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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도내일도모레도
오늘도내일도모레도24.03.12

선조가 요동으로 넘어가지 못한 이유가 무엇인가요?

선조는 국가가 망할 위기에 처하자 그 즉시 도망쳐 압록강인근의 의주로 간 뒤 요동으로 넘어가 새로운 정권을 수립하려시도했지만 실제로 실행에 옮기지는 못했는데 그 이유가 무엇이었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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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변의 개수6개의 답변이 있어요!
  • 안녕하세요. 유영화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선조가 임진 왜란 발발 직후 한양을 버리고 평양, 의주를 거쳐 요동으로 망명하려 했으나 실현되는 못했습니다. 그 이유는 사실상 명나라가 거부했기 때문입니다. 명나라는 조선 국왕이 전쟁 중에서 조선을 버릴 수없다고 여겼으며, 오히려 조선이 일본과 내통하여 요동을 치려한다고 의심하였기 때문에 허용하지 않았습니다.

    또한 류성룡 등 대신들이 결사적으로 요동 망명을 반대했습니다. 특히 류성룡은 세자에게 왕권 이양 카드까지 내세우며 반대했다고 합니다. 만약 선조의 목적대로 요동 망명이 성사되었으며, 조선군의 사기가 저하되어 의병 활동이 약화되었을 것으로 판단됩니다.


  • 안녕하세요. 황정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왕이 둘이고,조정이 둘이라는게 어찌 있을 수 있냐는 신하들의 반대에 부딪히면서 임시조정을 수립하지 못한듯 합니다.


  • 안녕하세요. 손용준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선조가 요동으로 망명하려 도모했음은 사실인데 이는 비판받아 당연한 일입니다. 그러나 현명한 대신들의 반대를 받아들여 요동 망명을 접고 의주로 파천을 함으로써 그나마 결사 항전의 의지를 남은 의병들에게도 보여 줄수 있었다고 보여 집니다.


  • 안녕하세요. 김기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선조는 1592년 임진왜란 당시 왜군이 충주 탄금대전투에서 신립장군이 이끄는 대군을 혁파하고 한양으로 파죽지세로 진군해오자 위기의식을 느껴 신하들의 만류에도 평양을 거쳐 의주 바로 아래 용성으로 피신하였고 광해군을 세자로 봉하여 분조를 담당하게하였습니다. 명나라 원군을 수차례에 청하였고 요동으로 피신코자 하였으나 신하들의 만류와 이순신 장군의 승전 소식을 접하고 망명을 포기하였습니다.


  • 안녕하세요. 서호진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요동은 당시 조선 땅이 아니었습니다.

    즉, 요동으로 넘어 간다는건 임금이 나라 밖으로 나간 단 것.

    현대 대통령 들도 전쟁때 나라 밖으로 나가면 겁쟁이라고 욕을 먹을 탠데

    무려 중세 왕이 그런 짓을 하면

    왕조 망하는거 순식간이라서 신하들이 필사적으로 뜯어 말렸습니다


  • 안녕하세요. 장경수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6월 13일 영변에 도착한 선조는 국정 권한을 세자 광해군에게 넘기고 자신은 요동 망명을 결심했다. 14일에 선조는 망명 의사를 밝히는 외교문서를 명나라 요동 도사에게 보냈다.


    그런데 6월 18일에 요동 도사는 선조가 진짜 임금인지를 확인했다. 왜냐하면 왜군이 가짜 왕을 세워서 요동에 진입한다는 소문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명나라 병부도 선조가 왜적을 만나자마자 도주한 것은 이상한 일이라면서 조선이 일본의 길잡이가 아닌지 하는 의구심을 계속 표명했다. 결국 선조는 진짜 조선 왕인지 아닌지를 확인당하는 수모를 겪어야 했다.


    6월 22일에 의주에 도착한 선조는 신하들에게 요동행을 독촉했다. 이러자 류성룡과 윤근수가 극력 말렸다. 6월 24일에도 선조는 요동행을 재촉했다. 그런데 명나라가 선조가 망명하면 관전보(寬奠堡)의 빈 관아에 안치한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관전보는 압록강 건너편 지금의 단동에 여진족을 막기위해 명이 쌓은 작은 성이었다. 이러자 선조의 망명 소동은 잠잠해졌다.


    “명나라가 장차 상을 관전보의 빈 관아에 거처시키려고 한다는 소식을 듣고는, 상이 드디어 의주에 오래 머물 계획을 하였다.”(1592년 6월 26일 선조실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