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탁월한태양새285
탁월한태양새28523.05.28

신한 청년단은 어떤 조직이었나요??

안녕하세요. 신한 청년단은 뭐하는 조직이었나요? 신한 청년단이 만들어진 시기는 언제이며 신한 청년단의 활동은 어떤 것들이 있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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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탈퇴한 사용자
    탈퇴한 사용자23.05.29

    안녕하세요. 임지애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1918년 11월 말 제1차세계대전이 끝나자 새로운 질서의 개편이 요청되었고, 이에 따라 한국의 독립 문제도 해결될 것으로 기대하는 분위기가 독립지사들 사이에 고조되었다. 그리고 이를 위해 필요한 것은 단체의 조직임을 알고, 이를 구체화시키기로 하였다.

    당시 발기인으로 국내에서 망명해 온 김규식(金奎植)·여운형(呂運亨)·김철(金澈)·서병호(徐丙浩)·선우혁(鮮于爀)·조동호(趙東祜)·문일평(文一平)·정인보(鄭寅普)·신규식(申圭植)·신채호(申采浩)·조용은(趙鎔殷)·장덕수(張德秀) 등이 참여하였다.

    마침 1918년 12월 15일경 미국 대통령 윌슨(Wilson,T.W)이 중국 정부를 위해 파견한 특사 클레인(Clain)이 상해에 왔다. 그는 “개막이 임박한 파리강화회의는 특히 약소 민족의 해방을 위하여 절호의 기회가 될 것이니, 대표를 파견하여 주장함이 좋을 것이다.”고 연설하였다.

    이에 여운형·조동호·장덕수 등은 이 기회에 한국의 독립을 달성해야 한다는 의지로 장문의 글을 작성하였다. 그리고 강화회의에 전달해 달라는 주문과 함께 한국 대표도 참석할 수 있도록 도와달라고 요청했으나 즉각 회답은 받지 못하였다.

    신한청년단은 우선 자체의 조직을 강화하고 독립활동을 용이하게 주도하기 위해 부서와 인선을 정하였다. 이사장으로 서병호를 추대하고 이사로는 여운형·김구(金九)·이광수(李光洙)·안정근(安定根)·조동호·한원창(韓元昌)·한진교(韓鎭敎)·선우혁·김순애(金淳愛) 등이 선임되었다. 재무부·교제부·토론부·체육부·출판부·서무부 등 6개 부서에 회원은 150여 명이었다.

    신한청년단은 외교에 능한 김규식을 파리강화회의에 한국 대표로 파견하고, 여운형을 노령으로, 장덕수를 일본으로, 선우혁·김철·서병호 등을 국내로 파견, 이들과 긴밀하게 연락을 취하면서 세계정세 변화에 따른 대책을 협의하였다.

    김규식은 대한민국임시정부가 수립된 뒤 파리위원부를 설치, 독립운동에 심혈을 기울였다. 장덕수는 일본에서 2·8독립선언을 촉진시켰고, 국내로 들어온 선우혁은 관서 지방의 기독교인과 손을 잡은 뒤 3·1운동을 일으키도록 분위기를 조성해 주었다. 이로 인해 상해는 독립운동의 본부격이 되어 2·8독립선언에 참석했던 이광수와 최근우(崔謹愚)가 달려왔고, 여운형과 동생 운홍(運弘)도 노령과 미국으로부터 도착하였다.

    국내에 파견되었던 선우혁·김철·서병호와 현순(玄楯)·최창식(崔昌植) 등도 모였다. 그 밖에 이봉수(李鳳洙)·강대현(姜大鉉)·안승원(安承源)·김구·김병조(金秉祚)·조상섭·이원익(李元益) 등이 국내에서 달려왔다.

    만주와 노령에서는 이동녕(李東寧)·이시영(李始榮)·조완구(趙琬九) 등 30여 명이 모여 독립 문제가 본격적으로 논의되었다. 신한청년단의 단강(團綱)은 대한독립·사회개조·세계 대동(世界大同)이었고, 『신한청년보(新韓靑年報)』를 기관지로 발간·배포하면서 독립운동을 전개하였다.

    그 뒤 30여 명의 신한청년단 핵심 단원들은 1919년 4월 초 1,000여 명의 동포를 배경으로 프랑스 조계의 바오창로(寶昌路) 329호에 독립임시사무소를 설치하였다. 이것이 뒷날(4월 11일) 대한민국임시정부의 모체가 되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대한민국임시정부 수립 이후인 1920년 4월 이후에는 민간사업을 경영하였으나 대부분의 인사들이 임시정부의 중요 인물로 활동하였다.

    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신한청년단


  • 안녕하세요. 이주연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정의

    1918년 중국 상해(上海)에서 조직된 독립운동단체.

    개설

    일명 신한청년당이라고도 한다.

    연원 및 변천

    1918년 11월 말 제1차세계대전이 끝나자 새로운 질서의 개편이 요청되었고, 이에 따라 한국의 독립 문제도 해결될 것으로 기대하는 분위기가 독립지사들 사이에 고조되었다. 그리고 이를 위해 필요한 것은 단체의 조직임을 알고, 이를 구체화시키기로 하였다.

    당시 발기인으로 국내에서 망명해 온 김규식(金奎植)·여운형(呂運亨)·김철(金澈)·서병호(徐丙浩)·선우혁(鮮于爀)·조동호(趙東祜)·문일평(文一平)·정인보(鄭寅普)·신규식(申圭植)·신채호(申采浩)·조용은(趙鎔殷)·장덕수(張德秀) 등이 참여하였다.

