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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신한호박벌1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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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사오적의 최후는 어떻게 되었나요?

우리나라가 가장 어려울 시국에 을사오적 매국노는 나라를 등을지고 호의호식하면서

지냈을 것 같은데, 최후에 어떤 인생을 살았는지 궁금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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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9개의 답변이 있어요!
    • 활달한파리매77
      활달한파리매77

      안녕하세요.제가 알고 있는 사람은 이완용입니다. 다른사람은 자세히 모르나 이완용은 이승만 대통령에 의해서 다시 등용된 걸로 알고 있습니다. 많은 친일파들이 아무런 벌도 받지 않았습니다. 사형선고 받은 사람이2명인가 있는데 그들도 사형이 실제로 집행되지는 않았답니다.

    • 안녕하세요. 이진광 인문·예술 전문가입니다. 교양만두란 유투브 보면 10분 단위로 을사 오적의 최후가 나옵니다. 다들 불행하게 끝났습니다.

    • 안녕하세요. 최은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매국으로 부와 명예를 얻은 이들은 암살시도가 계속 되어 가까스로 목숨을 부지한 이들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들은 죽을 때까지도 자신이 지은 죄값은 치르지 않았습니다.

      이완용은 1910년 한일 강제 병합 이후 일본으로부터 훈 1등 백작 작위를 받았고 이때 그가 벌어들인 돈은 현재 가치로 400억에서 450억 정도이며 경기도와 전라도 일대에 소유했던 땅은 여의도 면적에 7.7배에 달합니다.

      1920년 후작으로 승급한 이완용은 1926년 68세의 나이에 폐렴으로 사망했습니다.

      그는 죽기 전 유언으로 아들에게 내가 보기에는 친미파가 득세할 듯하니 넌 앞으로 친미파가 되라고 했습니다.

      이근택은 을사늑약을 체결 후 집으로 돌아가 우리집안은 부귀가 지금부터 크게 시작될 것이니 장차 무궁한 복과 즐거움을 누릴것이다 라고 합니다.

      이근택은 1910년 한일강제병합에 협조한 공로로 일본 정부로부터 훈1등 자작작위를 받고 조선총독부 중추원 고문에 임명되었습니다.

      황현의 매천야록에 의하면 그는 항상 일본 신발을 신고 일본 수레에 앉아 일본군의 호위를 받으며 다녔고 용인 민속촌에 있는 99칸짜리 집이 이근택의 별장으로 알려져있으며 당시 왕을 제외한 사람이 지을 수 있는 가장 큰 집이 99칸이었습니다.

      그는 55세의 나이로 사망하고 그의 아들 이창훈은 아버지의 작위를 습작해 대를 이은 친일을 도모했습니다.

      이지용은 한일강제병합에 협조한 공로로 1911년 은사공채 10만엔을 받았는데 지금의 20억정도입니다.

      당시 일본은 조선인 귀족에게 은사 공채를 지급했는데 은사공채증권을 받게 되면 원금을 5년 거치후 50년 이내로 상환받을 수 있었습니다.

      이 공채의 연 5%이자가 붙고 매년 3월과 9월에 지불되었는데 이지용의 경우 6개월에 한번씩 5천만원을 이자로 받았습니다.

      이지용은 이런 돈을 도박에 탕진했고 도박죄에 걸려 귀족 예우가 정지되기도 했지만 더 열정적인 친일로 다시 귀족 작위를 받고 59세의 나이로 죽을때까지 수당을 받으며 호희호식했습니다.

      박제순은 한일강제병합이우 성균관의 후신이었던 경학원 대제학으로 임명되어 친일 활동을 이어나갔고 일본의 총독 정치 옹호 선전을 하며 일본을 유람하다 1916년 59세의 나이로 사망했습니다.

      박제순의 아들들은 아버지의 작위를 이어받아 당시로서는 드문 오토바이를 타고 다니며 호의호식했고, 그의 손자 박승유는 할아버지의 명예와 부를 포기하고 독립운동에 나섰지만 결국 매국노의 자손이란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했습니다.

      권중현은 을사늑약이 체결 된 후 1908년 훈1등 욱일대수장을 받았고 욱일대수장은 일본 정부가 국가에 공로가 있는 이들에게 수여하는 욱일장 중 가장 높은 등급의 훈장입니다.

      1919년 3.1운동이 일어나자 겁을 먹고 귀족 작위 반납을 신청하나 일본 정부는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3.1운동이 잠잠해진 후 다시 친일활동을 하고 노년의 그는 매년 수당으로 3천원(약 6억)정도받으며 살다 1934년 81세로 사망합니다.

