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동수는 어떠한 인물인지 알고 싶습니다.
안녕하세요? 조선시대 정조때 백동수가 살았던 시기라고 알고 있는데요, 이 백동수의 생애는 어떠했는지 그 배경이 알고 싶습니다.
안녕하세요. 이동광 전문가입니다.
백동수는 18세기에 편찬된 <무예도보통지(武藝圖譜通志)>(조선후기 무예훈련교범)를 토대로 이덕무, 박제가와 더불어 무예실기를 담당하여 정조대왕의 찬사를 한몸에 받았던 조선의 무인입니다.
유교적 이념이 뿌리깊게 자리잡은 조선에서 그는 무인이자 서얼이라는 신분적 한계에 끊임없이 부딪치는 역사적 약자였습니다. 그래서 처남, 매부 사이였다는 이덕무, 친구인 박제가, 박지원 등은 후세에 이름을 남긴 반면 무인 백동수는 문집은 물론 행장 하나 남은 게 없습니다. 그러나 그는 무예에 대한 열정으로 조선이라는 국가에 한없는 사랑을 던져 조선의 다시 없는 무인으로 평가받고 있습니다. ‘야뇌’라는 아호 또한 들사람처럼 거침없이 살고 싶은 조선의 청렴한 무인 백동수의 깊은 뜻이 담겨져 있습니다.
백동수는 1771년 무과에 당당히 합격했으나 관직 수가 턱없이 부족해 벼슬을 얻지 못했습니다. 그러자 미련 없이 서울생활을 청산하고 부모님을 모시고 강원도 산골에서 들어가 10여년 농사를 짓고 조선의 무예를 연마하며 보냈습니다.
이후 정조가 즉위하고 친위군영인 장용영을 조직하면서 서얼 무사들을 등용할 때 그는 창검의 일인자로 추천 받았고, 1788년 마흔 다섯에 드디어 장용영 초관에 임명되었습니다.
이듬해 가을, 규장각 검서관으로 일하고 있던 이덕무, 박제가와 함께 조선의 부국강병을 꿈꾸던 정조대왕의 명을 받아 무예서 간행작업에 들어갔습니다. 이 과정에서 백동수는 발로 뛰어 문헌기록을 하나하나 살피고, 무예에 뛰어난 장교 여종주, 김명숙과 함께 군영마다 약간씩 차이나는 무예의 기법을 통일하였습니다.
그리하여 1790년 4월 29일, 마침내 지상무예 열여덟 가지와 마상무예 여섯 가지를 총 정리하여 무예24기를 수록한 ‘무예도보통지’가 완성되었습니다. 이 책은 훈련도감, 어영청, 금위영 등의 중앙군영은 물론 팔도의 군영에 보급되어 군사훈련의 교범으로 활용되었습니다.
그러나 1800년 6월, 정조가 49세의 한창 나이에 갑작스럽게 승하하자 개혁정치와 부국강병의 상징이었던 장용영은 정조의 개혁을 반대했던 노론벽파에 의해 해체되었고 개혁인사들, 특히 군사적 역량을 장악했던 무장들이 축출되었습니다. 이 과정에서 백동수 역시 벼슬자리에서 쫓겨나고 유배형을 선고받게 됩니다.
이후 백동수는 1816년 일흔 넷의 나이로 포천 집에서 꿈에서도 그리워한 성군 정조대왕의 곁으로 떠나게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