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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산에 박상진이라는 인물은 어떤 인물이었나요?

얼마 전에 울산을 놀러 갔는데 그쪽에 박상진이라는 옛날 사람이 유명한 거 같더라고요 울산 가서 처음 알게 되었는데 그 박상진이라는 사람은 어떤 인물이었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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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6개의 답변이 있어요!
    • 순금킹 시계퀸
      순금킹 시계퀸

      안녕하세요. 박남근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경상남도 울산의 유학자 집안에서 출생하여 지난날 한때 경상남도 밀양에서 잠시 유아기를 보낸 적이 있습니다.


      그는 졸업후 판사 시험에 합격했지만 판사 임용을 거절하고 1911년 만주 지역의 망명자들을 만나러 갔다.

      귀국한 뒤에는 해외의 독립 운동 자금을 지원하고 안둥 삼달양행과 창춘 상원양행, 지린에 연락 거점으로 활용하기 위하여 대구에 상덕태상회(尙德泰商會)를 설립하였고, 1915년에는 비밀 결사 조선국권회복단을 조직해 활동했다. 계몽 운동가 중심의 이 단체는 곧 채기중 등이 결성한 구 의병 운동가 중심의 풍기광복단과 연합하여 대한광복회를 조직했으며, 박상진은 이 광복회의 총사령을 맡았던 분 이십니다.

      라는 답변을 구하였습니다.

    • 안녕하세요. 임지애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경상남도 울산의 유학자 집안에서 출생하여 지난날 한때 경상남도 밀양에서 잠시 유아기를 보낸 적이 있는 그는 훗날 영남 지역의 명망 있는 유학자로 의병 운동을 일으켰다가 사형 집행된 허위의 문하에서 수학했고, 1910년 양정의숙을 졸업하면서 신학문도 익혔습니다. 귀국한 뒤에는 해외의 독립 운동 자금을 지원하고 안둥 삼달양행과 창춘 상원양행, 지린에 연락 거점으로 활용하기 위하여 대구에 상덕태상회(尙德泰商會)를 설립하였고, 1915년에는 비밀 결사 조선국권회복단을 조직해 활동했습니다. 계몽 운동가 중심의 이 단체는 곧 채기중 등이 결성한 구 의병 운동가 중심의 풍기광복단과 연합하여 대한광복회를 조직했으며, 박상진은 이 광복회의 총사령을 맡았습니다. 또한 만주 지역에서 무장 독립 운동을 위한 학교를 세워 운영하며, 그는 독립 운동 자금을 모집하던 중 협조하지 않는 칠곡의 부호 장승원(장직상·장택상의 아버지) 등의 부호들과 친일파를 처단하기도 했으며 1918년 체포되어 사형 선고를 받았으며, 만주에 있던 김좌진은 박상진을 구하기 위해 파옥계획을 세웠으나 시행하지는 못했습니다. 이후 변호사 선임 등을 거부하고 대구 형무소에서 처형되었습니다.

    • 안녕하세요. 김찬우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한국의 독립운동가. 김좌진, 홍범도, 김원봉, 박용만, 김홍일, 지청천, 이범석, 양세봉 등과 함께 무장독립투쟁의 대표적 인물 중 1명으로 꼽힙니다. 1895년 일제의 명성황후 시해와 단발령 강제 시행 등에 대항하여 의병을 일으켰던 허위(許蔿)의 문하에 들어가 1902년부터 수학하면서 척사적 반세 민족 의식을 키웠습니다. 1904년 양정의숙 전문부에 입학해 법률학 및 경제학을 전공하다가 1910년 판사 시험에 합격하여 평양법원으로 발령이 났으나 거부하고 부임치 않았습니다. 1912년 대구에 상덕태상회(尙德泰商會)를 설립해 곡물상을 가장하여 독립투사들의 연락처로 삼고 군자금 마련에 주력하였고 1915년 1월 유림들을 규합해 대구 비슬산에 있는 안일암에서 '조선국권회복단'을 조직하였으며 7월에는 1913년에 이미 조직되었던 채기중 등의 '풍기광복단'과 합작하여 '대한광복회'를 조직해 총사령으로 활약했습니다.

      그럼 도움이 되셨다면 추천과 좋아요 부탁드리겠습니다:)

    • 안녕하세요. 이주연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경상남도 울산의 유학자 집안에서 출생하여 지난날 한때 경상남도 밀양에서 잠시 유아기를 보낸 적이 있는 그는 훗날 영남 지역의 명망 있는 유학자로 의병 운동을 일으켰다가 사형 집행된 허위의 문하에서 수학했고, 1910년 양정의숙을 졸업하면서 신학문도 익혔다.

      그는 졸업후 판사 시험에 합격했지만 판사 임용을 거절하고 1911년 만주 지역의 망명자들을 만나러 갔다. 만주에는 허위의 형인 허겸을

      비롯하여 이상룡과 김동삼, 손일민, 김대락 등이 망명해 있었는데, 이들은 모두 영남 지역의 유학자 출신으로 해외 독립 운동 기지 설립을 위해 만주로 건너간 인물들이었다.

      귀국한 뒤에는 해외의 독립 운동 자금을 지원하고 안둥 삼달양행과 창춘 상원양행, 지린에 연락 거점으로 활용하기 위하여 대구에 상덕태상회(尙德泰商會)를 설립하였고, 1915년에는 비밀 결사 조선국권회복단을 조직해 활동했다. 계몽 운동가 중심의 이 단체는 곧 채기중 등이 결성한 구 의병 운동가 중심의 풍기광복단과 연합하여 대한광복회를 조직했으며, 박상진은 이 광복회의 총사령을 맡았다.