    • 안녕하세요. 이주연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많은 친일파들이 아무런 벌도 받지 않았습니다.


      사형선고 받은 사람이2명인가 있는데 그들도 사형이 실제로 집행되지는 않았답니다.


      이승만 대통령..... 그리고 미군 당시 미군이 우리나라를 통치했는데(군정이라 하죠)그당시의 지식인들은 죄다 친일파들이었습니ㅏㄷ. 그래서 미군으로써는 무식한 사람들을 쓸봐에 그냥 친일파들을 썻죠...


      이승만 대통령도 미군의 그런 압력을 무시하지 못했겠죠...?


      만약 김구선생님이 대통령이 됬다면 처단 되었으리라 생각합니다.


      그리고 북한은 친일파 모두 처단 했습니다.


      아 그리고 을사오적 모두 벌을 받지 않았습니다.

    • 안녕하세요. 손용준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아쉽게도 을사오적들은 독립 후에도 그 자손 들까지도 부귀 영화를 누리고 잘 살다 갔다고 하네요. 친일에 대한 적폐를 할수 있는 권력이 이미 없었고 그를 심판해야 할 사람들이 전부 다 친일파 였기에 더욱 더 그들을 단죄 할 방법이 없었겠지요. 우리 역사의 아쉬운 부분들 입니다.

    • 안녕하세요. 김태호 인문·예술 전문가입니다.

      을사오적은 조선시대 16세기 후반의 일어난 사건으로, 임진왜란 중에 일어난 사건 중 하나입니다. 이 사건은 대전쟁이 일어난 전라도 지방에서 일어난 반란으로, 군사적으로는 이순신 장군이 이끌었으며, 이를 계기로 조선 왕조의 중앙정권이 복구되었습니다.

      그러나 이 사건에서 참여한 일반 군인들과 노비들 중에는 왜구의 부대와 협력하거나, 명나라와 연계하는 것을 지지하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이들은 대전쟁에서 패배하고 조선 왕조에 의해 처형되었거나 유형되는 등의 처벌을 받았습니다. 이러한 처벌로 인해, 을사오적은 결국 참여한 많은 사람들의 비극적인 최후를 맞이하게 되었습니다.

    • 안녕하세요. 박세공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이들은 을사늑약후 일본으로부터 귀족 작위를 받았고, 막대한 부도 손에 넣었습니다. 그들의 최후를 살펴보면

      이완용- 잘먹고 잘살다 68세의 나이에 폐렴으로 사망함. 사망 직전에 아들에게 남긴 유언 "내가 보기에는 친미파가 득세할 듯하니 넌 앞으로 친미파가 되어라"

      이근택-잘먹고 잘살다 55세 나이로 사망함. 용인 민속촌에는 있는 99칸짜리 집이 이근택의 별장으로 알려져 있음.

      이지용-잘먹고 잘살다 59세로 사망.

      박제순-잘먹고 잘살다 59세로 사망.

      권중현-잘먹고 잘살다 81세 천수를 누리고 사망.

      이러고 보니 뭔가 속에서 부글 부글 끊어 오르는것이 느껴 집니다. 그당시 평균 수명이 32.4였다는데 이들은 장수를 누리며 후손에게까지 친일 뿐 아니라 부를 물려 주며 잘 먹고 잘 살았다니,,,,,,

    • 안녕하세요. 박일권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을사오적뿐만 아니라 많은 친일파들이 제대로 처벌받지 않고, 재산 또한

      몰수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그의 후손들은 친일 행위로 축적한 재산으로 호의호식하였습니다.

    • 안녕하세요. 김동연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을사오적(乙巳五節)은 1728년 조선시대에 일어난 세습 왕위 선거 사건입니다. 이 사건에서 정조의 아버지인 영조가 대권을 놓고 정조와 대립하며 권력을 쟁탈했습니다. 하지만 영조는 정조의 승리로 인해 권력을 잃고 숙저(淑昭)로 내려갔습니다.

      그 후, 영조는 자신의 아들인 정조와의 대립을 멈추지 않았고, 1762년에는 정조의 왕위를 놓고 또 다시 반란을 일으켰습니다. 하지만 이번에도 영조는 패배하고 자살하게 됩니다.

      즉, 을사오적의 최후는 영조가 두 차례에 걸쳐 정조와의 대립에서 패배하고 권력을 잃은 후, 자살로 끝났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