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종철 고문치사사건은 어떤 시대적 배경에서 일어난 일인가요?
박종철은 서울대 학생이었었는데요. 시대적 아픔을 담고있는 아픈역사인데요.
박종철 고문치사사건은 어떤 시대적 배경에서 일어난 일인가요?
안녕하세요. 임지애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박종철 고문치사사건의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1986년부터 시작된 직선제 개헌 요구는 신한민주당(신민당)을 중심으로 확대되었다. 학생·노동자 등은 이에 동조하여 반외세·반독재 등의 구호를 외치며 시위를 벌였고, 경찰과 충돌하기도 하였습니다. 이에 정부는 강경 진압에 나섰는데, 1987년 1월 서울대학교 언어학과 3학년이었던 박종철이 경찰 조사 중 사망하는 사건이 발생한 것입니다.
해당 내용을 소재로 한 영화도 개봉된 적이 있었습니다.
안녕하세요. 최은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전두환정권의 탄압과 그에 대한 저항은 1980년대 중후반에 더해가고 있었고 경찰은 민주화추진위원회사건 관련 수배자 박종운의 소재 파악을 위해 그 후배인 박종철을 불법으로 체포했습니다.
안녕하세요. 정준영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1987년 1월 당시 수사요원 조한경 경위와 강진규 경사는 서울대학교의 '민주화추진위원회 사건' 관련 수배자의 소재 파악을 위해 당시 서울대 언어학과 학생회장이었던 박종철을 조사하던 중 물고문을 가했다. 그러나 물고문 도중 박종철의 상태가 이상하자 즉시 인근 중앙대 용산병원 응급실에서 의사 오연상 씨를 불렀으나, 오 씨가 도착했을 때 이미 박종철은 사망한 뒤였다. 이에 다급해진 경찰은 1월 14일 오후, 증거인멸을 위해 보호자와 이미 합의를 했다며 서울지검에 시신의 화장을 요청하지만 거부되었다. 그리고 1월 15일 석간신문에 조사받던 학생이 쇼크사했다는 기사가 나가면서 경찰의 가혹행위 가능성이 조심스럽게 제기되기 시작했다. 그리고 1월 15일 오후 강민창 치안본부장은 박 군의 변사 사실을 공식 시인했으나, 사인을 단순 쇼크사인 것처럼 발표했다. 다음은 당시 강 치안본부장이 발표한 내용의 일부이다.
냉수를 몇 컵 마신 후 심문을 시작, 박종철 군의 친구의 소재를 묻던 중 갑자기 '억' 소리를 지르면서 쓰러져, 중앙대 부속 병원으로 옮겼으나 12시경 사망하였다.
그러나 1월 16일자 신문에 숨진 박종철의 오른쪽 폐에 탁구공 크기만한 출혈이 있었다는 부검 입회 가족의 증언이 실리고, 17일 사체를 첫 검안한 의사 오 씨의 “조사실 바닥에 물이 흥건했다.”는 등 고문 시사 증언이 보도됐다. 결국 치안본부 특수대는 1월 17일 수사에 착수했으며, 19일 고문사를 공식인정하면서 조한경과 강진규는 고문 치사 혐의로 구속됐다. 이어 2월 27일 검찰은 3명의 공범이 더 있다는 자백을 들었으나 경찰의 방해로 수사에 착수하지 못했다.
그러나 5월 18일 천주교 정의구현 사제단에 의해 해당 내용이 폭로됐고, 이에 5월 20일 공범이었던 황정웅, 반금곤, 이정호 등이 즉시 구속되었다. 그리고 5월 29일에는 2억 원 입금 통장 등으로 범인 축소조작에 나선 박처원 치안감, 유정방 경정, 박원택 경정 등 3명이 범인도피죄로 구속됐다. 박종철 사망 사건 이후 전개되던 고문정권 규탄 및 민주화투쟁은 고문가담 경관이 모두 5명이었다는 사실이 새롭게 밝혀짐에 따라 더욱 격렬히 전개되기 시작했고, 이는 6월항쟁으로 이어졌다.
한편, 사건 발생 1년 후인 1988년 1월 15일 황적준 국립과학수사연구원 과장의 경찰 회유 메모가 보도되면서, 강민창 당시 치안본부장이 직권남용 및 직무유기 혐의로 구속되었다. 이후 박종철 군의 유족은 국가를 상대로 손해배상 청구소송을 내, 2억 4000여 만원의 배상금을 지급받게 되었다. 그러자 국가는 다시 고문사건에 연루됐던 일선 고문경관들을 상대로 구상금 청구소송을 냈으며, 대법원은 2000년 12월 26일 "배상액의 70%를 일선 고문 경관들이 배상하라."는 판결을 내렸다.
출처 : 시사상식사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