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대에 따라 금과 은의 가치는 차이가 있었다고 들었는데 왜 그런건가요?
안녕하세요? 예전부터 시대에 따라 희귀 광물들의 가치가 차이가 있다고 들었습니다. 화폐 대용으로 사용된 금과 은의 가치는 시대에 따라 차이가 있던데 왜 그런건지 궁금합니다.
안녕하세요. 봄여름가을겨울입니다.
금과 은은 가치가 있는 자산입니다. 실물 자산이라 인플레이션 헷지수단으로 아주 좋은 재테크입니다.
자산이라서 시대에 따라 가치가 다르지만 화폐는 갈수록 가치가 없어지므로, 더욱 가격이 오를것입니다.
안녕하세요. 자드락비입니다.
(금)출처 : https://namu.wiki/w/%EA%B8%88
(은)출처 : https://namu.wiki/w/%EC%9D%80
<금의 경제적 영향과 가치>
<금의 역사>
6.1. 한국[편집]대한민국에서는 신라, 가야 등에서 금관, 귀걸이, 허리띠 등 금으로 된 유물이 많이 출토되고 있다. 신라에서는 금입택이라는 기와에 금을 씌운 기와집이 유행했고, 개목걸이조차 금으로 만들었다고 하는 기록도 있으며, 금보다 옥이 더 가치 있었다는 이야기도 있다. 다만 이 금으로 만든 유물은 금광이 아니라 사금을 통해 재료를 구한 것이라는 의견이 있다. # 과거에 경주를 금성이라 부른 이유도 사금이 많이 나서였고, 천년을 이어온 신라가 멸망한 것도 그 일대의 금이 고갈되었기 때문이라는 말도 있다.
6.2. 해외[편집]
그렇게 과거에 많이 파헤쳤음에도 불구하고 고려시대에도 여전히 금은 출토되었다. 특히 불교를 숭상하던 고려에서는 금으로 만든 불상도 많이 제작되었고, 신라의 금입택만큼은 아니지만 왕궁이나 절의 기와에도 금을 군데군데 입히곤 했다. 조선시대에도 마찬가지였다. 금을 이용한 귀걸이 등의 장신구는 조선 초기 선비들 사이에서 머스트 해브 아이템으로 여겨지기도 했다. 하지만 중국이 알게 되면 분명 조공으로 많은 양의 금을 요구할 것이 뻔하므로, 조정에서는 검소함을 강조하며 금의 사용을 자제하도록 하기도 했다. 여기에는 불교에 젖어있던 사회 분위기를 성리학적으로 다잡기 위한 이유도 있었다. 그리고 세종 때 기존 조공인 현금과 같은 가치를 지닌 금과 은 대신 군마를 주는 것으로 조공은 쏠쏠한 거래가 되었다.[15] 원래 고대부터 남자들도 귀금속으로 만든 귀걸이를 착용했지만 조선 후기 들어서 금지된다.
한국에서 본격적으로 금 채굴 붐이 일어난 것은 일제 강점기였다. 그 절정은 1930년대였는데 당시 아시아 최대의 금광이었던 평안북도 운산 금광을 필두로 전국에 무려 3,000여개의 금광이 채굴 중이었다고 한다. 금광석은 화강암에서 산출되는 경우가 많은데 화강암이 많은 한국의 지질 조건상 금 매장량이 풍부할 수밖에 없었다. 당시 중일 전쟁 중이던 일본은 군수물자 결제 대금 조달을 위해 식민지 조선에서 대량의 금을 가져가야 했다. 따라서 금산 장려 정책을 펼쳐, 조선인들에게서 광업권을 마구 사들이고, 금광 개발 장려금까지 뿌렸다. 금광 개발이 돈이 된다는 소문이 퍼지자 너도나도 금 캐기에 열광했는데 이때 자수성가한 황금 부자의 대표적 인물이 최창학, 방응모였다. 또한 일제강점기에는 금본위제로 인해 전국곳곳 금광열풍이 불었는데, 황금광 시대라는 책을 보면 일제강점기의 금광열기를 대강이나마 실감할 수 있다. 대략 점잖은 신문 편집인, 지식인 같은 사람들도 금에 미쳐 이곳 저곳 땅을 헤집고 다녔다니 그 열기가 굉장했는지 알 수 있다. 김유정의 금 따는 콩밭이 그러한 세태를 배경으로 한 작품. 1930년대 내내 이어진 황금광 시대는 태평양 전쟁과 함께 미국이 일본과의 무역을 중단하고 자산 동결조치를 취하면서, 일본이 금산 장려 정책을 중단하자 막을 내렸다.
