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탈퇴한 사용자
탈퇴한 사용자23.06.02

고려시대 불교가 번성할 수 있었던 시대적 배경은 무엇이었나요?

고려시대에는 유교와 불교가 함께 발전하였는데 유교는 정치와 관련한 치국의 도로서 불교는 신앙생활과 관련한 수신의 도로서 서로 보완하는 기능을 수행하면서 함께 발전할 수 있었다고 하는데요. 궁금한게 불교가 그당시에 크게 번성할 수 있었던 시대적 배경은 무엇이었는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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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안녕하세요. 이승원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고려시대의 불교는 신라불교를 그대로 계승하는 한편 송(宋)나라의 영향 아래 독자적인 발달을 이루었다. 태조 왕건(王建)은 불교를 국교로 정하고 새로 승과(僧科)를 제정하여 승려를 우대하였습니다. 연등회(燃燈會)ㆍ팔관회(八關會) 등을 연중행사로 개최하는 등 태조의 숭불정책은 고려 전반에 걸쳐 계승되면서 사상적 지주가 되었습니다. 당시에 건립된 사찰로는 개성의 왕륜사(王輪寺) ㆍ 법왕사(法王寺)를 비롯한 16사(寺)와 봉은사(奉恩寺)ㆍ진관사(津寬寺)ㆍ부석사(浮石寺)ㆍ관음사(觀音寺)ㆍ숭교사(崇敎寺)ㆍ석왕사(釋王寺)ㆍ영명사(永明寺) 등이 있으며, 공예품으로는 관촉사(灌燭寺) 석등, 부석사 조사전벽화(祖師殿壁畵), 대흥사(大興寺)의 종 등 우수한 예술품을 낳았습니다.

    특히 문종(文宗) 연대에는 고려판 팔만대장경(八萬大藏經)을 간행하여 한국불교문화의 대표작을 남겼다. 고려는 불교를 국교로 삼았음에도 이름난 고승은 많이 배출되지 못하였다. 그 중에서 체관(諦觀)은 천태종을 재흥시켰고, 대각국사(大覺國師) 의천(義天)은 문종의 아들로 일찍이 11세 때 승려가 되어 송나라에 유학한 후 교장도감(敎藏都監)을 설치, 속장경(續藏經) 4,740여 권을 간행한 것은 특기할 만하며, 또 문하생이 1,000명이 넘었다고 합니다. 의천이 개창한 천태종은 명실상부한 하나의 종파로서 부각되었다. 천태종이 개창되고부터 중기 이후에 선불교는 상당히 부진했습니다. 게다가 고려 중기에는 승려들이 타락하고 법문의 문란이 극에 달해 표면상으로만 화려한 불사들이 이어졌다. 특히 지눌(知訥)은 부처님의 뜻을 전하는 것이 선(禪)이요, 부처님의 말씀을 깨닫는 것이 교(敎)라고 믿었기 때문에 선과 교는 떨어질 수 없는 사이라고 주장하였습니다. 그는 선교합일의 정혜쌍수를 표방하고 대각국사 의천의 교관병수(敎觀修) 사상과 그 맥을 같이 합니다.

    그 밖에도 고려 중기에는 수기(守其)ㆍ균여(均如)등이 활약하였으며, 고려 말기에는 나옹(懶翁)ㆍ보우(普愚)ㆍ보조(普照)ㆍ백운(白雲) 등이 이름을 떨친 고승들이었습니다. 고려의 불교종파는 신라의 종파가 계승되었다가 말기에 다소 분화되어 조계종(曹溪宗)ㆍ천태법사종(天台法師宗)ㆍ천태소자종(天台疏子宗)ㆍ화엄종ㆍ총남종(摠南宗)ㆍ자은종(慈恩宗)ㆍ신인종(神印宗)ㆍ남산종(南山宗)ㆍ도문종(道門宗)ㆍ중신종(中神宗)ㆍ시흥종(始興宗)의 11종이 성립되었으며 그 중 화엄ㆍ자은ㆍ총남ㆍ중신ㆍ시흥의 5종을 5교(敎), 조계ㆍ천태의 2종을 양종(兩宗)이라 하여 5교 양종의 종파를 이루었다. 이처럼 고려불교는 여러 종파의 확립과 더불어 불교가 국운을 번영하게 하는 데 지대한 역할을 합니다. 사원은 법력으로 나라를 수호하는 장소였으며 국왕에게 여러 왕자가 있다면 한 사람은 승려로 만들 정도였습니다. 불교가 국가의 정신지주로 신봉되면서 나라가 위급할 때 구국불사로서 거대행사도 성행하였습니다.

