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리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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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청시대에 후궁들의 암투가 극심했나요?

중국 사극을 보니 후궁들이 온갖 계략을 꾸미고 후궁들의 암투가 극심하던데요,

당시 고려나 조선은 후궁들의 암투가 많지 않았는데요,

명,청시대에는 후궁들의 암투가 그렇게 극심했나요?

4개의 답변이 있어요!

  • 명나라와 청나라 시절 후궁 제도는 규모 자체가 압도적으로 컸기 때문에 후궁 암투가 상대적으로 극심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명나라는 100명 이상 청나라는 초기에 30~40명 시작으로 전성기에는 수백 명까지 후궁이 있었다는 기록이 있는데 후궁 수가 많을수록 경쟁이 심화되고 권력이나 안전, 지위, 생존문제로 경쟁적으로 암투가 벌어졌습니다. 실제 기록에는 명나라 영락제, 선덕제 당시 궁중 암투에 대한 기록이 묘사되어 있고 청나라 현종 때 후비들 간 보이지 않는 경쟁을 기록되어 있습니다. 조선은 정식 후궁은 대부분 3~10명 이내이기 때문에 세력이나 경쟁이 매우 제한적이였습니다.

  • 중국이나 우리나라나 마찬가지 입니다 우리나라 같은 경우에도 후궁들간에

    암투가 매우 심하다고 전해 내려오고 그리고 사극으로도 만들었는데요 그리고

    중국도 마찬가지 입니다 특히 가장 잘알려진 동태후와 서태후의 암투는

    권력을 둘러싼 최고의 암투라고 잘알려져 있습니다

  • 암투는 전세계 언제 어디서나 있습니다.

    아마 오늘날 재벌가에도 있겠죠.

    그런데, 밖으로 드러나서 싸우면 그건 암투라고 안부릅니다. 장희빈 정도로 난리를 쳐서 기록에 넣을 수 밖에 없어야 암투이지만 기록이 되는 거에요.

    그래서 명,청시기 임투기록이 많은 겁니다.

    말그대로 망해도 3대는 먹고사는 당시 최대강대국의 안방주인자리니까

    쓸수있는 권력도 많고 관련된 사람도 많아서

    암투의 일부가 드러나는 경우다 자주 있었던 거죠

  • 명청 시대 황실 후궁 제도는 규모가 크고 계층이 촘촘하게 나뉘어 있어 경쟁 구도가 강했습니다.

    황제의 총애가 권력, 재산, 가문의 지위를 직접 좌우했기 때문에 후궁 간 갈등이 기록에서도 비교적 자주 나타납니다.

    후궁 수가 많고 환관, 내고나 체계가 복잡해 정보전과 파벌 형성이 불가피한 구조였다는 점도 갈등을 키웠습니다.

    고려, 조선은 후궁 수가 훨씬 적고 특히 조선은 처첩제가 안정된 틀 안에서 운영되어 극단적 암투가 드러날 여지는 작았던 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