일제강점기 한반도의 금광 중에서는 노다지라는 단어를 만들어낸 운산 금광이 특히 유명하다. 이것도 미국이 수십 년간 파먹었다. 이 운산 금광의 가치는, 단일 금광으로서 아시아 최대 규모였으며 잠시동안 일본을 금 생산 세계 4위로 만들 수준이었다. 1920년대 기준 한반도 전체 금 생산액의 절반을 차지했고 고용 인원만 1만 명을 넘는 거대한 광산이었다.
해방 이후에는 광업권 이전 문제, 금광 채굴 기술 문제로 인해 대부분의 금광의 운영이 중단되었다. 하지만 청양군의 구봉광산 등 몇몇 광업소가 존재했으나 1997년 금광 채굴이 전면 중단되었다. 현재는 2002년부터 채굴을 시작한 전남 해남군의 은산광산이 한해 약 250kg[16]의 금을 생산하고 있다.
과거에는 1960-80년대 한국에서는 금 생산은 줄어들고 외화부족으로 수입이 어려워 금이 비쌌기 때문에 금 밀수입이 성행했다. 홍콩에서 금을 싸게 사서 몰래 밀수해 국내에서 팔면 2-3배에 팔 수 있다고 했다. 아직도 한국의 금값이 국제시세보다 비싸 간간히 밀수사건이 발생하고 있다.죽은 사람의 입에서 금니만 전문적으로 절취한 장례업자들이 불구속 입건된 사례도 있다.# 2차 세계대전 당시 유대인 홀로코스트 때에도 유대인의 시신을 화장할 때 금니를 빼돌렸다고 한다. 또한 태평양 전쟁에서도 미군이든 일본군이든 살아있든 죽어있든 적에게서 금니를 전리품으로 갈취했다고 한다. 더 퍼시픽, 씬 레드 라인에서도 이런 장면이 잘 묘사되어 있다.
천자문에도 금생여수 옥출곤강(金生麗水 玉出崑岡)이라고 금은 여수(운남성 영창부)에서 나고 옥은 곤강(강소성 강도현 곤륜산)에서 난다는 말이 있었다.
금을 싫어하는 사람은 도인이나 최영 장군 빼면 거의 없겠지만, 그 중에서도 양판소의 근간인 유럽은 진짜 금에 환장한 역사를 갖고 있다. 북유럽 신화에는 황금에 대한 욕심 자체를 상징하는 신이 있을 정도며, 설탕, 커피, 고무 등 플랜테이션 농업에 의한 착취도 유명하지만 이것들은 금을 얻기 위한 정복과정에서 부수적으로 얻은 산물에 불과하다. 이러한 열망 때문에 유럽이 다른 문명을 제치고 세계사의 주역이 되었다고 분석한 학자도 있다. 금 아니면 아메리카를 발견할 동기가 없었다고까지 말할 정도다! 유럽이 타 문명의 값진 물건들을 사오려면 그 대금을 금은보화로 결제해야 했기 때문에 이런 현상이 일어났다고 한다.
구대륙이나 신대륙이나 금은 신의 금속으로 신화와의 연관성이 짙은데, 구대륙에서는 '신의 금속이니 그 만큼 귀한 거'라는 바탕이 깔려있어 화폐가치를 지니게 된 반면 신대륙에서는 '신의 금속인데 내가 가져서 뭐함?' 같은 생각에 신전 등 신과 관련된 곳에만 쓰였다. 이 동네 언어 중 나우아틀어로 금은 테오쿠이틀라틀 = 신의 배설물이란 뜻이다...명칭이야 이렇지만 남미권에서도 금이 귀한 취급이긴 마찬가지긴 했다. 다만 금보다는 케찰새라는 중남미 토착 조류의 깃[17]과 옥[18] 쪽을 더 가치가 높은 것으로 쳤다.
