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기환선생에 대해서 알고싶습니다
안녕하세요 드라마 미스터션사인의 실존모델인 황기환선생님은 우리나라독립을 위해서 몸을 바치셨는데 어떤 삶을 살아오고 미국도 간것인지 궁금합니다
안녕하세요. 황정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애국지사 황기환 선생은
미국에서 대학을 졸업한 후, 1917년 미국 육군사관학교(웨스트포인트)를 졸업하고, 미군 장교로 복무하였습니다.
1919년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파리위원부 서기장으로 임명되어, 프랑스 파리에서 대한민국의 독립을 위해 활동하였습니다.
1차 세계대전 당시 유럽에서 전쟁 포로가 된 한국인들을 구출하는 데 큰 역할을 하였습니다.
1923년에는 미국으로 돌아와 뉴욕에서 한인사회의 발전을 위해 노력하였으며, 1940년에는 미국에서 사망하였습니다.
대한민국 정부는 황기환 선생의 업적을 기리기 위해 1995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 하였고,
2022년에는 유해를 봉환하여 국립대전현충원에 안장하였습니다.
안녕하세요. 강요셉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독립운동가 중의 하나인 황기환 이라는 이름의 독립운동가는 낯선 이름이겠지만 그 이름 앞에 "미스터 션샤인"이라는 글자가 붙으면 조금은 가깝게 느껴질 것입니다 그는 바로 2018년 7월부터 9월까지 tvn에서 방영된 드라마 미스터 션샤인에서 배우 이병헌이 연기한 유진 초이의 실제 모델이 된 인물입니다 2019년 12월 독립운동가 황기환 선생의 유해 봉헌 작업에 착수했다는 기사가 보도됐습니다. 지금 유해봉환 작업은 어떻게 진행되고 있는지와 더불어 독립운동과 황기환 선생의 일생을 돌아보고자 합니다. 미스터 선샤인의 유진 초이의 삶으로 재탄생한 독립운동과 황기환의 유년 시절 조선시대 양반과 노비의 자식으로 태어난 유진은 모진 핍박을 받으며 살아갑니다 유진은 신미양요로 조선에 들어와 있던 미군 군함을 타고 미국으로 건너가게 되고 이후 갖은 고난 끝에 미군 장교가 돼 미군 공사관의 영사 대리로서 조선에 돌아오지요 드라마 속 유진은 항일운동을 위해 불꽃 같은 생을 마감합니다 황기환 선생의 가계와 학업, 어린 시절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가 거의 없고 그는 평안남도 순천에서 태어났고 태어난 해는 1886년에서 1887년 경으로 추정합니다 10대 후반인 1904년 조선을 떠나 미국으로 건너갔고 황기환 선생은 1917년 미국이 제1차 세계대전에 참전할 때 지원병으로 유럽 전선에 나가 기독교 청년회 사업으로 중상자 구호를 담당했죠 미국은 부족한 병력을 보충하기 위해 1917년 5월 18일 제정한 의무병역법에 따라 2390만 명의 징집 대상자 중 280만 명을 징병하고 그 외에도 지원자를 모집해 200만 명이 군대의 각종 기구에 자발적으로 참여했습니다 투철한 애국심에 뛰어난 영어 실력, 그리고 미군 복무란 특이한 경력까지 가지고 있던 황기환 선생은 이후 프랑스와 영국 미국 등 1차 대전 승전국들을 누비며 활약했고 1919년 6월 3일 파리에 도착한 황기환 선생은 한국 대표부 서기장으로 임명됐고 조선독립을 위한 홍보 활동을 시작했지요 해외에서 조선 독립 외쳤던 외로운 싸움, 황기환 선생이 프랑스에서 이룬 대표적인 업적은 한인 노동자 구출입니다 러시아와 북해를 거쳐 영국까지 흘러 들어온 한인 노동자들이 일본으로 송환될 뻔한 상황에서 영국 정부를 설득해 프랑스로 이주시켰고 당시 영국 정부는 영일동맹을 맺고 있었기 때문에 일본의 송환 요구에 응하려고 했죠 소식을들은 황기환 선생은 영국으로 건너가 영국 정부에 항의를 했고 덕분에 한인 노동자 35명을 프랑스로 이주시키는데 성공했다고 합니다. 또한 영국에서 활동하면서 크레더릭아서 맥켄지 등 친한파를 상대로 독립의 당위성을 알렸고 풍부한 재정과 인력을 가진 일본 당국이 유럽의 신문들에 수록한 한국 관련 오보들에 대해 항의하고 한국의 참상과 한국 독립운동에 관한 인터뷰를 하기도 했습니다
안녕하세요. 윤지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황기환 선생은 평안남도 순천 출신으로, 10대였던 1904년 미국으로건너갔습니다. 이후 미군에 자원 입대하여 제1차 세계대전에 참전하였고, 1919년 6월에는 프랑스 파리에서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파리위원부 서기장을 맡아 독립운동을 전개하였습니다. 1919년 10월에는 러시아 무르만스크에 있던 조선인 노동자 200여 명이 영국을 거쳐 일본에 강제 송환되는 것을 막기 위해 영국·프랑스 정부를 상대로 외교적 노력을 펼쳐 홍재하 등 35명을 구출하여 프랑스로 이송시켰으며, 이후 프랑스에서 재법한국민회를 조직하여 활동하였습니다. 1920년 1월에는 프랑스 파리 주재 한국선전단 선전국장으로서 프랑스어 잡지를 창간하고 강연회를 개최하여 세계 각국에 우리나라의 독립을 알렸습니다. 1923년, 40세의 젊은 나이에 미국 뉴욕에서 별세하였으며, 2023년 4월, 순국 100년 만에 유해가 고국으로 돌아왔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