      광복회의 강령은 부호에게서 군자금을 반강제적으로 기부 받아 독립 운동 자금으로 사용하고, 만주 지역에서 무장 독립 운동을 위한 학교를 세워 운영하며, 해외에서 무기를 구입하여 일본인 고관이나 한국인 친일 인물들을 수시로 처단한다는 등의 내용을 담고 있다.

      그는 독립 운동 자금을 모집하던 중 협조하지 않는 칠곡의 부호 장승원(장직상·장택상의 아버지) 등의 부호들과 친일파를 처단하기도 했으며 1918년 체포되어 사형 선고를 받았으며, 만주에 있던 김좌진은 박상진을 구하기 위해 파옥계획을 세웠으나 시행하지는 못했다. 이후 변호사 선임 등을 거부하고 대구 형무소에서 처형되었다.

      참고 부탁드립니다.

    • 안녕하세요. 정준영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향리에서 한학을 배우다가 19세 되던 1902년부터는 의병장 출신으로 서울 평리원판사로 있던 허위(許蔿)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1904년 양정의숙(養正義塾) 전문부에서 법률과 경제학을 전공해 1910년 판사시험에 합격하여 평양법원에 발령되었으나 사퇴하고 독립운동에 나섰다.


      1912년 대구에 상덕태상회(尙德泰商會)를 설립해 독립운동의 연락 본부로 삼았다. 1915년 1월 안일암(安逸庵: 지금의 대구의 安逸寺)에서 조선국권회복단(朝鮮國權恢復團)을 결성하였다. 그리고 그 해 7월 풍기광복단(豊基光復團)의 인사와 합작해 대한광복회를 조직하고 총사령으로 취임하였다.


      대한광복회는 충청도·전라도·경기도·황해도·평안도와 만주 각지에 조직을 가지는 1910년대 국내 최대의 독립군 단체로 성장하였다. 박상진은 곳곳에 곡물상을 설립해 연락 거점으로 삼아, 일제 타도를 추진하는 행동 강령으로 비밀·폭동·암살·명령을 시달하였다.


      박상진 등의 대한광복회는 이념에 있어서는 근대 국민국가의 공화주의를, 방략에 있어서는 무장혁명노선을 표방하였다. 박상진은 1916년 만주에서 무기와 화약류를 들여오다가 잡혀 6월간의 징역형으로 옥고를 치르기도 하였다.


      친일부호 처단을 여러 차례 계획하였다. 그러던 중 1917년 11월 채기중(蔡基中)·유창순(庾昌淳)·임봉주(林鳳柱)·강순필(姜順必)에게 칠곡부호 장승원(張承遠)을 처단하게 하였다. 그리고 1918년 1월 김한종(金漢鍾)·장두환(張斗煥)·김경태(金敬泰)·임봉주(林鳳柱)에게 충청남도 아산 도고면장 박용하(朴容夏)를 처단하게 하였다.


      이 때 대한광복회 조직이 드러나 많은 사람이 투옥되었으며, 사형선고를 받았다.

      출처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 안녕하세요. 최은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한국의 독립운동가로 경상남도 울산의 유학자 집안에서 출생, 지난날 한때 경상남도 밀양에서 잠시 유아기를 보낸적이 있는 그는

      훗날 영남지역의 명망있는 유학자로의 의병운동을 일으켰다가 사형 집행된 허위의 문하에서 수학했고, 1910년 양정의숙을 졸업하며 신학문을 익혔습니다.

      그는 졸업 후 판사시험에 합격했지만 판사 임용을 거절, 1911년 만주 지역의 망명자들을 만나러 갔고 만주에는 허위의 형인 허겸을 비롯해 이상룡과 김동삼, 손일민, 김대락 등이 망명해있었는데 이들은 모두 영남 지역의 유학자 출신으로 해외 독립 운동 기지 설립을 위해 만주로 건너간 인물들이었습니다.

      귀국 후 해외의 독립 운동 자금을 지원하고 안둥 삼달양행과 장춘 상원양행, 지린에 연락 거점으로 활용하기 위해 대구에 상덕태상회를 설립, 1915년 비밀 결사 조선국권회복단을 조직해 활동했습니다. 계몽운동가 중심의 이 단체는 곧 채기중 등이 결성한 구 의병운동가 중심의 풍기광복단과 연합해 대한광복회를 조직, 박상진은 이 광복회의 총사령을 맡았습니다.

      광복회의 강령은 부로에게서 군자금을 반강제적으로 기부받아 독립운동 자금으로 사용하고 만주지역에서 무장독립 운동을 위한 학교를 세워 운영하며 해외에서 무기를 구입해 일본인 고관이나 한국인 친일 인물들을 수시로 처단한다는 등의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그는 독립운동자금을 모집하던 중 협조하지 않는 칠곡의 부호 장승원 등의 부호들과 친일파를 처단하기도 했으며 1918년 체포되어 사형선고를 받았으며 만주에 있던 김좌진은 박상진을 구하기 위해 파옥계획을 세우나 시행하지는 못했으며 이후 변호사 선임 등을 거부하고 대구 형무소에서 처형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