유럽인을 처음 본 아메리카 원주민들이 유럽인에게 금으로 된 성물을 바친 것도 유럽인을 신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라는 속설이 유명하다. 이들의 신인 케찰코아틀은 백인의 모습을 가지고 있으며, 떠나기전 꼭 돌아온다는 말을 남기고 떠났다고. 그러나 콩키스타도르들과 그 뒤에 있었던 유럽 기독교 세력이 의도적으로 와전시킨 끝에 나온 왜곡된 역사적 언급이 널리 퍼진 것 뿐이다.[19] 실제로는 그들에게 케찰새의 깃이나 옥보다 가치가 덜한 금을 백인들이 탐내자 쿨하게 준 것에 가깝다. 결과적으로는 그런 행동이 화를 불렀다. 금이 있다는 것과 그들이 금을 순순히 주는 것을 보고 원주민들 동네에 금이 풍족하다는 사실을 알아낸 백인들은 결국 총칼을 들고 돌아와 금을 착취하게 된다.[20] 이 때 백인들이 벌인 중남미의 황금 착취에서 아마도 엘도라도가 파생된게 아니냐는 추측도 있다.[21]
아메리카 원주민들이 금을 돌보듯이 한 가장 큰 이유는 이걸 캐낼 기술이 그들에게 없었기 때문이다. 금을 '신의 금속이니까, 내가 가져봐야 소용없음'이라고 생각한 진짜 이유가 바로 이것이다. 금이 있어봐야 캐낼 수 없으면, 그냥 빛나기만 하는 돌덩어리에 불과할 뿐이다.[
<은의 역사>
4.1. 고대[편집]금과 은이 기록에 처음으로 나타나는 수메르 시대부터 금이 은보다 훨씬 비싼 금속이었으나 고대의 몇몇 사례에서는 은이 금보다 귀한 금속 취급 받은 적이 있다. 기원전 30세기 고대 이집트에선 은이 금의 2.5배의 가치를 지니고 있었고 그 후에도 상당기간 은이 금보다 귀중한 귀금속으로 여겨졌다. 이는 금은 이집트 땅에서 나지만 은은 수입에 의존했기 때문이다.링크. 이후 중왕국 시대인 기원전 22세기 무렵엔 금의 가치가 은의 가치와 동등해졌고 신왕국 시대엔 금과 은의 교환 비율이 1:2로 금의 가치가 높아졌다. 고대 메소포타미아 지역에서도 금에 은도금을 하는 등 은의 가치가 금보다 높았던거 같다. 링크. 이는 당시 은 채취방법으로는 금보다 은을 채취하기 어려운 사정에서 기인했다.
4.2. 중세~근세[편집]
고대 그리스 사회에선 명백히 금이 은에 비해 우위를 점했다. "고대 그리스 사회에는 은이 금보다 귀했기 때문에 '웅변은 은이고 침묵은 금이다'라는 말이 웅변이 침묵보다 더 좋다는 의미였으나 시대가 바뀌면서 정반대의 의미로 해석된 것"이라는 말이 있는데 사실이 아니다. 그리스의 고대 올림픽은 은메달리스트가 챔피언을 의미했다는 말도 사실이 아니다.[14] 지중해상의 무역을 장악했던 그리스 시대에는 말할 것도 없이 금이 은보다 비쌌다.[15] 애초에 저 때 은이 금보다 비쌌다면, 금관을 만들 때 은을 섞고 금을 빼돌린 대장장이의 속임수를 밝혀냈다는 아르키메데스의 일화가 성립되지 않아야 할 것이다. 역사 속에서 은이 금보다 가치 있던 시기는 이보다 고대이다. 또한 위의 격언도 고대 그리스가 아니라 19세기 영국의 격언이다(...). 이 격언에 대한 이야기는 침묵 항목을 참고.
