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젊은매미372
젊은매미37223.05.02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왜 상해에서 출범을 했나요

일제시대에 나라를 빼앗기고 여러 독립운동가와 나라를 아끼는 분들이 모여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세웠는데 임시정부는 왜 상해에서 세워지게 된건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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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변의 개수3개의 답변이 있어요!
  • 탈퇴한 사용자
    탈퇴한 사용자23.05.02

    안녕하세요. 이승원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상해의 특성상 그러한 단체를 결성할 수 있는 환경적인 여건이 갖춰져 있었다고 합니다.

    한일병합조약을 통해 대한제국 황제 순종이 대한제국의 주권을 일본 제국에게 양도한 행위는 무효이며, 포기한 주권은 대한국민에게로 승계되었다는 정신이 확립되었다(대동단결선언). 이에 따라 제1차 세계 대전 이후 파리 강화 회의가 열리자, 신한청년당은 파리 강화 회의에 대표(김규식)를 파견하였고, 일본에는 장덕수를 파견하여 2.8 독립 선언을 하도록 하였다. 이러한 일련의 소식들이 식민지 조선에 전해지자 독립에 대한 희망이 생겼고, 태상황 고종의 사망으로 군중이 운집한 상황에서 3.1 운동이 일어났다.

    3.1 운동의 결과 상하이에서 항일 독립운동가들이 모여 1919년 4월 10일 임시의정원(臨時議政院)을 창설하였다. 여기에서 국호와 정부 형태, 임시헌법 등을 논의하게 되었는데, 신석우가 "대한으로 망했으니 대한으로 흥하자"라고 제안하여 국호를 대한민국으로 정하고 이와 함께 대한민국 임시헌장을 제정하였다. 이때 여운형은 "대한이란 말은 조선 왕조 말엽에 잠깐 쓰다가 망한 이름이니 부활시킬 필요가 없다."며 반대하였다고 한다. 후에 그의 조직인 조선건국준비위원회가 내세운 국호도 조선인민공화국이었다. 다음 날인 1919년 4월 11일 임시의정원은 대한민국 임시헌장을 제정하고 이승만을 초대 국무총리로 하여 상해임시정부를 결성하였다.

    이전에는 임시정부 수립일이 4월 13일인 것으로 알려져 있었다. 그러나 당시 임시정부에서 4월 11일에 정부 수립 기념식을 거행했다는 자료가 공개되었고, 학계에서 지속적으로 기념일 일자 변경을 요구해 왔다. 그래서 2018년 4월 13일에 대한민국 정부는 공식적으로 임시정부 수립일을 4월 11일로 환원하기로 하였다. 그리고 2019년부터는 4월 11일을 임시정부 수립일로 기념하기로 했다. 30년 만에 임시정부의 생일을 바로 잡은 것이다.

    상해임시정부와 비슷한 시기에 같은 기치를 내걸고 경성부에서 이승만을 집정관총재로 한 한성정부가 대조선공화국을 국호로 하여 13도 대표 국민대회의 명의로 선포되었고(1919년 4월 23일)[러시아 프리모리예 지방(연해주) 블라디보스토크에서는 대한국민의회가 결성되었다(1919년 3월 17일). 상기 단체 외에도 1919년에는 고려 임시정부, 신한민국 임시정부, 조선민국 임시정부 등 여러 단체가 우후죽순으로 생겨나 있었다. 그러나 임시정부를 칭하는 세력들이 분산되어 있을수록 항일투쟁이 힘들다는 의견이 모아져서 서로 통합을 계획하게 된다. 참고로 이승만은 고려 임시정부에서는 국무총리로, 신한민국 임시정부에서는 국방총리로, 조선민국 임시정부에서는 집정관총재 겸 국무총리로 추대되어 있었다.

    출처: 나무위키 대한민국 임시정부


  • 안녕하세요. 임지애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당시 상하이임시정부가 세워질 시점(1919년)당시 전국방방에 있는것도 모자라 중국에 까지 있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너무 많으니깐 통일하자 하여 합쳐진건데 당시 한국은 너무 위험했고 중국에선 상하이가 딱이였기때문입니다. 그이유가 상하이가 프랑스조계지여서입니다. 조계지는 주로 개항장에 외국인이 자유로히 통상거주하며 치외법권을 누릴수있도록 설정한 지역입니다. 그래서 일본이 함부로 오면 지네들이 역으로 당할수도 있어 제일 안전한곳이라 판단하고 상해에 세워졌는데 허나 윤봉길의사, 이봉창의사의 의거로 인하여 상해조차 감시가 심해져 1943년인가 1940년에 중국충칭지역으로 임시정부청사를 옮겼습니다.


  • 안녕하세요. 박남근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간단하게 답변드리면 3.1 운동이 전국적으로 확산되는 가운데 나라의 독립에 대한 민족적 욕구는 크게 확대되었습니다.

    그러나 국내에서는 일본의 감시와 무자비한 탄압이 심했으므로 국외에 근거지를 둘 수밖에 없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