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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남명 조식은 벼슬하지않은 것인가요?

퇴계이황과 동시기에 살았던 유학자인 남명 조식은 퇴계와는 그 가치관에서 차이를 보였는데 그는 조정에서 여러차례 벼슬길을 권유받았으면서도 왜 한 번도 출사하지않은건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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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개의 답변이 있어요!
    • 감동스러운알알이51
      감동스러운알알이51

      안녕하세요. 윤지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당시 조선은 훈척정치의 폐해가 극심했던 시기였습니다. 조식은 두 차례의 사화를 경험하면서 훈척정치의 폐해를 직접 목격했기 때문에 출사를 포기하고 학문에만 전념하였습니다.

    • 탈퇴한 사용자
      탈퇴한 사용자

      안녕하세요. 황정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조식은 벼슬에 나아갈 때와 나아가지 말아야 할 시기를 저울질하면서

      난세에는 벼슬을 하지 않아야 한다며 평생 처사로 남았습니다

    • 안녕하세요. 김기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조식은 조선 중기의 문신이자 학자입니다. 1539년 현릉참봉에 제수되었으나 나아가지 않았습니다. 1544년 관찰사가 만나기를 청하여도 만나지 않았으며 1549년 전성서주부로 특진되었으나 나아가지 않고 집 근처에 계복당과 뇌룡사를 지어 강학에 전념하였습니다. 1552년 다시 종부시주부로 다시 부름을 받았으나 나아가지 않았고 1554년 관직에 나가라는 이황의 권유도 받아들이지 않았으며 그후로도 여러차례 부름이 있었으나 관직에 나가지 않았습니다. 벼슬을 거절하고 은일로서 학문에만 전념하자 많은 제자들이 모여들었습니다. 오건 하향 김우옹 최영경 정구 등이 찾아와 사사하였습니다. 은든적 학풍은 후학들에게도 이어졌습니다. 조식은 경상좌도의 이황과 쌍벽을 이루는 경상우도의 학풍을 대표하였는데 그의 문인들은 지리산을 중심으로 한 진주 등지에 우거하면서 유학을 진흥시키고 문풍을 일으켰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