중국은 주로 동화를 사용했으며 고대 중국에선 은의 사용이 그렇게 활발하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당장 금은의 생산량 또한 동시기 서유럽에 비해 매우 적은 수준이었으며 금은의 교환비가 1:10을 넘고 생산 역시 1:4 수준이었던 고대 유럽 경제에 비해 고대 중국의 금은 생산 비율은 1:2 수준이었고, # 금과의 교환비 역시 1:5 정도에 불과했다. 링크. 어쨌거나 또한 중국 역시 전란이나 경제발전으로 금속화폐 경제가 붕괴하여 이와 비슷한 상황을 맞이할 뻔했으나, 북송대 교자, 회자 등 지폐가 활성화되면서 금속화폐의 위치를 어느 정도 대체할 수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다만 자급자족적인 동아시아 경제에서 상업이 차지하는 비율은 흔히 말하는 자본주의 맹아론적인 수준은 되지 못하기도 하고, 무엇보다 원나라대 지폐인 교초의 남발로 한동안 화폐 경제 자체가 붕괴해버린 탓이 크다.그러나 신항로 개척 이후 아메리카 대륙로부터 대량의 은이 들어오게 되자 금, 은은 그 가치가 상당히 폭락하였으며, (가격 혁명) 그 중에서도 희귀하고 비쌌던 금에 비해 통화로써 유통이 가능할 만큼 가치가 적절하게 자리 잡게 된 은이 세계 경제를 주도하기 시작한다. 이 때 흥성한 국가들이 포르투갈과 스페인 등, 기존의 지중해 국가와는 거리가 있던 대서양 인근의 국가들이었다. 그러나 이 나라들은 정작 은이 유입되면서 자국 내의 물가 폭등, 이로 인한 수출 경쟁력의 하락, 지나치게 은에 의존하는 경제 구조, 사치를 위한 무의미한 소비 등으로 인해 몰락해버리고, 다만 꾸준히 금과 은을 공급하면서 유럽의 화폐 갈증을 해소해주는 역할을 하게 된다.
4.3. 산업혁명 이후[편집]
또한 은은 신대륙에서 유럽으로 유입되었을 뿐만 아니라 인도의 고아, 필리핀, 마카오 등 유럽이 마련한 상업 거점지를 통해 아시아 지역에서 결제 화폐로 쓰이기 시작했다. 무굴 제국의 악바르 대제가 금속 화폐를 기반으로 경제를 재편한 시기, 명나라 말과 청나라 대 도자기, 차 등의 상품을 통해 중국에 대대적으로 은이 유입된 시기, 일본이 금, 은의 대대적인 채광으로 세계 경제에 영향력을 미치기 시작한 시기[16] 등이 대체적으로 16세기 후반부터 17세기 초반에 걸쳐 있으며, 16세기 후반부터 본격적으로 발달하기 시작한 서민 경제의 안정을 기반으로 이 때부터 본격적으로 '세계 경제'라는 말을 쓸 만한 교역 구도가 형성되기 시작했다.
이 때 은 경제를 뒷받침한 것이 새로이 등장한 은 제련법들인데, 동아시아에서는 회취법, 라틴아메리카에서는 수은아말감법이 그것이었다. 회취법 자체는 사실 성경에 나온다고 할 정도로 오래된 것이나, 이것이 은광 개발에 본격적인 영향을 미치게 된 것은 역시 16세기에 들어서서 가능했다. 중국에서는 이 기술을 16세기에 이미 사용하고 있었다고 한다. 또한 16세기 초인 연산군 대에 조선의 단천 은광에서는 천민 김감불과 김검동이 회취법의 양식을 취한 연은분리법을 개발하였다.[17] 이 기술은 조선에서도 특히 중요하게 생각한 모양으로, 1539년 중종실록 기록에 보면 이 기술을 왜관을 통해 유출시킨 유서종에 대해 사죄(死罪)라고 논하고 있다.[18] 그러나 조선에서는 후술할 이유로 은 채굴량 자체가 별로 많지 못했기 때문에, 연은분리법은 큰 격변을 불러 일으키지는 못했다.
연은분리법이 동아시아 경제를 뒤흔들게 된 것은 좀 더 뒤인 1533년 이와미 은광에 이 기술이 유입되면서부터이다. 이에 대해서 조선에서 건너가 연은분리법을 전해줬다는 승려 경수, 종단이 중국인이었느냐 한국인이었느냐를 놓고 논쟁이 벌어지고 있으나, 상기한 1539년의 기록과 1541년의 또 다른 기록을 보면 조선이 연은분리법의 주요 유출 경로였음은 부정하기 힘들 듯하다. 어찌 되었건 이후 일본은 활발한 은 광산 개발과 맞물려 폭발적으로 은을 생산해내기 시작하고, 16 ~ 17세기 세계 경제에 막대한 영향을 미치게 된다.
