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종수 선수가 정말 축구를 잘했나요? 기록이나 수상 경력으로
고종수 선수가 정말 축구를 잘했나요? 리그 우승도 하였나요? 인정받는 상도 수상하였나요? 득점왕같은 것도 차지하였나요? 명성에 비해 수상 경력은 초라한 듯 하여 질문드립니다.
안녕하세요. 임지애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수원 삼성 블루윙즈 통산 146경기 42골 44도움(K리그 96경기 20골 25도움/리그 컵 32경기 12골 7도움/FA 컵 6경기 3골 4도움/AFC 12경기 7골 8도움)
교토 퍼플 상가 통산 16경기 2골(J리그 13경기 1골/리그 컵 3경기 1골)
전남 드래곤즈 통산 16경기 2골(K리그 11경기 1골/리그 컵 5경기 1골)
대전 시티즌 통산 28경기 3골 2도움(K리그 24경기 2골 2도움/리그 컵 3경기 1골/FA 컵 1경기)
*프로 통산 206경기 49골 46도움(리그 144경기 24골 27도움/리그 컵 43경기 15골 7도움/FA 컵 7경기 3골 4도움/AFC 12경기 7골 8도움)
국가대표 경력
1997년 1월 18일에 노르웨이전을 통해 국가대표로 데뷔하였으며, A매치 데뷔 당시 나이는 18세 80일로 대한민국 축구 국가대표팀 역대 최연소 A매치 데뷔 순위에서 4위를 기록했다. 이후 1주일 후에 치러진 뉴질랜드전에서 A매치 데뷔골을 기록하면서 대한민국 축구 국가대표팀 역사상 최연소 데뷔골 기록(18세 87일)을 세우며 당대 한국 축구의 기대주로 확실히 자리잡았다. 1998 프랑스 월드컵에서 멕시코 전의 참패 속에서도 고종수의 플레이는 빛났다. 당시 프랑스 언론에서는 "한국의 14번 선수(고종수)는 마치 브라질 선수처럼 플레이한다."고 평했을 정도로 시망 수준의 국가대표팀에서 이동국과 더불어서 팬들의 마음을 사로잡는 열정적인 플레이를 보여줘서 절망 속에서 팬들은 대한민국 축구의 밝은 미래를 보았다. 이후 2000 시드니 올림픽 대표팀으로 선발되어 대회에 참가했고 같은 해에 열린 2000 AFC 아시안컵 레바논에는 부상때문에 선발되지 못했다.
이후 수원에서 큰 활약을 펼치며 당시 히딩크가 고종수의 재능을 극찬하기도 했다.뉴스 거기에 2002 한일 월드컵 국가대표 감독으로 새로 부임한 거스 히딩크로 부터 전폭적인 신임을 받으면서 "히딩크의 황태자"라는 별명을 받기도 하는 등, 축구 선수로서 그의 미래는 탄탄대로를 달리면서 쭉쭉 뻗어나갈 것으로 예상되었다.
하지만 2002 한일 월드컵을 약 1년 정도 앞둔 2001년 8월 25일 전남과 K리그 경기에 후반 교체 투입됐다가 7분 만에 십자 인대 파열 부상을 입는다. 주치의로부터 "더 이상 축구를 하면 안 된다"는 통보까지 받을 정도로 선수 생명을 위협받는 치명적인 부상이었다. 그래도 부상을 극복하기 위해 9개월 이상을 재활에 매달렸으나, 결국 2002년 월드컵 국가대표 최종 엔트리에 오르지 못하고 월드컵 4강을 달성하는 모습을 TV로 봐야만 했다[21] 게다가 부상의 후유증으로 인해 징병신체검사에서도 최종 5급 판정[22]을 받아 병역의 부담은 덜게 되었지만, 그만큼 축구 선수로서 신체적 결점이 있다는 것을 공식 인정한 것이나 마찬가지다. 특히 축구 선수들의 경우 월드컵, 올림픽 등의 국제 대회에서 매우 우수한 성과를 달성해서 병역특례를 받는 케이스가 아니면, 현역으로 복무하여 상무나 경찰 축구단에서 선수로 활동하는게 좋다. 장기적으로 경력 관리 및 연봉 협상에도 도움이 되는 길이니까.
히딩크 감독은 2002 한일 월드컵 국가대표팀 명단 발표하는 자리에서 고종수를 언급했고 애정어린 충고를 하면서 고종수의 탈락을 아쉬워했다.
본인도 착잡한 심경을 토로하기도 하는 등, 전성기를 구가하며 피크를 찍으려던 찰나에 발생한 치명적인 부상은 그에게 내적으로 엄청난 상실감과 정신적 충격을 안겨주었던 것으로 보이며, 이로 인해 선수 생활에 있어서도 상당히 무기력 해지는 등 앞으로의 몰락에 큰 영향을 미치게 되었다.출처: 나무위키 고종수/선수 경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