인 기록은 제한적입니다. 하지만 조선 초기의 권력 구조와 정치 활동에 영향력을 행사한 인물로서 조박의 역할은 중요하다고 평가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