한편 아메리카에서는 해발 수천 m에 달하는 고지에서 유럽식의 은 채취법이 산소 부족으로 인해 화력이 제대로 나오지 않으면서 한동안 잉카식 은 채취법을 이용하였다. 그러나 1550년대부터 수은을 이용해 은을 분리해내는 수은아말감법이 도입되어, 17세기 이후에는 멕시코의 은광, 볼리비아의 포토시 광산[19]을 비롯한 광산에서 다시 폭발적으로 은을 뽑아내는 계기가 된다.
그러나 세계 은 경제에서 가장 큰 이익을 본 것은 다름 아닌 중국이었다. 스페인이나 포르투갈과는 달리 일단 그 막대한 인구(논란이 많으나, 16세기 후반 당시 대략 6,000만 ~ 1억 인근), 안정적인 가구의 형성, 생산력이 이미 충분히 높았던 농업 경제로 탄탄한 내수 기반이 마련되어 있었고, 중국 내부에서도 15세기 후반부터 은 교역이 활성화되는 등 이미 은이 경제의 내부에 포괄되어 있었던 것이 중국의 강점이었다. 이후 중국은 도자기, 차 등을 유럽에 수출하면서 필리핀, 마카오를 통해 막대한 아메리카산 은을 흡수하고, 생사(生絲), 모자 등의 초기 공업품을 조선과 일본에 수출하면서 일본의 은 또한 무섭게 빨아들였다. 말 그대로 당시 최대의 은 대국이 중국이었고, 이는 청나라의 막대한 국력의 큰 버팀목이 되었다.
이런 배경이 있다보니 명, 청나라를 배경으로 하는 경향이 강한 무협물에서 은자(銀子)[20]를 화폐로 쓰는 모습을 종종 볼 수 있다. 마치 분식집에서 밥 한 끼 먹고 백만 원짜리 수표를 주는 것과 같은 것이라 현실성이 없다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은의 가치가 그 정도는 아니다. 중국의 동전은 가치에 비해 워낙 무겁기 때문에 중국은 명나라 시기부터 조각낸 은을 소액 거래에 자주 사용했다. 하지만 이건 조각내서 사용했다는 것이고 결코 1냥 2냥 단위로 지불했다는 뜻은 아니다. 그리고 중국에서 사용하던 조각 은은 현재의 백 원 동전보다 훨씬 작은 크기도 많았다. 싸구려 식당에서 국수 한 그릇을 먹고 은자로 지불하는 건 현실성이 없을지 몰라도 제대로 된 식당에서 제대로 된 식사를 했다면 조각낸 은자로 지불하는 게 제일 편하다. 근데 중국의 무협 작가들도 과거의 물가와 화폐가치에 대해서는 잘 모르는지 김용의 사조영웅전에서 곽정이 황용에게 밥을 사주면서 지나친 고액을 지불하는 장면이 있는데 중국인들에게도 좀 까이는 부분이다.은자 한냥(銀子一兩)의 가치는 얼마나 될까?
