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시대 김훈 최질의 난이 쉽게 마무리된 이유가 무엇인가요?
고려시대 무신정변 이전의 원조 무신정변이라고 할 수 있는 김훈 최질의 난으로 이들이 권력을 잡았지만 이후 이들이 쉽게 죽고 이들을 따르던 이들이 쉽게 항복한 이유는 무엇인가요?
반란에 성공한 최질과 김훈은 무관이 문관을 겸하게 하는 한편 어사대(御史臺), 삼사(三司)를 각각 금오대(金吾臺), 도정서(都正署)로 바꿔버리면서 권력을 장악하게 됩니다.
그러나 전 화주방어사 이자림(李子琳)이 현종에게 올린 계책에 빠져, 1015년 음력 3월, 평양 장락궁에서 열린 연회에서 반란 주동자인 김훈, 최질 등 19명을 주살되면서 김훈과 최질의 난은 어이없게 진압되었습니다.
안녕하세요. 손용준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최질은 공을 세웠음에도 문관직을 얻지 못해서 불만을 가지고 있었고, 이 와중에 중추원의 일직인 황보유의와 중추원사 장연우가 경군의 영업전을 뺏어서 백관의 녹봉을 충당하려고 했던 것이 반란의 원인이 되었다고 합니다. 이자림 (李子琳)이 현종에게 올린 계책에 따라 1015년 음력 3월, 평양 장락궁에서 열린 연회에서 반란 주동자인 김훈, 최질 등 19명을 주살시켜버리면서 김훈과 최질의 난은 어이없게 진압되었다고 합니다.
안녕하세요. 황정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평양 장락궁에서 열린 연회에서 반란 주동자인 김훈, 최질 등 핵심 인물 19명이 주살당하면서 마무리 됐습니다.
안녕하세요. 최은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전 화주방어사 아지람이 현종에게 올린 계책에 따라 1015년 음력 3월 , 평양 장락궁에서 열린 연회에서 반란 주동자인 김훈, 최질 등 19명을 주살시키면서 진압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