    마침 1918년 12월 15일경 미국 대통령 윌슨(Wilson,T.W)이 중국 정부를 위해 파견한 특사 클레인(Clain)이 상해에 왔다. 그는 “개막이 임박한 파리강화회의는 특히 약소 민족의 해방을 위하여 절호의 기회가 될 것이니, 대표를 파견하여 주장함이 좋을 것이다.”고 연설하였다.

    이에 여운형·조동호·장덕수 등은 이 기회에 한국의 독립을 달성해야 한다는 의지로 장문의 글을 작성하였다. 그리고 강화회의에 전달해 달라는 주문과 함께 한국 대표도 참석할 수 있도록 도와달라고 요청했으나 즉각 회답은 받지 못하였다.

    신한청년단은 우선 자체의 조직을 강화하고 독립활동을 용이하게 주도하기 위해 부서와 인선을 정하였다. 이사장으로 서병호를 추대하고 이사로는 여운형·김구(金九)·이광수(李光洙)·안정근(安定根)·조동호·한원창(韓元昌)·한진교(韓鎭敎)·선우혁·김순애(金淳愛) 등이 선임되었다. 재무부·교제부·토론부·체육부·출판부·서무부 등 6개 부서에 회원은 150여 명이었다.

    신한청년단은 외교에 능한 김규식을 파리강화회의에 한국 대표로 파견하고, 여운형을 노령으로, 장덕수를 일본으로, 선우혁·김철·서병호 등을 국내로 파견, 이들과 긴밀하게 연락을 취하면서 세계정세 변화에 따른 대책을 협의하였다.

    김규식은 대한민국임시정부가 수립된 뒤 파리위원부를 설치, 독립운동에 심혈을 기울였다. 장덕수는 일본에서 2·8독립선언을 촉진시켰고, 국내로 들어온 선우혁은 관서 지방의 기독교인과 손을 잡은 뒤 3·1운동을 일으키도록 분위기를 조성해 주었다. 이로 인해 상해는 독립운동의 본부격이 되어 2·8독립선언에 참석했던 이광수와 최근우(崔謹愚)가 달려왔고, 여운형과 동생 운홍(運弘)도 노령과 미국으로부터 도착하였다.

    국내에 파견되었던 선우혁·김철·서병호와 현순(玄楯)·최창식(崔昌植) 등도 모였다. 그 밖에 이봉수(李鳳洙)·강대현(姜大鉉)·안승원(安承源)·김구·김병조(金秉祚)·조상섭·이원익(李元益) 등이 국내에서 달려왔다.

    만주와 노령에서는 이동녕(李東寧)·이시영(李始榮)·조완구(趙琬九) 등 30여 명이 모여 독립 문제가 본격적으로 논의되었다. 신한청년단의 단강(團綱)은 대한독립·사회개조·세계 대동(世界大同)이었고, 『신한청년보(新韓靑年報)』를 기관지로 발간·배포하면서 독립운동을 전개하였다.

    그 뒤 30여 명의 신한청년단 핵심 단원들은 1919년 4월 초 1,000여 명의 동포를 배경으로 프랑스 조계의 바오창로(寶昌路) 329호에 독립임시사무소를 설치하였다. 이것이 뒷날(4월 11일) 대한민국임시정부의 모체가 되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대한민국임시정부 수립 이후인 1920년 4월 이후에는 민간사업을 경영하였으나 대부분의 인사들이 임시정부의 중요 인물로 활동하였다.



  • 안녕하세요. 장경수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신한청년당(新韓靑年黨)은 1918년 8월 중국 상하이에서 동제사(同濟社) 단원들을 주축으로 조직된 한국의 독립 운동 단체로 한국 최초의 근대 정당이다. 당수는 여운형이며 여운형, 한진교, 장덕수, 김철, 선우혁, 조동호이었으며, 그 밖에도 1919년 4월에 서병호, 김구, 이광수, 신규식 등도 관여하였다.


    당의 강령은 '대한 독립·사회 개량·세계 대동' 등 세 가지였다.


    1918년 12월 독립 청원서를 미국의 우드로 윌슨 대통령에게 전달했으며 1919년 1월에는 김규식을 파리 강화 회의에 파견해 조선의 독립을 요구했다. 또한 도쿄, 연해주, 미주와도 긴밀한 연락망을 구축했다.


    신한청년당은 일본·만주·연해주·서울 등 국내외로 동지를 파견하여 파리강화에 대표를 파견하였음을 알리고, 독립 운동자금을 모금하고, 나아가 국내외에서 거국적인 독립시위를 일으킬 것을 계획하였으며, 1918년 12월에 부산에 파견된 장덕수는 백산상회로부터 파리강화회의 참석 경비 3000원을 모금하였다. 일본 도쿄에 파견된 신한청년당 인사들은 일본 동경 유학생들과 접촉하였다.


    이러한 신한 청년당의 활약으로 일본에서는 유학생들이 2.8 독립 선언을, 한국에서는 전국 방방곡곡에서 3·1 운동을 일으키는 진원이 되었다. 이 단체의 구성원들은 뒷날 1919년 4월 10일 수립된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주축을 이루었다.


    상해에 대한민국 임시 정부가 들어서면서 그후에 독립 운동가 신규식의 명령에 의해 자발적으로 1923년에 해체하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