일본에서는 명청 교체기의 혼란기 이후 수출하게 된 도자기와 목기 등으로 유럽에서 은을 흡수하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국내에서도 탄탄한 농업 경제를 기반으로 금, 은광 개발이 활발해진 상태였다. 이 덕에 일본은 17세기 후반 겐로쿠 시대로 불리는 번영기를 누렸으나, 사실 은의 상당량이 조선을 거쳐 혹은 밀무역을 통해 중국으로 유출된 터라 18세기부터는 국내에서 은화의 질이 떨어지고 그 유통량이 줄어드는 데 대한 고민이 시작된다. 이로 인해 진행된 것이 보다 자급자족적이고 수입 및 수출 억제를 고안한 18세기 초반의 교호 개혁과 금, 은, 동 광산 개발과 상업의 흥성을 통해 경제 회복을 꾀한 18세기 후반의 다누마 개혁. 둘 다 실패로 분류되기는 하지만...그러나 한편으로 18세기 유럽에서는 주식, 지폐, 어음 등 신용 화폐의 유통이 활발해지고, 고전 경제학이 궤도에 오르기 시작하면서 은 경제 다음의 경제를 준비하기 시작한다. 악화가 양화를 구축한다는 말로 알려져 있는 경제 변화가 일어난 것도 이 시기. 결국 19세기에는 유럽에서 산업 혁명이 진행되며 아시아권의 면직물 등의 공업을 붕괴시키기 시작하고, 은을 계속해서 퍼내던 스페인의 국력은 라틴아메리카의 대대적인 독립 운동과 미국의 압력으로 인해 완전히 내려앉고 만다. 또한 중국은 영국이 수출하던 인도산 아편 때문에 막대한 은이 유출되면서 경제가 흔들리기 시작한다. 일본도 이미 은이 마른 상황이라, 중국까지 흔들리게 되자 동아시아권의 무역 또한 새로운 전기를 맞아야만 했다.
이후 각국을 지배하던 은 본위 경제는 붕괴하기 시작하며, 19세기 말에는 금본위제도로 완전히 대체된다.
가장 가까운 시기에 은화와 금화의 가치가 역전될뻔했던 사건은 18-19세기 영국에서 있었다. 당시 패권국가였던 영국이, 교역을 하는 과정에서 금화를 주로 거래하다보니, 일시적으로 시장에 돌아다니는 금화의 공급이 은화의 공급을 뛰어넘은 적이 있었다. 엄밀히 말하면 뛰어넘은건 아니고, 금화과 은화의 교환비에 비해서 은화의 양이 턱없이 부족했던것. 이때 영국은 이중화폐, 말하자면 금화가 비싼 화폐고 은화가 싼 화폐였는데, 시장에서 은화가 적은 현실상 사람들이 은화를 집에다 쌓아놓고 금만 가지고 거래하는 사태가 벌어지면서, 교환비에 비해 금화의 실제 양이 턱없이 많아지는 역사상 유례 없는 상황이 벌어졌다. 그리고 결과는 역사상 처음으로 금화가 악화가 되어, 양화인 은화가 구축되는 사태가 벌어졌다. 이게 그 유명한 그레샴의 법칙의 역발현. 물론 법칙을 거스르는게 아니지만. 그러나 이런 은화 가치의 폭등 속에서도 결국 마지막까지 같은 양의 금과 은의 시세는 금이 비쌌다. 그리고 역사상 은화의 가치가 금화의 가치에 비견되었던 가장 큰 사건은 이때가 마지막이었다.은은 일반적인 보석과 달리 귀금속보다는 원자재로서의 가치가 더욱 높다.[22] 특히 반도체 후공정에서 사용된다. 2010년 이전만 하더라도 반도체 후공정에서는 와이어의 소재가 금이었으나 현재는 구리와 은이 대체하고 있다. 현재는 가격적인 면에서 경제적인 구리가 금을 대체하고 있으나[23] 은은 신뢰성 측면에서 구리보다 우월하기 때문에 사용이 증가하고 있다. 그래서 은의 가치는 경제 지표와 같이 움직일 때가 많다.[24] 때문에 금보다 가격 변동성도 훨씬 높다. 호황일 때는 은 가격이 급등하며 불황일 때는 은값이 급락한다.
경제사학자들은 역사적으로 금과 은의 가격차는 60배가 정상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일부에서는 현대의 경제 시스템이 없었던 과거에는 가격비율이 16:1이던 시절이 대부분이었으므로 16배가 정상이라고 주장하기도 한다. 하지만 산업 발달이 귀금속의 수급을 완전히 바꿔 놓아서 16:1이라는 비율을 현재에 적용하기는 어렵다는 반응이 많다. 참고로 현대에 들어와서는 1980년 헌트 형제가 은을 매점매석했을 때가 제일 은이 고평가된 시기였는데, 이 당시의 금:은 가격비율이 거의 16배였다. 2020년 후반기 들어서는 달러가치가 떨어지고 코로나 19 사태로 인해 안전화폐의 인기가 올라가면서 금값이 급등했는데, 이 때문에 은 가격도 다시금 고공행진을 하고 있다