    [네이버 지식백과] 고려시대 불교 (문화원형백과 승려의 생활, 2005., 문화원형 디지털콘텐츠)


  • 안녕하세요. 임지애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고려시대의 불교는 신라불교를 그대로 계승하는 한편 송(宋)나라의 영향 아래 독자적인 발달을 이루었다. 태조 왕건(王建)은 불교를 국교로 정하고 새로 승과(僧科)를 제정하여 승려를 우대하였습니다. 연등회(燃燈會)ㆍ팔관회(八關會) 등을 연중행사로 개최하는 등 태조의 숭불정책은 고려 전반에 걸쳐 계승되면서 사상적 지주가 되었지요.

    도선 국사의 풍수사상은 고려를 창시한 태조 왕건에게 커다란 영향을 주었습니다. 왕건은 훈요십조를 통해 불교를 국시로 내걸고 고려를 다스려나갈 통치 이념을 세웠으며 그러한 정신은 고려의 모든 역사를 통해 지속되어 왔습니다. 고려 시대 내내 고승대덕들이 국가나 임금의 스승인 국사나 왕사로 모셔졌으며 국가적인 대규모의 법회도 많이 열어 부처님의 가피로 국가를 외침과 환난에서 보호하고자 했습니다.

    출처 - 지식백과 고려시대불교


  • 든든한소쩍새224
    든든한소쩍새22423.06.02

    안녕하세요. 김종호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우리가 흔히 고려를 불교국가라 할 만큼 고려시대에 불교가 차지하는 비중은 큰 것이었다. 고려의 불교는 위로 왕실로부터 아래로 일반백성에 이르기까지 신앙의 대상이 되면서 사상면 뿐 아니라 일상생활에까지 깊은 영향을 끼쳤다. 이처럼 고려사회에서 불교가 차지하는 비중은 매우 큰 것이었지만, 나말려초의 정치적 혼란기에는 이것 역시 많은 어려움을 겪지 않을 수 없었다. 고려가 통일되기 이전의 신라사회는 敎·禪간의 대립이 심화되면서 경전 중심의 교종에 반대하고, 不立文字·見性悟道를 중시하여 修心과 실천을 강조하고 나선 선종이 지방호족의 지지를 받으면서 크게 번성하게 되었다. 그런데 불교계의 분립은 여기에서 그치지 않고 교종과 선종 내에서도 다시 종파간에 대립이 일어나 그 양상은 더욱 복잡해져 갔다.

    -출처:우리역사넷


  • 안녕하세요. 정준영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삼국을 통일하여 강대한 국가를 형성했던 신라도 그 말기에 이르러서는 정교(正敎)가 어지럽게 되었고, 이러한 혼란기에 후백제와 태봉의 두 나라가 새로이 일어나서 다시 삼국이 병립하게 되었습니다.


    태봉의 왕 궁예(弓裔)는 불교에 대한 믿음이 매우 두터운 사람이었습니다. 그가 나라를 세우고 왕이 된 뒤에는 팔관회를 비롯한 많은 불교행사를 가졌으며, 스스로를 미륵불이라 하고 두 아들을 청광보살(靑光菩薩) · 신광보살(神光菩薩)이라고 이름하였을 뿐 아니라 스스로 20여 권의 경을 지어 강설하기도 하였습니다. 후백제의 왕 견훤(甄萱) 역시 궁예에 못지않은 불교신자였습니다.


    이와 같이 후삼국은 모두 불교를 숭상하였고, 후삼국을 통일한 고려의 태조 왕건(王建)도 불교를 숭상하여 국가적으로 크게 보호, 장려하였습니다. 태조는 불교와의 인연이 매우 깊었던 사람입니다. 그는 불교를 크게 신봉하였던 가정에서 태어났으며, 출생을 전후해서부터 청년기에 이르기까지 도선(道詵)의 명성을 들으면서 많은 영향을 받기도 하였습니다.


    그는 고려를 건설하고 후삼국을 통일할 수 있었던 것이 오직 불교의 힘에 의해서라고 믿었습니다. 이와 같은 태조의 태도와 신념은 결과적으로 고려 전체의 불교를 왕성하게 하고, 또 국가의 종교를 불교로 결정지었던 것입니다.


  • 안녕하세요. 손용준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고려가 불교를 국가의 기본 종교로 삼은 이유는 고려를 세운 왕건에게서 찾을 수 있는데 왕건은 불교의 도움으로 자신이 고려의 왕이 되었다고 믿었습니다. 그래서 불교 발전을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습니다. 그리고 더선 대사와의 이야기가 나오는데 고려사에서는 왕건이 태어날 때 신비한 광채와 자줏빛 기운이 방 안 가득 빛나고 하루 종일 뜰에 서려 있었다고 적었다고 합니다. 왕건의 아버지인 왕륭은 도선대사의 예언대로 아들이 태어나자 이름을 건이라 지었다고 하는데 왕건이 17살이 되자, 도선대사가 다시 송악으로 그를 찾아와 군사학과 천문학, 제례법등을 ,제례법 등을 가르쳤다고 하는 야사가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